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복복서가 x 김영하 소설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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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김영하 작가는 워낙 영상으로 많이 접해서 이름을 들으면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그런데도 아직 그의 책을 한 번도 읽지 않았다는 생각에 부끄러운 마음으로 한 작품을 골랐다.

최근에 신작을 발표해서 이를 읽어 보려다 그의 대표작도 아직 읽지 못했다는 생각에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부터 읽어보기로 했다.

다 읽은 시점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대강의 줄거리를 알고 보았는데도 이렇게까지 재미있는 작품일 줄은 몰랐다.

(e북으로 읽었는데 해당 콘텐츠에 페이지가 적혀 있지 않아서 발췌문에 페이지를 표기하지 못했다.)

작품은 고령으로 알츠하이머가 온 연쇄 살인범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의 화자인 김병수는 과학적 수사 기법이 개발되기 전부터 살인을 저질러 온 터라 운 좋게(?)도 자신이 저지른 짓이 발각되지 않고 노년을 맞았다.

타고난 사이코패스로 묘사되는 그에게 죄책감이란 찾아보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내 마음은 사막이었다.

아무것도 자라지 않았다. 습기라곤 없었다.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던 어린 날도 있었다.

내겐 너무 어려운 과제였다. - 중략 -

옛사람들은 거울 속에 악마가 살고 있다고 믿었다지.

그들이 거울에서 보던 악마, 그게 바로 나일 것이다.

죄책감은 본질적으로 약한 감정이다.

공포나 분노, 질투 같은 게 강한 감정이다.

공포와 분노 속에서는 잠이 안 온다.

죄책감 때문에 잠 못 이루는 인물이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나는 웃는다.

인생도 모르는 작자들이 어디서 약을 팔고 있나.

하지만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것에는 두려움을 느낀다.

자신의 죄가 밝혀지거나 처벌을 받게 될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저지른 그 모든 작품(살인)의 기억들을 잃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즉 그에게 있어서 과거에 저지른 살인들은 단순한 욕구 해소의 수단이나 충동적으로 저지른 실수가 아니라 심혈을 기울여 세심하게 행한 의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기억을 모두 잃는다면 더는 인간이랄 수가 없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가상의 접점일 뿐,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중증 치매 환자와 짐승이 뭐가 다를까. 다른 것이 없다.

먹고 싸고 웃고 울고, 그러다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게다가 그가 수양딸로 키워온 은희를 노리는 박주태라는 새로운 연쇄살인마의 등장에 그는 경쟁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젊은 연쇄살인마에게 선수를 빼앗기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그는 계속 흐려지는 자신의 기억과도 사투를 벌인다.

때문에 그의 시선으로만 작품 속 세계를 볼 수 있는 독자 역시도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짜 일어나는 일인지를 명확히 알 수가 없다.

작품 후반부로 갈수록 현실과 망상이 겹쳐지면서 점점 더 알 수 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인지라 읽다가 '이거 끝을 어떻게 내려나'하는 우려가 들기도 했다.

하지만 괜히 영화로까지 만들어질 정도의 인기와 명성을 얻은 작품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듯 그 결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유명한 작품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읽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결말을 자세히 남기지는 않겠으나 개인적으로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결말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아래의 문구를 읽을 땐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문득, 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무엇에 진 걸까.

그걸 모르겠다. 졌다는 느낌만 있다.

나름 반전이라면 반전일 수도 있겠고, 읽는 이들의 정의관에 반하지도 않으면서 납득도 되는 결말이랄까.

노년까지 사회는 그를 처벌하지 못했지만 결국 세상은 그를 처벌했다는 느낌이 드는 깔끔한 결말이었다.

사람들은 모른다. 바로 지금 내가 처벌받고 있다는 것을.

신은 이미 나에게 어떤 벌을 내릴지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나는 망각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이미 영화로 만들어진 것은 알고 있었는데, 책을 읽고 나니 이를 영화로 어떻게 표현했을지도 궁금해졌다.

사실 소설 내에서 직접적으로 벌어진 사건은 별로 없고, 김병수의 과거 기억과 현재의 모호한 현실 인식이 주가 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결말이 나름 중요한데 이를 알고 봐도 영화가 재미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평이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영상화가 잘 된 모양이다.

e북으로 읽어서 정확한 분량을 잘 모르겠지만 체감상 200페이지가 채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리 길지 않은 서사임에도 불구하고 긴장감과 몰입감이 정말 좋았다.

나중에 치매가 온다면 진짜 이런 느낌일까 싶을 정도로 기억을 잃는 것에 대한 공포가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문장도 역시 인상적이었다.

쉽게 읽히면서 인상깊은 구절도 꽤 많았다.

길이가 짧기도 했지만 깔끔한 문장 덕에 굉장히 빨리 읽은 느낌이다.

(체감상 서평 쓰는 이 시간이 책을 읽은 시간보다 길게 느껴질 정도로)

적지 않은 작품을 발표한 작가이니만큼 다음에 읽을 작품을 쉽게 고를 수 있을 것 같다.

술만 마시면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다 잊어버리는 동네 사람이 있었다.

죽음이라는 건 삶이라는 시시한 술자리를 잊어버리기 위해 들이키는 한 잔의 독주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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