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꽃 (출간 20주년 기념 초판본 헤리티지 커버) 복복서가 x 김영하 소설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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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김영하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어서 망설임 없이 골랐다.

(e북으로 읽었는데 해당 콘텐츠에 페이지가 적혀 있지 않아서 발췌문에 페이지를 표기하지 못했다.)

이번 작품은 1900년대 초 멕시코의 에네켄(속칭 애니깽) 농장에 노예로 팔려간 조선인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멕시코로 가면 돈을 벌어 올 수 있다는 말에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배에 오른다.

일을 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밥이 나오는 생활은 그들로서는 꿈같은 것이었다.

일 년 내내 일을 해도 가뭄이 들거나 홍수라도 나면 그대로 허탕이었다.

보리를 거두는 봄까지는 굶주릴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 중략 -

겨울이 없는 나라, 땅은 넓은데 사람이 없어 그 값이 금과 다를 바 없다는 멕시코는

그들에게 꿈의 나라였다.

소설의 주인공인 김이정도 고아로 살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멕시코로 떠난다.

배에는 몰락해가는 나라의 왕족인 이종도의 가족도 있었다.

신분은 높았으나 가진 재산이 없었던 그는 멕시코에서도 자신이 양반으로 살 줄 알았던 세상 물정 모르는 자였다.

그의 딸이었던 연수와 김이정은 배 안에서 서로에게 이끌리게 된다.

그들 외에도 전직 군인부터 무당, 도둑, 전직 종교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배 안에서 만나게 된다.

하지만 도착한 멕시코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총과 채찍으로 무장한 지주들과 에네켄이라는 생전 처음 보는 식물을 끊임없이 채취해야 하는 가혹한 노동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머나먼 이국 땅에 도착한 다양한 사람들의 생존 투쟁이 작품의 큰 줄기라 할 수 있겠다.

총 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1부에서는 에네켄 농장에 귀속된 총 4년의 계약 기간을 버텨내는 이야기다.

2부에서는 멕시코에서 터진 내전에, 3부에서는 과테말라의 내전에까지 휘말리게 된다.

물론 배에 오른 것은 그들의 선택이었지만 사실상 사기를 당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일제가 조선을 합병해버린 탓에 돌아갈 조국도 없어져 버린 상황.

하늘과 땅, 그 사이를 강산이라 부르던 사람들이었다.

강과 산이 없는 세상을 그들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유카탄엔 그 두 가지가 모두 없었다.

누군가는 지주에 붙어 작은 권세를 누리려 하고, 누군가는 탈출하다 목숨을 잃기도 했으며, 누군가는 권력자에게 몸을 팔아 생존한다.

때로는 집단으로 저항도 해봤지만 그들의 삶은 크게 나아지지 못했다.

조선의 전통적인 신분제도에서라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김이정과 연수의 사랑은 멕시코의 가혹한 환경에서도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노예로 팔려왔기에 자유가 없었고, 시간이 흘러 자유를 얻은 뒤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언제부터 개인이 나라를 선택했지? 미안하지만 국가가 우리를 선택하는거야.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어두운 작품이었다.

당연히 우리 조상들이 고생한 이야기니 유쾌하게 읽히지는 않겠지만, 저자 특유의 차가운 서술이 이 작품의 분위기를 더욱 독특하게 만들어주는 느낌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는 일말의 해피엔딩도 존재하지 않았다.

세상에 저항해 보려고도 하지만 큰 물줄기에 휩쓸려가는 자갈돌처럼 개인의 움직임은 큰 의미를 갖기 어려웠다.

남의 나라 내전에 참가해 목숨을 잃기도 하고 마약 중독자가 되기도 하며 작은 권세를 누리려다 반란에 진압되어 처형되기도 한다.

저자는 이들을 멀찍이 관찰하는 느낌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특별한 슬픔도, 애정도 묻어있지 않은 담담한 문체로 꼭 필요한 서술만을 남겨 둔 느낌이다.

그러면서도 긴장감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유지되는데 그 때문에 짧지 않은 작품인데도 꽤 짧은 호흡으로 모두 읽을 수 있었다.

물론 구체적인 인물이나 사건은 픽션이지만 멕시코로 이주한 조선인 노예들의 삶은 실제 역사다.

태어날 시대를 자신이 고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들 역시 시대의 희생양일 수밖에 없다.

그들이 먼 미래에 전 세계인들이 조선말로 된 노래와 영화에 열광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들의 고단한 삶에도 무언가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비록 픽션에 한 발을 담가 둔 소설 속의 인물들이지만 한순간의 작은 희망조차도 갖지 못하고 허망하게 사라져간 그들의 삶이 무척이나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로부터 100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들의 삶은 잊혀서는 안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역사소설 자체를 굉장히 오랜만에 접했는데, 역시 저자의 명성에 걸맞게 재미 면에서도 훌륭했고 읽은 후 여운도 오래 남았다.

조상들의 아픈 역사를 담고 있기에 현재를 살아가는 한국인이라면 누가 읽더라도 비슷한 감상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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