박제사의 사랑
이순원 지음 / 시공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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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독특한 느낌을 주는 추리소설을 만났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직업인 '박제사'가 등장하는 것부터 신선하다.

작품의 주인공인 박인수는 두 자녀를 둔 남성으로 한 동물연구소에서 동물 사체를 박제하는 일을 한다.

어느 날 평소와는 달리 새벽에 집에 가게 되었는데 아내가 임신 테스트기를 사용했고 두 줄이 떴다는 걸 알게 된다.

정관 수술을 받은 본인의 아이일 리 없어 아내를 다그쳤지만 아내는 아무 말도 없이 돌연 자살해버린다.

대체 어떤 사내이길래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그 남자의 비밀을 지키려 했을까를 절박하게 알고 싶었던 박인수는 아내의 핸드폰에 남겨진 문자를 토대로 나름의 조사를 진행하게 된다.

그러던 와중에 평생에 없었던 한 경주마의 박제 의뢰를 받는데, 그 말을 너무도 아꼈던 말의 주인이 자신이 조각을 한 경험이 있으니 박제를 돕고 싶다며 박인수와 함께 작업을 하게 된다.

박인수가 아내의 죽음에 담긴 비밀을 밝혀내면서 평생의 걸작이 될 말 박제를 만드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수행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채수인...

당신과 함께했던 날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당신을 이렇게 만든 사람을 나는 꼭 찾아낼 것이다.

찾아내 오늘의 일을 돌려줄 것이다.

(pg 17)

굳이 생물학적인 비유를 들지 않더라도 남성에게 있어서 자신의 배우자가 타인의 아이를 밴다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박인수는 그 결과 배우자의 목숨까지 잃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엄마의 죽음을 제대로 설명할 길도 없어 오히려 아버지인 자신이 의심을 받기도 한다.

분노에 찬 박인수는 아내가 남긴 흔적을 뒤쫓지만 그 흔적에서 오히려 아내의 힘들었던 삶의 모습들을 찾아내면서 생전에 아내의 상처를 더 보듬어주지 못했던 박인수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아내를 생각하면 그것이 가장 아쉽고 안타까웠다.

배신의 분노와 안타까움과 연민이 함께 남는 사람이었다.

어느 순간 불쌍하다가도 분노가 치밀고, 용서 못 할 배신감이 치밀다가도

다시 한없이 불쌍해 저절로 미안한 마음이 들게 했다.

옆에 있으면 어깨라도 붙잡고 펑펑 울고 싶을 만큼 마음이 여리고 아픈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의 책임에 대해 단호한 부분이 있었다.

(pg 71)

독특한 점은 추리소설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사건 해결 못지않게 말 박제를 만드는 일도 꽤 큰 비중으로 다뤄진다는 것이다.

처음 가죽을 벗길 때부터 최종 도색에 이르기까지 박제의 전 과정이 굉장히 디테일하게 묘사되어 뚝딱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한 땀 한 땀 만드는 것이라는 게 잘 느껴졌다.

아내의 죽음을 밝혀내고자 했던 조사로 점차 아내의 삶을 알게 되었듯, 말의 죽음을 기리려던 말 박제는 말이 가장 아름답게 빛났던 시절을 고스란히 담아내게 되었다.

작품 뒤 해설에서도 아내의 삶과 말 박제가 동일한 선상에서 다뤄지고 있음을 짚어주고 있다.

말을 박제하려면 살아 있을 때 말의 모습을 정확히 알아야만 한다.

아내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의 진상에 접근하는 일은

아내의 지난 시간을 되짚어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pg 308-309, 작품 해설 중)

추리소설이라고는 하지만 리얼리티를 잘 살리고 있어서 형사도 아닌 박인수가 미스터리를 직접 해결하는 전개로 흘러가지도 않는다.

결과적으로는 경찰의 수사를 통해 진실을 알게 되고, 나름 반전도 있는 결말이라 할 수 있었다.

도입에서 분노감에 휩싸여 복수를 다짐했던 박인수는 작품 후반에 이르러서야 모든 전말을 알게 되지만 그때 이미 복수심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허망해진 가슴을 안고 다시 박제사의 삶으로 돌아갈 뿐이었다.

박인수의 마음에 가을이 빈 들판처럼 유독 허망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도 그래서였다.

(pg 299)

추리소설하면 흔히 떠올리기 쉬운 피비린내 나는 살인 현장이나 냉철한 탐정 같은 캐릭터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읽는 동안 굉장히 잔잔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는 날씨와 환경적인 묘사도 풍부하고 박인수의 내면 묘사도 심경 변화에 충실하게 잘 서술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면서도 적당한 긴장감이 느껴지며 읽은 후 여운도 길게 남는 작품이었다.

일본 느낌 물씬 풍기는 천편일률적인 추리소설들이 조금 식상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이라면 한국 특유의 서정성이 돋보이는 본 작품이 꽤 신선하게 느껴질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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