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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심리 ㅣ 현대지성 클래식 39
귀스타브 르 봉 지음, 강주헌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10월
평점 :
인상깊은 구절
따라서 시간이 우리의 진정한 지배자다.
모든 것이 변하는 걸 보려면 시간이 흐르도록 내버려두기만 하면 된다. (pg 105)
요즘도 심심치 않게 목격되는 현상이지만 똑똑한 사람들도 무리를 이루면 이상한 결정들을 내릴 때가 많다.
최근에도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 집단인 의사협회와 정부 사이에 있었던 의사 정원 확대 논란 당시 의대생들이 시험을 거부하는 등
일반적인 국민의 눈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들을 목격한 바 있다.
여하간 개인이 모여 형성된 것이 집단일텐데 왜 개인은 하지 않을 결정을 집단이 하게 되는지 늘 궁금했었는데
이 책이 군중에 관한 연구의 초석이 되는 책이라 하여 접하게 되었다.
책 내용을 정리하려면 역시 '군중'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저자는 개인의 집합이면서도 아래와 같은 특징을 갖는 집합들을 분석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심리학적으로 '군중'이란 단어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특정 상황에서 형성되는 개인의 무리는 그 무리를 구성하는 개개인과 무척 다른 특성을 드러낸다.
의식을 지닌 개성을 사라지고 개인의 감정과 생각이 집단화되어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한다.
그리고 일시적이지만 매우 두렷한 특징을 보이는 집단정신이 형성된다. (pg 32)
이런 군중들이 어떤 특징들을 갖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이런 군중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읽으면서 가장 특이했던(?) 점은 저자가 군중이 매우 열등한 사고를 하는 집단으로 못박아두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군중을 형성하는 순간 감성의 지배를 받으며 논리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존재가 된다고 단언한다.
때문에 그 어떤 지적 수준을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군중이 되는 순간 야만인과 다를 바 없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이 책이 120년 전에 쓰여진 책이라는 점을 먼저 밝혀야겠다.
책 중간중간 나오는 민족우월주의, 남성우월주의적 색채가 독서하는 내내 신경을 건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군중의 고유한 특성 중에는 충동성과 과민성, 이론적 추런 능력의 부족, 판단력과 비판 정신의 부재, 과장된 감정 등이 있고,
그 밖에도 여성이나 야만인, 어린아이처럼 진화가 덜 된 열등한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여러 특성이 있다. (pg 44)
위 문장을 읽고 나면 대체로 '응? 내가 지금 뭘 읽고 있는거지?'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나도 그랬다.
썩 기분 좋은 문장들은 아니지만 지난 120년 동안 일반 대중의 인식이 이 정도로 발전했다는 증거로 삼으면 될 것이다.
그 밖에도 특정 민족에 대한 편견들도 많이 등장하는 편이고, 저자가 자신은 '순전히 과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했다고 썼지만
지금의 독자들이 보기에는 그저 과거 사실에서 귀납적으로 추리된 결론이 전부여서 아주 과학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단점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20년이 지난 지금 사회에 적용해도 뭔가 맞는 것 같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많은 건 사실이다.
때문에 시간이 오래 지났어도 여러 사람들에게 읽히는 모양이다.
인상깊은 구절들과 함께 책의 내용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먼저 군중들은 이성보다는 감정에 지배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군중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감정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이 연상되는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군중의 상상력에 충격을 주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이 일어나고 제시되는 방법이다.
'응축'이란 표현이 적합할지 모르지만, 사건들이 응축되며 군중의 정신을 채우고 떠나지 않는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어내야 한다.
군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을 줄 안다면 군중을 지배하는 법을 터득한 것과 진배없다. (pg 85)
또한 군중의 의견과 신념을 결정하는 요인에는 민족과 전통, 시간, 정치제도, 사회제도, 교육 등의 요인이 있다고 말한다.
이 중 가장 큰 요인이 바로 민족과 전통이다.
죽은 자들의 세월이 겹겹이 쌓여 지금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민족과 전통은 쉽게 바뀌거나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군중이 어떤 특성을 갖는지는 민족과 전통의 틀 안에서 결정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일례로 프랑스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촛불 집회를 본다면 '쟤넨 저렇게 해서 의사결정이 바뀔 거라 생각하나' 싶을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프랑스 사람들의 집회를 본다면 그저 성난 폭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지 모른다.
이런 면에서 분명 민족과 전통이 사람들의 의식에 미치는 영향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밖에 요인들에 대해서도 하나하나 소개하고 있지만 아래의 구절들로 정리하고자 한다.
시간이 오래 지났지만 읽어보면 지금도 통용될 수 있는 구절들이다.
특히나 교육방식에 대한 그의 비판은 지금 한국사회에 적용해도 크게 틀리지 않은 지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확히 말해, 라틴식이라고 불러도 되는 이런 교육제도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심리학 지식, 즉 교과서를 암기하면 지능을 높일 수 있다는
주장에 기반을 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중략-
이런 교육이 그저 쓸모없기만 하다면, -중략- 불쌍한 아이들을 동정하는 데서 그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교육은 무척 위험하기도 하다.
그런 교육을 받은 학생은 자신이 태어난 환경을 극도로 혐오하며 거기서 벗어나려는 강렬한 욕망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계속해서 노동자로 남기를 원하지 않고, 농부도 더는 농사를 지으려 하지 않는다.
중위계층에서도 최하층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 아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오직 국가에서 월급을 받는 공무원밖에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pg 112-113)
아래의 구절에서는 단어가 군중에게 미치는 영향을 말해주고 있는데 이는 지금도 정치인들이 툭하면 활용하는 전략 중 하나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당명을 바꾸는 것도 큰 범주로 보면 아래의 내용에 해당될 것이다.
따라서 정치인이 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역할 중 하나는 군중이 싫어하는 옛 명칭을 대중적이거나 적어도 중립적인 단어로
바꾸는 것이다.
단어의 힘은 실로 대단해서 지극히 혐오스러운 대상도 신중히 선택한 새 명칭을 붙이면 군중이 받아들일 만한 게 된다. (pg 128)
책의 중반부 이후 부터는 군중의 지도자와 그들이 활용하는 수단에 대한 분석이 나온다.
군중은 필연적으로 지도자를 필요로 하는데, 저자는 군중의 지도자에 대해 아래와 같은 시각을 갖고 있다.
군중의 지도자는 대부분 사상가가 아니라 행동가다.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없고, 앞으로 갖출 가능성도 무척 낮다.
혜안은 대부분 의심과 신중함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중략-
그들이 옹호하는 사상이나 추구하는 목적이 아무리 불합리하더라도 그들의 확신 앞에서는 이성적 추론이 힘을 잃는다. -중략-
군중으로 모인 개인은 의지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자신이 잃어버린 의지력을 여전히 갖고 있는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의지한다. (pg 141)
복음서에 믿음에 산을 옮길 만한 힘이 있다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람에게 믿음을 부여하면 그의 힘이 열 배는 더 커진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사건은 자신에 대한 강력한 믿음 말고는 내세울 것 없는 무명의 신념가에 의해 일어났다.
세계를 지배한 거대 종교를 세우고 지구 반대편까지 광대한 제국을 건설한 사람은
학자나 철학자가 아니었고 회의론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pg 142)
지금까지 정리한 바로 보면 저자는 군중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책이 등장한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도 있을텐데, 프랑스 혁명과 파리 코뮌이라는 굵직한 사건들을 겪으면서
저자는 군중이 가진 무시무시한 파괴의 힘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군중의 시대가 올 것이라 저자는 단언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군중이 가진 힘에 경외심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군중의 종류와 예시를 들어주고 있는데 이 중 배심원 제도와 보통선거 관련 내용들이 특히 흥미로웠다.
배심원 제도에 대한 저자의 입장이 매우 재밌는데, 판검사들은 배타적인 폐쇄집단이므로 일반적인 군중에 비해
더 위험하고 해로운 결정을 내리기 쉽다는 의견이었다.
물론 군중의 힘도 두려워해야 하지만 배타적인 폐쇄집단의 힘은 더더욱 두려워 해야 한다.
군중은 설득할 수 있어도 폐쇄집단은 절대 뜻을 굽히지 않기 때문이다. (pg 207)
보통선거에 대한 의견도 그렇다.
저자가 계속해서 군중은 저열한 판단을 하기 쉽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엘리트 위주의 선거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할 것 같지만,
저자는 어차피 엘리트들도 모이면 군중이 되기 때문에 저열한 판단을 하는건 마찬가지일거라 말한다.
그렇다면 능력에 따라 선거권을 제한하면 군중의 투표가 개선될 거라고 가정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럴 가능성이 절대 없다고 생각한다.
이미 앞에서 설명했듯이 집단은 어떤 식으로 구성되든 모두 다 정신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이다.
군중 속의 개인들은 언제나 서로 비슷해질 것이며, 일반적인 문제에 대해 투표할 경우
40명의 학자나 40명의 물장수나 투표 결과는 동일하게 나을 것이다. (pg 221)
따라서 학자들로만 선거인단을 구성하더라도 투표 결과가 지금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도 각자의 감정과 당파심에 따라 투표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현재 겪는 어려움이 여전히 계속될 것이고, 오히려 폐쇄집단의 답답한 전횡을 덤으로 겪게 될 것이다. (pg 222)
그밖에도 현재 정치나 사회의 모습이 떠오르는 구절이 상당히 많았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아래의 구절이 최근에 끝난 더불어민주당 경선 결과를 잘 설명해주지 않나 생각했다.
지도자가 이성적 추론으로 영향을 미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위신을 앞세워 영향력을 행사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지도자가 위신을 잃으면 영향력도 상실한다는 사실이 이 점을 가장 잘 설명해준다. (pg 228)
유권자로서 군중은 특정 개인이 가진 위신을 크게 생각한다.
따라서 무슨 출신, 무슨 역할을 했는지가 중요한데 이 위신에 타격을 받을 경우 어지간해서는 군중의 선택을 받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사면 이야기, 국회의원 사퇴 등 위신에 타격을 받은 한 후보가 무슨 짓을 해도 결과를 뒤집을 수는 없었던
최근의 사례가 오버랩되는 구절이었다.
뒤에 해제를 제외하면 250페이지가 조금 안되서 분량에서는 부담이 없었지만 저자가 예시로 드는 사례들이 대체로 유럽의 근현대사
특히 프랑스 근현대사의 인용이 많기 때문에 나처럼 관련 지식이 없다면 예시 이해가 조금 어려울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이 어려운 문체로 쓰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핵심 내용 이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위에서도 서술했듯이 지금의 일반적인 사회적 인식과는 상당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 사회상이기 때문에 보면서 불편함을 느끼는
부분이 꽤나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읽으면서 어떤 부분이 지금은 개선되었고 어떤 부분이 지금도 유효한지 찾아보면서 읽는다면 좋은 독서가 될 것이고,
그 불편함에 지쳐 책을 놓는다면 좋은 인상으로 남기 어려운 책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