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강사입니다 배민 합니다 - 2022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걷는사람 에세이 16
이병철 지음 / 걷는사람 / 2022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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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녹을 먹는 입장에서 시간강사라는 단어를 들으면 불편한 감정이 들 수밖에 없다.

학생을 가르치는 교원이지만 그만한 대우를 받고 있지도 않고 고용의 형태 역시 불안하다.

물론 시수도 적고 연구나 행정에 대한 부담도 적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정도의 임금 차이가 정당하냐 물으면 할 말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 불편함을 더해주는 듯 시간강사이면서 배민 라이더를 뛰는 저자의 책이 나왔다.

책의 서두는 저자 자신의 자조로 출발한다.

내 얘길 듣고 속이 탄 엄마는 "공부를 그렇게 많이 했으면서 할 알이 그것밖에 없어?"

말했고, 나는 "공부를 많이 해서 할 일이 이것밖에 없는 거야" 대답했다.

(pg 14)

책은 담백하게 제목 그대로의 내용을 담았다.

열심히 살아왔지만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배달을 뛰는 삶, 그러다 보니 어느새 배달이 주업이 되고 수업과 글쓰기는 부업이 되어버린 삶을 담담하게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청승맞거나 가슴이 먹먹해지는 내용만 담고 있지는 않다.

작가가 나와 비슷한 연배인 듯한데 아직 독신이어서 그런지, 태생이 원래 긍정적인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배달 일을 뛰는 자신에 대해 지나친 비하에 빠지거나 우울한 정서를 담아내고 있지는 않았다.

(자녀가 있고 이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배달을 뛰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면 모르긴 몰라도 우울한 이야기가 훨씬 더 많이 담겼을 것이라 생각한다.)

책의 후반 '작가의 말'에서 '자기 연민에 빠지거나 페이소스 과잉이 될까 두려워' 책 쓰기를 망설였다는 고백이 있는데 이 점을 의식하며 쓴 덕분인지 책 자체가 마냥 우울하진 않다.

하지만 사람이기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는 감정들이 충실하게 담겨 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부담, 배달을 다니면서 겪게 되는 부조리한 일들, 배달기사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대한 씁쓸함,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을 베푸는 이들에게 느끼는 고마움과 감동까지 말이다.

게다가 작가가 시집을 두 권이나 출판한 시인이라는 것이 여실히 느껴지는 문장들도 책의 재미를 더해준다.

소개하고 싶은 구절들이 정말 많았는데 그 중 추리고 추려서 몇 가지만 남겨 두려고 한다.

사이드미러에 차오르는 붉은 노을이 너무나 아름다워 한참 바라보았다.

신호를 기다리다 보니 누군가는 머리에 쟁반을 이고, 누군가는 리어카를 끌고,

또 누군가는 양손에 무거운 봇짐을 들고 횡단보도를 바삐 건너고 있었다.

다들 치열하게 살아가는구나.

저 노을은 수많은 이들의 성실한 생이 익어 가는 빛깔이겠지.

그래, 다시 달려 보자. 안 좋은 날이 있으면 좋은 날도 또 오겠지.

(pg 102)

시인의 감성이라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신호를 기다릴 때 주변의 차를 보며 '나랑 비슷한 나이인 거 같은데 뭘 해서 저렇게 좋은 차를 탈까'를 궁금해하는 나와는 사뭇 다른 감성을 보여준다.

밥 한 끼를 얻어먹은 감상도 아래처럼 멋있게 표현하고 있다.

사람의 일생이란 따뜻한 밥 한 끼를 먹기 위해 온 세상을 떠돌아 헤매는 일이 아닌가.

나는 OO족발에서 그 밥 한 끼를 먹었다. 이만하면 성공한 생이다.

거나하게 취해 인사하고, 문 열어 밖에 나오니

봄바람에 실려 온 라일락 향기가 코끝에 닿았다.

발레리의 시구를 외웠다. "바람이 분다. 살아 봐야겠다!"

(pg 122)

작가가 배달기사 일을 하면서 느낀 다양한 소회들이 짧은 글들에 담겨 있는데 이 중에서도 애주가인 나에게 너무나도 와닿는 글이 하나 있었다.

'소주 한잔하자'라는 글인데 이 부분은 전체를 다 인용하고 싶을 정도로 문장마다 명문이다.

소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슬플 때도 맥주 마시는 미친놈에 속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소주에 대한 감상은 가슴속을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소주는 눈물이다. 소주는 비틀거리며 마시는 술, 울면서 마시는 술, 나타샤를 기다리며 혼자 쓸쓸히 앉아 마시는 술, 빗물에 타서 마시는 술이다.

사업 망하고 생맥주 마신다는 사람 못 봤다.

실연당하고서 복분자주 마시는 미친놈도 못 봤다.

기쁜 날에 마시는 술은 소주 말고도 많지만 슬프고 괴로울 때는 오직 소주뿐이다.

(pg 166)

소주는 일단 싸다. 그리고 쓰다. 싸고 쓰다는 건 가성비가 좋다는 얘기다.

사람마다 주량 따라 다르겠지만, 두 병 3천 원이면 원만하게 슬픔과 합의가 된다.

한 병쯤 더 마시면 블랙아웃, 부활이 예정된 유사 죽음을 경험할 수도 있다. - 중략 -

소주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계속 썼고, 쓰고, 쓸 것이다. 나도 소주처럼 쓰고 싶다.

(pg 167-168)

사실 배달기사라는 직업이 인식이 좋은 직업도 아니고 신체적으로 위험하기도 한데다 경제적인 보상 외에는 그리 얻을 것이 많아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작가는 자신의 재능을 살려 이렇게 멋진 책을 세상에 선보였다.

짐작건데 작가의 시집들보다는 판매량이 제법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200페이지 정도로 얇아서 금새 다 읽는데 다 읽고서 더 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을 배달시켜 먹은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사람을 제외한다면 누구나 읽어도 공감할 만한 내용인데다 작가의 문장 자체가 정말 좋다.

좋았던 구절 중 서평 속에 담지 못한 구절들을 인용한다.

아래의 문장들이 마음에 든다면 한 번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스쿠터가 닿는 길들은 다 옛날로 이어져 있고, 거기엔 아직 내가 너무 많다.

담벼락에 기대 서 있고, 양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슈퍼에서 나오고, 술 취한 채 비틀거리고, 나를 향해 미소 지으며 오다가, 더 오지 못한다.

시간이 멈춘 풍경에는 그 풍경에 갇혀 버린 사람이 보인다.

투명한 유리막 속에서 순간이 영원인 줄 아는,

한때 나였으나 이젠 내가 아닌 수많은 내가 길 위에 있다.

(pg 145)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좀 더 욕심내도 되는 세상,

'건강'과 '행복'도 좋지만 더 크고 많은 것들을 원해도 되는 세상,

다는 아니더라도 몇 가지쯤은 반드시 이뤄져서

노력마다, 눈물마다 순수익이 늘어나는 세상이 될 수는 없을까.

불법 상속과 증여, 투기, 탈세, 사기 등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거져먹는 자들,

남의 것 뺏어먹는 자들만 없어져도 우리 삶의 수익이 증대할 텐데,

그러면 건강과 행복은 이자처럼 따라붙을 텐데 말이다.

(pg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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