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1Q84 1~3 세트 - 전3권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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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점만 가면 이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불티나게 팔리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게 벌써 십여 년 전이다.

지금도 독서 편식이 심하지만 그때는 더했기에 관심도 없던 책이었는데 세월이 지나 어느새 우리 집에도 꽂혀있게 되었고 마침 읽을 책이 딱 떨어져서 드디어 펴들게 되었다. (사실 꽂혀있은지도 꽤 되었지만;;)

워낙 전설적인 작가의 대표적인 작품이고 국내에서만 200만 부 이상이 팔렸다는 사실만으로 책의 재미적인 부분은 어느 정도 소개가 가능할 것 같다.

만만하지 않은 두께에 총 3권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꽤 긴 이야기지만 읽은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오래된 작품이긴 하지만 작품의 스포일러가 있으니 책을 읽을 사람이라면 주의하기 바란다.)

2권까지는 작품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덴고와 아오마메의 시각이 번갈아가며 이어진다.

분량은 길지만 스토리라인 자체는 상당히 단순한 편이다.

아무 연관성 없어 보이는 '수학학원 강사 겸 소설가 지망생'과 '스포츠센터 트레이너 겸 냉혹한 암살자'가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리며 진행되는 사랑 이야기인데, 이들이 사실은 어릴 적 단 한순간,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던 초등학교 동창이라는 설정이다.

이렇게 쓰니 참 매력 없어 보이는 줄거리인데 이게 한동안 베스트셀러일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나 작가가 가진 문장력과 쉽게 예상하기 어려운 전개, 현실과 판타지가 뒤섞인 독특한 세계관 덕분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러브 스토리니 둘이 이어지든지 말든지 둘 중에 하나의 결말을 향해 가겠지만, 그 안에 벌어지는 일들이 꽤나 많고 엮여있는 인물들도 많아서 아래 구절처럼 전개가 쉽게 예상되는 작품은 아니다.

역사가 인간에게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명제는

'그 당시 앞일이 어떻게 될지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1권, pg 10)

1984년이라는 구체적인 숫자까지 명시해 둔 굉장히 현실적인 배경에서 시작하지만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공기 번데기'라는 소설의 내용이 그들의 현실 세계와 겹치면서 판타지스러운 느낌으로 이어진다.

작품의 제목인 1Q84는 아오마메가 갑자기 자신이 살던 세계와 다른 세계에 떨어지고 말았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이 현실이 무슨 현실인지를 알아보겠다는 뜻에서 Question의 Q를 따 1Q84년이라 부르자고 정한 것이다.

지금은 마블 영화 덕에 그리 어색하지 않은 개념인 '멀티버스'라고 보면 된다.

개인적으로 이런 전환(현실과 비현실이 부자연스럽게 공존하는)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충분한 페이지에 걸쳐 한 겹씩 상세히 묘사를 해 나가기 때문에 읽다 보니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가게 되었다.

(물론 블루투스 임신에 이르자 '이거 선넘네'라는 생각이 좀 들기는 했다.)

작가의 명성답게(?) 섹슈얼한 묘사도 꽤나 많이 등장하는데 정작 주인공 둘의 주요 서사는 10살 때 손 한번 잡은 것이 전부라는 점이 신선한 대비로 다가온다.

작품 내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 역시 20년 전에 아오마메가 교실에서 덴고의 손을 잡았던 그 짧은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인간사에서 선택이 갖는 중요성이야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이 작품 역시 어떤 선택을 하느냐, 그리고 그 선택들이 어디로 인도하느냐가 스토리의 중요한 분수령이 된다.

"우리의 기억은 개인적인 기억과 집단의 기억이 합쳐져 만들어지는 거야."

덴고는 말했다. "그 두 가지 기억은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지.

그리고 역사라는 건 집단의 기억을 말하는 거야.

그것을 빼앗으면, 혹은 고쳐 쓰면 우리는 정당한 인격을 유지할 수 없어."

"당신도 고쳐 썼어."

(1권, pg 544)

3권부터 우시카와라는 자의 시각이 추가된다.

덴고에게 후원금을 주겠다며 접근했던 그는 아오마메를 쫓기 위해 다시 그들의 주변을 맴돈다.

여기서 작가는 일부러 우시카와의 시각을 한 발짝 늦게 알려준다.

쫓는 자의 시각이 먼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쫓기는 자의 시각이 먼저 등장하는 것이다.

반대로 되어야 할 것 같지만 묘하게 의도된 시점 차이 때문에 3권에서도 긴장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전개 자체는 꽤나 느리다고 할 수 있는지라 호불호가 있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미끄럼틀에서 달 한번 쳐다보는 데 50페이지가 걸리니 솔직히 나도 3권 중반부터는 살짝 짜증스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어갈 수밖에 없었던 건 물론 결말이 궁금해서이기도 하지만 중간중간 생각에 잠길 수 있는 구절들이 나와주기 때문이다.

"일정 나이를 넘으면 인생이란 무언가를 잃어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아요.

당신의 인생에서 소중한 것들이 빗살 빠지듯이 하나하나 당신 손에서 새어나갑니다.

그리고 그 대신 손에 들어오는 건 하잘것없는 모조품뿐이지요.

육체적인 능력, 희망이며 꿈이며 이상, 확신이며 의미, 혹은 사랑하는 사람들,

그런 것이 하나 또 하나, 한 사람 또 한 사람, 당신에게서 떠나갑니다. - 중략 -

그것이, 예, 말하자면 나이를 먹는다는 겁니다."

(2권, pg 160)

"아버님은 정말로 그 일을 좋아하셨나봐. NHK 수신료를 수금하러 다니는 걸."

"좋다든가 싫다든가, 그런 종류의 문제가 아니었을 거야." 덴고는 말했다.

"그럼 어떤 종류의 문제였는데?"

"그것이 아버지에게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었던 거야."

"그럴까?" 아다치 구미는 말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런 삶의 방식이 어떤 의미에서는 정답인지도 몰라."

"그럴지도."

(3권, pg 555)

"멀리까지 간다고 했지." 다마루는 말한다. "얼마나 멀어질까."

"그건 숫자로는 잴 수 없는 거리예요."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 사이의 거리처럼."

(3권, pg 653)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해피엔딩을 맞게 된다.

불행했던 과거와 그냥저냥 별 불만은 없었던 현재를 지나 두 사람이 '행복'이라는 감정을 나눌 수 있는 미래가 보이며 끝이 난다는 점은 마음에 들었다.

고독한 한 소년과 고독한 한 소녀다. 초겨울의 방과후 교실.

상대에게 무엇을 내밀어야 할지, 상대에게 무엇을 원해야 할지,

두 사람은 힘을 갖지 못했고 지식도 갖지 못했다.

세상에 태어나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사랑받은 적도 없고,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 적도 없었다. - 중략 -

그때의 두 사람은 알지 못했지만, 그곳은 세계에 단 하나뿐인 완결된 장소였다.

한없이 고립되어 있고, 그러면서도 고독에 물들지 않는 장소.

(3권, pg 675-676)

3권까지 다 읽고서 인상적인 구절을 정리하다 보니 1권 초반부에 이미 이런 구절이 있었다.

이 구절이 두 사람의 미래를 암시하는 구절이었다는 걸 읽을 당시에는 전혀 몰랐다.

두 사람은 나비와도 같은 결말을 맞이한다.

"나비는 그 무엇보다도 허망하고 우아한 생물이랍니다.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게 태어나 한정된 아주 조금의 것만을 조용히 원하고,

이윽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살그머니 사라져요. 아마도 이곳과는 다른 세계로."

(1권, pg 178)

다 읽은 후 재미있었냐고 물으면 주저 없이 재미있었다고 말할 것 같다.

하지만 이 작품이 그렇게 광풍을 일으킬 정도로 대단했는지를 물으면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 대답할 것 같다.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텍스트를 이미지로 떠올리며 그 작품이 전해주는 감상을 온전히 느끼는 것에 익숙한 독자라면 충분히 즐겁게 읽을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전개가 너무 느려서 때로 답답함이 느껴질 때도 있었다.

또한 작품 속에서 소개된 판타지스러운 요소들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는 점도 아쉬웠다.

독자는 리틀 피플이 어떤 존재인지, 공기 번데기는 무슨 역할을 하는지, 심지어 왜 만드는 건지도 이 긴 분량 안에서 명확히 읽어낼 수 없다. 그저 막연하게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읽고나서 찜찜함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쨌든 나에게는 이런저런 아쉬움들이 좀 남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작품이니만큼 읽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는 결코 아니므로 책을 읽어볼 생각이 있다면 한번 도전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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