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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상깊은 구절
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그 웃음의 끝에 그녀는 생각한다.
어떤 일이 지나간 뒤에라도, 그토록 끔찍한 일들을 겪은 뒤에도 사람은 먹고 마시고, 용변을 보고, 몸을 씻고 살아간다.
때로는 소리내어 웃기까지 한다.
아마 그도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 잊혀졌던 연민이 마치 졸음처럼 쓸쓸히 불러일으켜지기도 한다. (pg 204)
작가의 책은 '소년이 온다' 이후로 두 번째 접하게 되었다.
전에 접한 작품 역시 읽을 때는 몰입해서 읽은 것 같은데 서평을 남기지는 않았었다.
뭔가...정리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였다.
읽을 때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는데 막상 책을 덮은 후 이 책을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지 감이 잘 안잡힌다.
그 어떤 현학적인 비문학, 이론서보다도 나는 이런 문학 작품의 감상을 남기는 일이 더욱 어렵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평을 쓰지 않은 책은 금방 머리에서 휘발되기 때문에 읽은 감각이 아직 남아있을 때 한자라도 남겨보려 한다.
작가가 시간 차를 두고 쓴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이라는 세 편의 연작소설이라 하는데,
읽는 입장에서는 어차피 한 권으로 묶여져 있으므로 한 작품 속 세 챕터라고 이해해도 무방할 것 같다.
줄거리는 단순하다면 단순하다.
가부장적인 아버지로부터의 가정 폭력, 남편으로부터의 정서적, 육체적 폭력에 시달리던 영혜는 어느 날 갑자기 꾼 꿈 하나에
극단적인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 여인의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관찰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여인의 남편 시점으로 전개되는 '채식주의자'에서는 영혜가 채식을 시작하면서 겪는 갈등과 주변 사람들의 당혹감이 그려진다.
(사실 '채식을 시작했다'라는 표현 보다는 '육식을 단호하게 거부했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더 적합해 보인다.)
영혜가 채식의 이유를 상세히 설명하지 않기도 하지만, 주변 사람들 역시 영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모습이 보인다.
그것이 가부장적인 모습의 폭력이든, 모성애라는 모습의 애정이든 영혜를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고 싶은 바람만이 보여질 뿐이다.
이어지는 '몽고반점'에서는 영혜의 몸에 작은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는 말에 기묘한 예술적 영감과 성욕을 느낀 형부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형부는 미디어 아트 예술가로 소개되는데, 육식을 거부하던 영혜는 형부에게 떠오른 영감이 곧 인간을 식물로 표현하는 것이어서
영혜 자신도 형부 작품의 일부가 되기를 기꺼이 자청한다.
"그런데 이거, 물로 씻으면 지워져요?"
마치 그것만이 궁금하다는 듯 그녀는 물었다. 한손으로 자신의 가슴께를 가리킨 채였다.
"쉽게 지워지진 않을 거야. 몇차례 씻어내야 완전히..."
그의 말을 자르며 그녀가 말했다.
"안지워지면 좋겠어요." 그는 잠시 망연해져, 어둠에 반쯤 덮인 그녀의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pg 108-109)
'몽고반점'에서 결국 마지막 선을 넘은 영혜와 형부를 목격한 영혜 언니의 시점으로 '나무 불꽃'이 진행되며 이야기는 결말로 치닫는다.
자신의 남편이 정신병을 앓고 있는 동생을 꼬드겨 포르노를 찍었다는 사실에 절망한 언니는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 그나마
가장 정상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모든 일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 것만 같다는 근거 없는 죄의식에 시달린다.
그 저녁, 영혜의 말대로 그들이 영영 집을 떠났다면 모든 것은 달라졌을까.
그날의 가족모임에서, 아버지가 영혜의 뺨을 치기 전에 그녀가 더 세게 팔을 붙잡았다면 모든 것은 달라졌을까.
영혜가 처음 제부를 인사시키려 데려왔을 때, 어쩐지 인상이 차가워 보여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육감대로 그 결혼을 그녀가 만류했다면 모든 것은 달라졌을까.
그렇게 그녀는 영혜의 운명에 작용했을 변수들을 불러내는 일에 골몰할 때가 있었다.
동생의 삶에 놓인 바둑돌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헤아리는 일은 부질없었을뿐더러 가능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생각을 멈출 수는 없었다. (pg 192)
육식을 거부하다 결국엔 자신이 식물이 되겠다며 물 이외 그 어떤 음식도 거부하는 영혜를 보며 언니는 자신의 삶을 반추한다.
그녀 역시 가부장적인 부모에게 자라고 가정에 무관심한 남편과 살면서 진짜 자신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타인이 원하는 자신의 모습으로만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아예 정신을 놓아버린 동생과 가까스로 타인의 시선에 맞춰가는 자신 중 누가 더 불행한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그 웃음의 끝에 그녀는 생각한다.
어떤 일이 지나간 뒤에라도, 그토록 끔찍한 일들을 겪은 뒤에도 사람은 먹고 마시고, 용변을 보고, 몸을 씻고 살아간다.
때로는 소리내어 웃기까지 한다.
아마 그도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 잊혀졌던 연민이 마치 졸음처럼 쓸쓸히 불러일으켜지기도 한다. (pg 204)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니는 결국 영혜를 가장 많이 이해한 존재로 그려진다.
결말쯤 가서는 동생의 생명을 살리고 싶지만, 폭력에 대한 극한의 저항으로 자신이 가진 동물성을 버리고 식물이 되고자 하는
동생을 일면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하간 정신나간 등장인물들에 정신나간 스토리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뛰어난 문장력 덕분인지 끝날 때까지 책을 내려놓을 수 없는
매력이 있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다만 어렵다는 점 역시 부정하기 어려웠다.
무엇이 어려운가?
문장이 이해가 안된다거나 스토리가 어렵다는 건 전혀 아니다.
그저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뭘 말하고 싶었을까?' 이것을 파악하기가 다소 어려웠다.
가부장적인 남성의 폭력과 그로 인한 폐해를 알리고 싶었을까?
육식에 수반되는 폭력성을 인지해야 한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까?
한 사람의 정신적인 변화를 가장 가까워야 할 가족들마저 외면하는 현시대의 가족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어느 것이든 너무 가볍고 단편적인 이해가 아닌가 하는 걱정에 서평을 남기기가 다소 꺼려졌다.
하지만 가벼운 이해든 무거운 이해든 내가 이해한 바가 중요하니 일단 남겨두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