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소장품 - 슈테판 츠바이크의 대표 소설집 츠바이크 선집 (이화북스) 2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상원 옮김 / 이화북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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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슈테판 츠바이크'라는 이름은 '광기와 우연의 역사'라는 책을 통해 처음 접했었다.

평소 독서 영역이 그리 넓은 편은 아니지만 역사는 그 중에서도 가장 기피하는 분야 중 하나였는데

그 책은 역사책이면서도 마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생생하고 현실감있게 다가왔던 기억이 난다.

내가 그렇게 느꼈던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저자가 본래 뛰어난 문학가였기 때문일텐데,

이번 기회에 슈테판 츠바이크 문학의 진수를 접할 수 있었다.

책의 제목인 '보이지 않는 소장품'을 비롯한 그의 중단편 6편이 실려있다.

해설을 제외하면 350페이지 정도로 그리 두껍지 않은 분량에 총 여섯 편의 소설을 즐길 수 있었다.

각각의 작품들이 모두 '재미'라는 측면에서는 더할 나위가 없을 정도로 알차게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단편들의 모음이지만 아무 고민 없이 무작위로 작품을 선정해 묶은 것 같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주제에 따라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찔한 비밀'과 '불안'은 불륜에 빠진 여인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를,

'모르는 여인의 편지'와 '어느 여인의 24시간'은 절절한 짝사랑을 다루고 있다.

'세 번째 비둘기의 전설'과 '보이지 않는 소장품'은 작가가 살았던 당시의 시대상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형식적으로 비슷한 점도 있다.

예를 들면 '모르는 여인의 편지'와 '보이지 않는 소장품', '어느 여인의 24시간'은 내용의 대부분이 한 인물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고 '아찔한 비밀'과 '불안'은 불륜이라는 소재를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다루고 있는데,

전자는 주로 불륜 당사자의 아들의 시각에서, 후자는 주로 불륜 당사자의 시각에서 겪게 되는 심리적 변화를

다루고 있다는 점 등이다.

짧은 길이의 소설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거리의 흡입력이나 등장인물들의 심경 묘사에 있어서는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감탄이 절로 나오는 문장들이 담겨 있어서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번역 역시 너무도 깔끔한데, 이전에 읽은 '광기와 우연의 역사'의 번역가가 이번 작품도 번역해서 그런지

읽는 동안 이 책이 원서를 번역한 것이라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았다.

아래부터는 각 작품들을 읽으면서 잊고 싶지 않았던 문구들을 옮겨두었다.

아래 두 구절은 어머니가 불륜을 저지르려는 것을 목격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불륜'이라는 것은 모르는 아이가

자신이 성장했음을 깨닫는 구절이다.

어떻게 바람피는 엄마를 보고 아래와 같은 것들을 깨닫게 되는지는 작품을 통해 확인하기 바란다.

에드거는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유복한 환경이 당연한 것이 아니며,

자신의 삶 양옆으로는 한번도 경험한 적 없는 아득한 낭떠러지가

시커먼 입을 쩍 벌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직업과 타고난 팔자 같은 것이 있음을, 자신의 삶 주변에 수많은 비밀이

손을 뻗치면 잡힐 만큼 가까이 있었지만 이제껏 눈여겨보지 않았음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pg 94, 아찔한 비밀)

아이는 이내 잠이 들었다.

삶이라는 깊디깊은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pg 107, 아찔한 비밀)

아래 문구는 작품 속에서 큰 역할을 하는 구절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짝사랑이라는 단어를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비유가 있을까 싶어 기억에 남았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 또한 아래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난 항상 당신 주위에 머물며 긴장 속에서 요동치고 있었지만, 당신은 전혀 느끼지 못했지요.

당신이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시계태엽의 긴장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똑같아요.

시계 태엽은 어둠 속에서 쉬지 않고 당신의 시간을 세고 나누며,

들리지 않는 심장 박동 소리를 내며 당신을 따라다니지만,

당신은 초침이 수백만 번 똑딱거리는 동안 무심히 딱 한 번 힐끗 시선을 던질 뿐이잖아요.

(pg 192), 모르는 여인의 편지

아래 구절은 책의 제목이기도 한 '보이지 않는 소장품'의 대미를 장식하는 문구다.

개인적으로는 '수집'이라는 것에 잠시 미쳐 있었던 과거가 떠올라 가슴에 깊이 남았다.

저 위 창가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환한 얼굴은 착한 망상이라는

흰 구름에 싸여 살포시 우리의 역겨운 현실 세계 위로 솟아 있었습니다.

그 얼굴이 쫓기듯 거리를 바삐 오가는 퉁명스러운 사람들 위에

둥둥 떠있던 광경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오래된 속담이 절로 떠오르더군요.

괴테가 한 말일 겁니다. "소장가는 행복한 사람들이다."

(pg 259, 보이지 않는 소장품)

다음 구절들은 작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삶에 대한 미련을

작품 속에 남겨둔 것이 아닐까 싶어 기억에 남았던 문장들이다.

얼마 전까지 자살로 삶을 끝낸 작가들을 본능적으로 싫어한다는 서평을 남긴 나이지만,

이런 문장들을 보면 이 책의 저자는 정상 참작(?)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혼과 정신과 감정과 고통! 우리는 언제나 오만하게 이런 것들에 대해 언급하곤 하지만,

저는 이들이 지극히 약하고 보잘것없고 형체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새삼 경악하곤 합니다.

정신적 고통이 최대 용량에 달했을 때조차도 괴로워하는 몸을,

만신창이가 된 몸을 완전히 파괴할 수는 없으니까요.

사람은 그런 순간에도 벼락 맞은 나무처럼 쓰러져 죽지 않고,

계속 숨을 쉬며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pg 343), 어느 여인의 24시간

그러나 제가 방금 말했듯이, 고통은 비겁합니다.

고통은 살고자 하는 막강한 요구 앞에서는 움찔 물러섭니다.

살고자 하는 요구는 우리의 정신 안에 있는 죽음을 향한 열망보더 더 강하게,

우리의 육신 속에 뿌리내리고 있나 봅니다.

(pg 344), 어느 여인의 24시간

특히 아래의 문장은 잊혀지지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아래의 구절을 읽는 순간 눈물이 맺혔다.

사람은 아무리 힘들어도 결국에는 살아낼 힘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결국, 시간은 심오한 힘을 지니고,

나이는 온갖 감정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희한한 위력을 행사합니다.

(pg 346, 어느 여인의 24시간)

슈테판 츠바이크.

옛날 작가이기도 하고 작품 속 세계도 너무나 오래된 세계이지만 그의 작품 속에 들어가면

늘 그 시대의 인물이 되는 느낌이 든다.

심지어 나는 여성으로 단 한 순간도 살아본 적이 없지만 그의 작품 속 여성들에게는 감정 이입이 너무 잘 된다.

이는 그의 탁월한 문장력이 높은 수준의 심리학 이론을 만나 탄생한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이쯤이면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이 책은 출판사가 무료로 나에게 책을 증정함으로써 작성된 서평이다.

하지만 슈테판 츠바이크의 작품이라면 나는 얼마든지 광고판 역할을 자처할 용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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