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장꾼의 아들 1
샘 포이어바흐 지음, 이희승 옮김 / 글루온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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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온 판타지 소설이라니 뭔가 생소하면서도 흥미가 끌려 접하게 되었다.

책을 받아드니 500페이지가 조금 안되는 두께라 살짝 묵직함이 느껴진다.

표지 역시 판타지물에 등장하는 고서적처럼 디자인되어 있어서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잘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줄거리에 앞서 꽤 재미가 있었다는 점을 먼저 언급하고 싶다.

두께가 좀 있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받은 후 이틀이 채 걸리지 않아 다 읽었을 정도로 판타지 소설이 갖는 본연의 기능인 '재미'라는 측면에서 매우 탁월했다.

판타지 소설을 자주 읽는 편은 아니기 때문에 이 책만의 특징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일단 작가의 문장이 참 좋다.

단순히 장르 소설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작가의 문장력이 꽤나 좋게 느껴졌다.

번역가의 번역 역시 깔끔해서 책만 읽으면 원작이 외국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소재 자체가 아주 참신한가 하면 그런 건 아니다.

기사와 마녀, 마법, 악령이 등장하고 주인공이 고난을 겪으며 성장하는 스토리라는 점에서는 여타의 판타지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재가 갖는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전개 자체가 엄청 흥미진진한데 여기에는 작가의 탁월한 문장력이 큰 몫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부터는 스포일러를 최대한 주의하며 작성했으나 본의 아니게 줄거리가 노출될 수 있으니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무 정보 없이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소설의 배경은 여타 게임이나 판타지 소설의 무대와 비슷하게 왕과 기사, 영주 등의 지배계층이 존재하고 신부를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이 위세를 떨치는 시기이다.

소설의 제목에 등장하는 매장꾼은 '시신의 매장'이라는 사회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기능을 수행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최하층민으로 등장한다.

제목 그대로 매장꾼의 아들로 태어난 주인공 파린 역시 이름보다는 '매장꾼의 아들'로 불리기 일쑤였다.

파린은 최하층민의 자녀가 겪는 일반적인 어려움들(가난, 아동노동, 폭력,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등)을 겪으며 불행하게 자랐지만 아버지의 일을 도와가며 나름의 직업의식을 가지고 성실히 살아가던 청년이었다.

작가는 파린이 가난하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바지까지 빨아서 불 가에 말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자꾸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에게 바지라고는 딱 한 벌뿐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도 소유했다 할 만한 것이 과연 있었나,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떠오르는 것은 단 하나, 이름 뿐이었다.

신에겐 없지만 파린에겐 있는 것, 이름. "파린!"

(pg 13)

파린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한 노파의 시신을 수습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 물건을 손에 넣게 되고, 그 물건을 노리는 자들에게 쫓기게 된다.

그 과정에서 파린은 시체를 닦던 경험이 쌓여 자신에게 마치 현대의 법의학자처럼 죽은 자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논리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정황상 나중에 파린이 '뼈를 보는 자'로 불리게 될 것 같은데, 지금 법의학자가 하는 일과 비슷할 것이라 예상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생이 갖는 한계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는 파린에게 삶은 무의미할 뿐이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미래.

그의 삶은 목표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나아가는 배 같았다.

아니 인생이란 배 안에 자신이 타고 있기나 한 건지.

어쩌면 그의 옆을 이미 지나쳐 간 것은 아닐지.

해야 할 일들과 지루함 사이에서, 두려움과 희망 사이에서,

아침과 저녁 사이에서 그의 인생은 집 앞에 흐르는 개울처럼 덧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개울은 언젠간 바다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pg 259)

그러던 중 파린의 시체를 보는 능력을 범상치 않게 여긴 한 기사가 파린을 자신의 조수 역할인 스콰이어로 키우고자 자신의 성으로 데려간다.

한낱 매장꾼의 아들일 뿐인 자신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과 자신을 믿어준 기사의 기대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마구 충돌하며 1권은 끝이 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능력을 알게 된 후로 늘 내가 기적을 일으켜 주길 바랐지.

하지만 넌 머리와 손과 발과...그러니까 온몸으로 저항하잖아.

"난 그런 걸 원치 않아. 난 나이고 싶다고."

(pg 473)

1권에서는 책의 또 다른 주인공인 아로스라는 소녀도 등장한다.

아로스 역시 어릴 적 고아원에 버려져 비참한 생활을 전전하던 중 파린처럼 어떤 '물건'을 갖게 된다.

1권까지는 아직 파린과 만나지 않았지만 이후에 이 둘이 어떤 사연으로 어떻게 만나게 될지 기대가 된다.

총 4권으로 이루어진 작품이어서 모두 읽고 서평을 남기고 싶었지만, 권당 500페이지 정도로 호흡이 긴 편이라 까먹기 전에 읽은 감상을 써두고 싶었다.

이후 모두 읽게 되면 전반적인 감상을 다시 작성해보려 한다.

책이 두꺼운 편이긴 하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계속해서 흥미를 잃지 않도록 유도하는 작가의 문장력이 좋고, 사건의 전개도 꽤 빠른 편이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계속해서 파린의 시각에서만 서술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전혀 별개의 일처럼 보이는 사건들이 나중에 큰 줄기에서 어떻게 만나게 되는지도 작품이 갖는 큰 매력이라 할 수 있다.

1권만 하더라도 파린과 파린을 거두어 준 기사, 그리고 파린이 습득한 물건과의 관계가 흥미를 이끌어가는(나름의 반전도 있고) 핵심 내용이지만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상술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전통적인 판타지의 영역인 마법이나 악령 같은 것도 등장하기는 하지만 파린의 능력이 현대의 법의학자처럼 시체를 관찰해 죽음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이라는 점이 참신했다.

파린은 1권에서만 무려 두 건의 시체를 보고 죽음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맞춰낸다.

막대기에서 불이 나가는 같은 것에 비하면 굉장히 현실적인 능력이라 할 수 있는데 앞으로 이 능력이 판타지 이야기 속에서 어떻게 활용될지 기대가 된다.

전체적으로 흡족하게 읽은 작품인지라 남은 세 권도 빨리 읽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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