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 가성비의 시대가 불러온 콘텐츠 트렌드의 거대한 변화
이나다 도요시 지음, 황미숙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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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을 보고 사무실에서 같이 일하는 한 분이 떠올랐다.

그 분은 유행하는 드라마나 영화가 있으면 이를 영상 하나로 압축해서 알려주는 유튜브를 시청한다고 했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그게 원작을 본 것과 같다고 할 수가 있나? 그렇게 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라는 의문을 가졌었다.

하지만 그러한 영상 시청 습관이 특이한 일이 아니라는 걸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저자는 영상 콘텐츠를 볼 때 위에서 소개한 압축 유튜브 영상 뿐 아니라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장면이나 회차를 스킵 하는 것, 1.5배속이나 2배속 등 빠른 속도로 재생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같은 목적을 가진 행위라고 보고 있다.

시간을 활용함에 있어서도 가성비를 찾는 시대가 열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을 가속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OTT 서비스의 확대 보급이다.

어느 OTT 서비스든 여가 대부분을 콘텐츠 시청에 쏟아부어도 보고 싶은 영상을 다 보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볼 것이 넘쳐나는 시대가 되었다.

게다가 내가 본 콘텐츠의 개수만큼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아닌, 많이 보면 볼수록 콘텐츠당 단가가 싸지는 '구독' 형태의 상품은 사람들에게 온전한 속도로 콘텐츠에 집중할수록 손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사람들은 돈을 지불하는 동시에 상품을 받으면서,

대가를 치르고 무언가 얻은 기분을 실감한다.

그만큼 상품을 가치있게 여기고 낭비하지 않으려 애쓴다.

하지만 월정액 자동이체로 한 달 이용권을 구입할 때는 돈을 지불한다는 감각이 떨어진다. 그러니 영상을 아무렇게나 대해도 큰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pg 62)

저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콘텐츠를 접하는 태도가 우리가 과거에 말하던 '감상'의 형태와는 다른, '소비'와 가까운 형태라는 점을 지적한다.

감상은 그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는 반면, 소비는 무언가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는 부가적인 행위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즉, 작품 자체를 즐기기 위해 시청한다기보다는 지금 유행하는 작품을 몰라서 대화에 낄 수 없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공부하듯이, 숙제하듯이 보는 행동에 가깝다는 것이다.

예술 - 감상 - 감상 모드

오락 - 소비 - 정보 수집 모드

(pg 58)

물론 이러한 소비 행태를 통해 자신이 마음에 드는 콘텐츠를 발견하게 되면 다시 보거나 반복해서 보면 그만이다.

실제로 콘텐츠를 빠르게 보는 사람들의 경우 좋아하는 콘텐츠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는 경향도 함께 관찰된다고 한다. (이 역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봐도 비용이 증가하지 않는 OTT이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 패턴이다.)

하지만 이런 행위를 통해 해당 콘텐츠 제작자가 의도한 바를 온전히 느끼는 것에는 당연히 무리가 있다.

대사가 없는 부분을 스킵하면 대사가 없는 와중에 표현되었던 표정 연기나 감정 연기는 모두 건너뛰는 셈이다.

때로는 말보다 표정이, 행동 하나가, 어느 위치에 놓여 있는 사물 하나가 가지는 의미가 있을텐데 이런 것들을 모두 건너뛰고 결말과 줄거리만 알면 끝나게 되는 것이다.

(아래 구절의 '완'은 '완급 조절'의 '완'이다.)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완(緩)'을 시청자가 마음대로 바꿔 보는 것이

바로 빨리 감기, 건너뛰기다.

여기서 각본가의 의도는 무시당한다.

(pg 69)

그러다보니 필연적으로 '쉬운' 컨텐츠만 찾게 되는 경향도 함께 증가한다.

대사를 통해 하나하나 알려주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의 영화와 드라마 속 대사가 최근 30년간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상업 작품이라면 다양한 이해력을 가진 관객 누구나 만족할 수 있는(누구의 기분도 해치지 않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이는 제작자의 배려가 필수라는 의미에서 '소수에 대한 존중',

'다양성에 대한 관용'을 포함하는 정치적 올바름과 같은 예의나 규범으로 여겨진다.

정보 이해력이 낮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베리어 프리,

즉 '모두에게 친절한 작품'이야말로 '좋은 작품'이다.

(pg 98-99)

SNS의 발달로 작품 속 불편함을 콘텐츠 제작자에게 다이렉트로 피드백 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이러한 경향이 더 심화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콘텐츠 제작자들의 어려움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쉬우면서도 깊게 빠져들고 싶은 사람들은 충분히 파고 들며 즐길 수 있는 깊이까지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이 현상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놀랍게도 시대의 변화는 막을 수 없으니 앞으로 콘텐츠 제작자들이 자신의 콘텐츠가 스킵되거나 빨리 재생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본이 이를 원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변화는 오히려 작품의 공급자 측(영화 제작사 등)이 주도해서 진행해왔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중략 -영화관에서 상영할 뿐 아니라 텔레비전 방영권, 영상 배급권 등을 판매하는 편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다.

영상 배급사 뿐만 아니라 제작사이기도 한 넷플릭스나 아마존 혹은 TV 방송국이

빨리 감기나 건너뛰기 기능을 자사 서비스에 추가한 것도

역시 '원형이 아닌 형태의 감상'에 대한 적극적인 제안이다. 왜 그랬을까?

상당한 수의 관객이 이를 원하기 때문이다.

(pg 220)

저자의 표현을 빌면 '원형이 아닌 형태의 감상'을 원하는 소비자가 많아지고 있고 공급자가 이를 수익의 원천으로 인지하고 있다면 콘텐츠 제작자들 역시 따라가지 않을 방법이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처음 카세트 테이프가 나왔을 때 라이브 음악이 아닌 음악은 통조림 음악이라며 무시당했던 것이나, 처음 TV가 나왔을 때 극장의 큰 화면과 비교할 수 없는 저열한 화질과 음질로 제대로 된 감상이 가능하겠냐는 비아냥을 들었다는 것을 그 예시로 들고 있다.

실로 놀라운 결말이 아닐 수 없다.

4장까지는 '원형이 아닌 형태의 감상'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하게 부각하고 있어서 저자가 이를 반대하는 입장이라 생각했는데 5장인 결말에서 기술의 발전은 막을 수 없고 이 형태가 우리의 콘텐츠 이용 습관의 미래 모습이라는 쪽으로 급선회하고 있는 것이다.

결말을 읽고 나니 나 역시 이러한 행위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안 좋게 생각했던 경향이 있지 않았나 싶다.

어찌 됐든 자신의 시간과 비용을 들여 콘텐츠를 접하는데 이를 '감상'하든 '소비'하든 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계제는 아니다.

다만 요즘 긴 글을 소화하지 못하는 문해력 부족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데 영상의 이해도도 점차 낮아지는 것이 과연 인류에게 좋은 현상인지는 모르겠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꼰대에 더 가까워지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책 자체는 200쪽이 조금 넘는 분량이며 설문이나 인터뷰 인용이 많아 금세 읽을 수 있다.

(K-콘텐츠의 인기 덕분에 일본 저자의 책이지만 국내 드라마 사례도 엄청 많이 등장해 반가운 느낌도 들었다.)

이 책 역시 저자가 제시한 '원형이 아닌 형태의 감상'을 한다면 사실 마지막 5장만 읽어도 충분할 것이다.

저자가 여기까지도 이해해 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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