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에 자신의 클론과 바람을 피운 남편을 가진 한 여성의 이야기라는 정신 나간 줄거리를 보고
너무 궁금해져서 읽게 된 책이다.
처음 접하는 작가인데 작가 경력 대비 수상 경력이 화려해서 더 기대가 컸다.
책을 읽기 전에 든 의문은 보통 외도라고 하면 배우자와는 조금 다른 상대를 추구할 것이라 생각되는데
'굳이' 현재의 배우자랑 똑같이 생긴 클론이랑 바람을 피울 이유가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이 의문을 해소하기에 앞서 이 소설의 주인공인 에블린을 소개할 필요가 있겠다.
에블린은 여성 생물학자로서 복제인간에 관한 탁월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큰 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평소 연구밖에 모르는 워크홀릭으로 살아온 에블린은 같은 분야의 교수인 네이선과 결혼했지만 그와
아이를 가지는 문제로 크게 대립한다.
남편이 포기한 줄 알고 지내던 어느 날, 에블린은 남편이 자신의 연구 결과를 훔쳐 자신의 클론을
만들었고 심지어는 그 클론이 남편의 아이를 갖게 됐음을 알게 된다.
그 클론의 이름은 마르틴이었고, 에블린은 마르틴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게 된다.
소설 속 복제인간은 근 20년 전 영화인 '아일랜드' 속 복제인간과 유사하다.
장기를 대체한다거나 암살이 우려되는 정치인을 대신해 총알을 맞아주는 정도의 역할을 수행하고 폐기될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따라서 에블린은 철저하게 생식 기능이 제한된 클론만을 만들도록 연구했다.
하지만 네이선은 그 연구를 이용해 자신의 2세를 만들 수 있는 클론을 만들었고 에블린은 분노한다.
이쯤에서 작품의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고자 한다.
엄밀히 말하면 작가가 제시한 복제인간 제작 방식은 다소 의아하다.
논리적으로 말이 좀 안된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 속에서는 복제인간이 원본 인간과 동일하게 보일 수 있도록 '조건화'라는 과정을 거친다.
예를 들면, 지금 나의 클론을 만든다고 하면 30대부터 생기기 시작한 쥐젖이 목에 있어야 한다.
내 목에 쥐젖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목이 매끈한 내 클론을 보면 이상하게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클론이 지금의 나처럼 보이기 위해서는 30대 이후에 생긴 쥐젖을 일부러 만들어줘야 하는데
이 과정이 '조건화'이다.
하지만 이 조건화라는 방식 자체가 장기를 대체하기 위해 제작하는 클론들에게는 불필요한 과정이다.
장기만 떼어내고 폐기하면 되는데 굳이 원본과 비슷하게 생길 필요까진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암살이 우려되는 정치인을 대신해 총알을 맞아주는 클론이라면 원본과 똑같이 보여야 할테니
이 과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만약 클론 암살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 정치인의 정치 생명은 클론이
목적을 달성하는 그 즉시 끝나기 때문에 수요가 있을리 만무하다.
클론이든 원본이든 이미 사람들 인식에는 총맞아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 정치인이 정치활동을 지속할
수 있을리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죽은 자가 클론이라는 것이 밝혀진다고 해도 자기 대신 클론을 죽였다는 도덕적 비난에서 자유롭기 힘들 것이다.)
이 외에도 클론의 생활 습관을 코딩할 수 있다거나 원본의 기억을 선별적으로 정리해 입력할 수 있다는
것 등 논리적으로 생각하거나 과학적으로 따져보면 조금 말이 안 된다 싶은 부분들이 분명 있다.
게다가 주민등록번호를 기반으로 한 출생신고가 없으면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아예 불가능한 우리나라의
실정에서 보면 애초에 말이 안되는 전개를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이는 문화적 차이이므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부분이긴 하다.)
하지만 그런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재미'라는 측면에서는 흠잡기 어려웠다.
400페이지 정도로 적당한 길이에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사건이 벌어지기 때문에 중간에 맥 끊기는
느낌 없이 쭉 몰입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다양한 생각 거리를 독자들에게 던져준다.
어릴 적 아버지의 억압적인 모습을 보며 자라온 에블린이 연구밖에 모르면서 타인들과 가까운 관계를
만들어가지 못하는 모습이 1인칭 시점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그녀는 남편인 네이선과도 조금 더 가까운 연구자 동료 이상의 관계로 나아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