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정의 소설 문득 시리즈 4
김유정 지음 / 스피리투스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한민국에서 수능 준비를 해 본 사람이라면 잊을 수 없는 그 이름, 김유정. 

학창시절 경험한 주입식 교육으로 작가의 이름과 함께 '봄봄', '동백꽃'과 같은 대표작의 제목은 기억에 남지만 

소설의 자세한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에 남는 거라곤 감자 갖다주던 점순이 뿐)

더욱이 그가 어떤 삶을 살았고 위의 작품들 외에 어떤 작품들을 더 남겼는지까지 자세히 알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책 소개에 실린 '아내'라는 작품의 일부분을 보고 더 읽고 싶어져 접하게 되었다. 


이 책에는 제목에 있는 '떡' 외에도 '봄봄', '만무방', '동백꽃'과 같은 그의 대표작은 물론이고

'아내', '따라지', '땡볕'과 같이 나에겐 좀 생소한 작품들도 함께 실려 있다. 


수능준비를 할 때 김유정을 공부하면 '해학'이라는 단어를 자주 접하게 된다.

그에 걸맞게 위에 언급한 작품들에선 상당한 해학을 만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아내'라는 작품이 가장 읽고 싶기도 했고 기억에도 오래 남을 것 같다.

'아내'에서는 요즘 서브컬쳐에서 흔히 쓰는 말로 '츤데레'라는 것이 있는데, 이 츤데레의 전형을 보여준다. 

외모도 별로고 밥도 많이 먹는다며 타박하지만, 가난한 자신과 함께 고생하면서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아준 

아내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난다. 


다른 사람들은 밤에 만나면 "마누라 밥 먹었수?"

"아니오, 당신 오면 같이 먹을랴구-." 하고 일어나 반색을 하겠지만 우리는 안 그러기다.

누가 그렇게 괭이 소리로 달라붙느냐. 방에 떡 들어서는 길로 우선 넓적한 년의 궁뎅이를 발길로 퍽 들이질른다.

"이년아! 일어나서 밥 차려-."

"이눔이 왜 이래, 대릴 꺾어놀라."

하고 년이 고개를 겨우 돌리면 "나무 판 돈 뭐했어, 또 술 처먹었지?" 이렇게 제법 탕탕 호령하였다.

사실이지 우리는 이래야 정이 보째 쏟아지고 또한 계집을 데리고 사는 멋이 있다.

손자새끼 낯을 해가지고 마누라 어쩌구 하고 어리광으로 덤비는 건 보기만 해도 눈허리가 시질 않겠니. (pg 88-89)


이런 츤데레 성격의 인물들은 '봄봄'이나 '동백꽃' 등의 작품에서 해학의 맛을 극도로 끌어 올리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게다가 두 작품 모두 츤데레 성격을 갖는 인물의 이름이 '점순이'다.)

그런 인물들의 매력이 지금 젊은 사람들 입맛에도 잘 맞는지 다양한 2차 창작물들이 나오면서 지금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믿기지 않는다면 구글에 '츤데레 점순이'를 검색해보라. 엄청나게 많은 창작물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중에는 19금도 더러 있다.)

대략 100년 전에 나온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현대에까지 읽히고 또 재해석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김유정이 창조한 세계가 매력적이라는 반증일 것이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떡'에서도 이런 해학의 정서가 잘 드러난다. 

이 작품은 굶주림이 일상화된 가정에서 자란 어린 아이가 모처럼 맛있는 음식을 잔뜩 얻어먹고 탈이 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이 때 아이가 음식을 먹는 모습과 이를 지켜보는 타인들의 태도가 마치 재미난 서커스라도 보는 듯 유쾌한 문체로 쓰여 있다. 

하지만 실상 작가는 매우 냉소적인 표정으로 이 작품을 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읽고 나면 슬프고 섬뜩하게 다가온다. 


사실상 음식을 베푼 이들도 온전한 동정의 감정에서 나온 행동이라 보기 어렵고, 

오히려 굶주림에 지친 아이가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구경거리로 소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짜 아이를 생각해서 음식을 주었다면 적당히 먹인 후 나중에 먹으라며 남은 음식을 싸주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이해하기 쉽게 요즘으로 시대를 바꾸어 설명하면, 어린 아이가 먹방 유투버를 하는데 구독자들이 도네를 쏘면서 '잘 먹네, 더 먹어라'하며

부추기자 금전과 칭찬(을 가장한 조롱)을 이기지 못한 아이가 결국 탈이 나 사경을 헤메는 지경까지 먹고야 마는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 



반면 이런 해학적인 느낌이 별로 안 들었던 작품도 있었는데 바로 '생의 반려'라는 작품이다. 

검색해보니 이 작품이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자 미완성 유작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전 작품들에서 보이는 뭔가 풍자적이고 해학적인 느낌 보다는 우울한 정서가 더 강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자전적 소설이므로 등장인물의 설정을 통해 작가의 실제 삶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유복하게 태어났지만 형의 탕진으로 집안이 몰락하고 공장에서 궂은 일로 생계를 이어가는 누나집에 얹혀 살며 

누나의 히스테리를 다 받아내야 하는 가난한 한 남자의 무기력함이 생생히 느껴졌다. 

또한 작가의 삶에 있어서 아마도 유일한 논쟁거리로 남을 한 여인을 향한 스토커적인 집착도 관찰자 시점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김유정의 작품을 접하면서 또 하나 인상 깊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우리말의 '맛'이다. 

묘사들이 워낙 생생한데다 마치 노래 가사처럼 운율이 느껴지는 문체, 적절한 사투리, 지금은 쓰이지 않는 옛날 단어 등

우리말을 모국어로 쓴다는 것의 기쁨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설령 처음 보는 단어라 하더라도 문장을 소리내어 읽으면 금새 무슨 뜻인지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진짜 모르는 단어들은 찾아보기도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좋은 사이트를 알게 되어 겸사 같이 소개한다. 

(김유정 작품에 등장하는 생경한 단어들의 뜻과 원문에서의 쓰임을 같이 알려주는 사이트이다.)


http://www.kimyoujeong.org/Kimyoujeong/DictionaryList?Page=8&LinesPerPage=10&Type=0&Search=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주입식 교육의 폐해를 지적한다.

문학 작품을 즐기는 방법 대신 문학 작품을 이용한 문제 풀이에만 초점을 맞추어 교육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김유정'이라는 이름을 평생토록 기억하는 것은 그야말로 공교육의 순기능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김유정의 작품들은 '먹고 사는 것'에 관계된 삶의 애환을 담고 있어서 한창 세상 무서울 줄 모르는 학창시절보다는 

사회생활을 좀 해본 뒤에 읽어보면 그 감동이 더 클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펴낸 곳에서 '김유정'처럼 이름은 잘 알지만 막상 작품은 잘 모르는 작가들을 시리즈로 소개하고 있다.

찾아보니 김유정과 함께 피의 우정을 나누었던 이상의 소설집도 있어서 그 역시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