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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신호가 감지되었습니다
정온샘 지음 / 팩토리나인 / 2022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독특한 소재를 가진 국산 SF 소설이 나왔다고 해서 읽어보게 되었다.
한 스토리 공모전에서 입상한 작품이라고 하니 아직 대중적으로 검증되진 않았지만 개성 있는 작품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본 작품은 SF의 단골 소재인 시간 여행에 대한 이야기다.
최근에 영화 '엔드게임'에서 봤던 시간 여행 개념이 아닌 우리에게 좀 더 익숙한 '백 투 더 퓨처'식의 시간 여행이라 과거에 어떤 일을 하고 오면 그 결과가 현재에도 바로 나타난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타임머신이 개발된다.
빈부격차의 심화로 자살률이 치솟던 상황, 이제 막 개발된 타임머신은 아주 먼 과거로까지는 돌아갈 수 없어서 자살자를 막는 용도로만 제한적으로 활용하기로 한다.
마치 영화의 '마이너리티 리포트'처럼 자살한 사람이 발생하면 그 사람이 죽기 몇 시간 전으로 돌아가 그 사람을 살리는 것이 가능해진 사회인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회영은 몇 년 전 홀로 자신을 키워온 어머니가 자살로 세상을 떠난 후 힘겨워하는 젊은 여성이다.
타임머신을 이용해 자살자를 구하는 TF에 소속되어 많은 사람을 구했지만 자신의 어머니를 구할 정도로 멀리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는 사실에 슬퍼하고 있었다.
그러던 회영이 타임머신의 백도어에 10년을 넘어 30년까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기능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자 회영은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무단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게 된다는 내용이다.
소재는 분명 참신하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SF라기보다는 따뜻한 드라마에 가까운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일단 세계관에 논리적인 부분이 다소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엄청난 장치를 만들었는데(심지어 휴대용!) 이를 특정한 나라에서 아주 제한된 목적으로만 사용하도록 전 세계가 내버려 둔다는 설정도 그렇고, 그렇게 중요한 물건을 주인공처럼 철없어 보이는 젊은이가 사적으로 마구 사용하는데도 타임머신에 블랙박스조차 달지 않았다는 점 등이 읽으면서 계속 의문으로 남아야 했다.
타임머신은 하나도 신기해하지 않는데, 지금의 스마트워치에 AI가 탑재되었을 뿐인 스마트워치를 보며 신기해하는 등장인물들의 태도도 자연스럽진 않았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면 타임머신이 아니라 마법으로 시간 여행을 하는 판타지물이었어도 스토리에는 큰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말하는 스마트 워치도 말하는 동물로 얼마든지 갈음할 수 있다.)
하지만 작품이 하드 SF를 지향하는 것이 아닌 만큼 드라마의 서사는 좋았다.
가까운 누군가를 자살로 잃은 상실감을 이겨내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도와주고자 하지만 자신이 닫아 둔 마음의 문을 스스로 열고 나오지 않으면 타인의 도움도 도움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모든 감정의 변화를 겪어낸 후 결국 회영이 맞이하는 심리적 안정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정립이 애잔하면서도 충분히 공감 가능한 괜찮은 결말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자살 유가족으로서 그 상실감을 모르는 바 아니다.
나도 '엔드게임'을 보면서 나에게 타임 스톤이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야 그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까를 상상하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곧 부질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시간을 되돌려도 녀석은 결국 스스로 떠났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이 작품이 끌렸는지도 모른다.
SF 작품을 좋아하기도 해서 아쉬운 부분이 전혀 없진 않았으나, 나름 힐링이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어쩌면 슬프고 불행한 순간도 있겠죠.
그런데 난, 한순간이라도 행복하니까 그 길을 선택하는 거에요.
남들이 지금까지 내 인생이 불행했을 거라고 깎아내려도,
난 분명 내 인생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 안에서 행복했어요.
다시 물어볼게요. 나한테 그런 삶이 불행했다고 한마디라도 들은 적 있어요?"
(pg 221)
유전자의 보존은 인류 이전부터 새겨진 모든 생명체의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삶을 끊어낸다는 것은 어지간한 의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때문에 타인이 이를 쉽게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조금은 오만한 생각이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자살의 책임은 죽은 자가 모두 가지고 떠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 죽음에 우리가 보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그저 남은 삶을 남은 사람들과 함께 충실하게 살아내면 되는 것이다.
이 작품 속 회영이 찾은 답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