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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화학 - 엉뚱하지만 쓸모 많은 생활 밀착형 화학의 세계
조지 자이던 지음, 김민경 옮김 / 시공사 / 2021년 4월
평점 :
인상깊은 구절
뉴스에서 나오는 의심이 제대로 된 생각이고 뉴스가 모든 과학 논문을 완전하고 충실하게 보도할 것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과학 저널에 실린 논문 하나가 반드시 근본적인 진실의 증거는 아니다.
증거가 축적되는 데는 수년이 걸리며 합의가 되려면 더 오래 걸린다.
한 마디로, 벽돌은 다리가 아니다. (pg 316)
최근에 갑자기 과학 관련 책들이 땡겨서 막 읽게 되었었는데 그 중 화학은 없었던 것 같아 읽게 된 책이다.
화학이야말로 내가 이과 진학을 포기하게 만든 근본적인 이유라 할 수 있기에 만남이 약간 두렵기도 했지만,
익살스럽게 보이는 표지와 친근한 제목이 왠지 문돌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법한 책이라는 기대를 갖게 했다.
특이하게도 이 책의 저자는 처음부터 단 하나의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바로 '가공식품을 많이 먹으면 진짜 빨리 죽는가?'에 대한 답이다.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가공'이란 무엇인지, '식품'이란 무엇인지를 화학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사실상 '가공식품'이라는 것이 누구나 납득할만하게 정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며
화학적으로 보면 가공식품을 먹으나 일반적으로 조리된 음식을 먹으나 영양상으로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스팸에 공장 김치를 올려 밥 한 그릇 먹으나 집에서 엄마가 담근 김치로 끓인 돼지고기 김치찌개에 밥 한 그릇을 먹으나
사실 영양상으론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저자가 직접 든 예시는 아니고 내가 이해한 바 대로 표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학물질'의 종류가 많을 수 있기 때문에 가공식품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상 '화학물질'은 자연상태의 모든 식물과 동물, 각종 음식 재료에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을 조합한 것 만으로는
위험사유가 될 수 없다는 설명이다.
물론 어떤 화학 물질이 다른 화학 물질을 만나 위험한 물질이 될 가능성은 늘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음식 뿐 아니라 우리가 접하는 모든 화학 물질들(책에서는 썬크림을 예로 든다.)이 다른 화학물질을 만나면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가져올 가능성이 있는데 이 가능성을 모두 예측하기란 불가능에 가깝고,
과학자들이 제한적으로 연구해내는 결과들도 사실상 아주 한정적인 조건하에서만 관찰할 수 있는 결과라고 말한다.
화학물질들과 인간의 몸이 연관된 거의 모든 중요한 질문들(초가공식품이 암을 일으킬까? 커피는 우리를 오래 살게 해줄까?
자외선 차단제는 피부암을 예방할까?)에 대한 답은 "그럴 수도"와 "아닐 수도"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다.
흡연처럼 연구 결과가 드물게 우리의 얼굴을 강타하는 경우도 있지만,
자외선 차단제처럼 대부분의 연구 결과들은 대단하지도 않고 확실하지도 않다. (pg 225)
그래서 결론이 뭘까?
가공식품을 먹으라는 건가, 말라는 건가?
저자는 커피를 예로 들며 아래와 같은 자료를 보여준다.

(pg 210)
결국 커피를 마시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연구 반, 나쁘다는 연구가 반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즉 음식에 관한 연구, 특히 영양역학이라는 학문 분야에서 발표되는 결과가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진리'에 근접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과학자로서 과학자들이 논문을 쓸 때 범하기 쉬운 오류 유형도 알기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
다양한 오류 유형 중 저자가 특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P-해킹이라 불리는 유형이다.
쉽게 요약하면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통계를 돌려보는 것인데,
저자는 영양역학 분야에서 이런 오류가 자주 발생할 수밖에 없어서 위의 커피 사례와 같은 상황이 일어난다고 보고 있다.
지금도 이 분야에서 저명한 두 과학자가 팽팽히 맞서고 있는데 아직도 결론이 난 상태가 아니라고 한다.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주장을 하고 있고, 각자 자신을 지지해주는 과학자들이 나뉘어 논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영양역학에서 "이 설문조사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보다 더 논쟁이 되는 부분은 없을 것이다.
윌렛과 회사들은 "관찰 연구, 동물 실험, 중간 수준의 단점이 있는 통제 실험을 포함한 모든 가능한 증거를 고려한 후에
베이컨이 둔부암을 일으킨다고 합리적으로 결론 내릴 수 있다"와 같은 공중보건 선언을 할 수 있을 만큼 설문조사를
충분히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오아니디스와 회사들은 그것들이 본질적으로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니까...그렇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양쪽의 입장차는 엄청 크다. (pg 302)
저자는 이 중 후자가 더 설득력 있다고 보고 있다.
꼭 영양역학 뿐 아니라 모든 학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논문으로 발표되었다고 해서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닌
그저 진리로 가는 다리를 만들기 위한 하나의 벽돌을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뉴스에서 나오는 의심이 제대로 된 생각이고 뉴스가 모든 과학 논문을 완전하고 충실하게 보도할 것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과학 저널에 실린 논문 하나가 반드시 근본적인 진실의 증거는 아니다.
증거가 축적되는 데는 수년이 걸리며 합의가 되려면 더 오래 걸린다.
한 마디로, 벽돌은 다리가 아니다. (pg 316)
그러니 위에 나온 커피 기사 사례처럼 이런 정보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적당히 먹고 적당히 피하라는 것이 저자가 내린 결론이다.
가공식품 자체의 유해성은 담배처럼 극단적으로 나쁘다고 아직 결론나지 않았다.
오히려 적은 비용으로 충분한 열량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니 결국 최선의 선택은 개인의 몫이라는 것이다.
책을 덮으면서 그래도 꽤 재미있었다고 생각되는 책이었다.
재미와는 사실 좀 동떨어진 화학이라는 주제로 책을 쓰려다보니 저자 나름대로는 유머와 위트를 많이 섞으려 한 것 같은데,
사례들이 미국 문화에 아주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면 쉽게 웃을 수 있는 맥락들은 아니어서 좀 아쉬웠다.
원문 자체가 번역하기 상당히 까다로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번역가가 원문을 너무 살린 것 같은 부분도 조금 아쉬웠다.
조금만 더 국어 사용자에게 친숙하게 재량을 충분히 가져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와 정보 측면에서 중심을 잘 잡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뼛속부터 문돌이이자 이과 진학을 화학 때문에 포기한 내가 이 책 내용을 이 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는 건
분명 엄청난 성과임에는 틀림없다.
게다가 일방적으로 정보를 쏟아내지 않고 계속해서 독자들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는 편집 방식도 돋보였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이 독자에게 퀴즈를 내며 과감하게 정답 내용을 다음 장으로 넘기는 것들이 인상적이었다.

불행하게도 우리들 대부분이 과학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배운 것은 노벨상 수상자들, 고전 실험들, 세상을 바꾼 이론들이다.
마치 요리를 배우는데 "제이미 올리버의 레시피를 따르시오"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
다르게 말하면 여러분은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 (pg 227)
총 350페이지 정도로 살짝 두꺼운 느낌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한 그림도 많고 위와 같은 편집도 많아서 양이 버거운 책은 아니었다.
화학이라는 좀 두려운 주제를 가지고 '가공식품'의 유해성에 대한 즐거운 고찰을 하고 싶은 독자라면 좋은 선택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