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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머리 앤 그래픽노블
머라이어 마스든 지음, 브레나 섬러 그림, 황세림 옮김, 루시 모드 몽고메리 원작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6월
평점 :
절판
인상깊은 구절
소중하고 예쁜 생각을 하되, 보물처럼 가슴속에 간직하면 더 좋다는 걸 배운 거죠. (pg 192)
이 작품처럼 '세계명작' 반열에 올라 있는 작품의 이름을 접할 때 흔히들 겪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분명 어릴 적 한 번 이상은 읽었던 것 같은데 막상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과
좀처럼 다시 읽고 싶어지지는 않는다는 것.
나에게 '빨강 머리 앤'도 그랬다.
어릴 적 TV로 본 동명의 만화영화도 주제가는 가사까지 다 기억이 나는데 막상 만화가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역시 단순한 텍스트보다는 음악의 힘이 월등히 강한 것인가)
노래 가사처럼 '외롭고 슬프지만 굳세게' 자라나는 내용이었겠지 싶다가도 그래도 뭔가 다시 읽어보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그러던 와중에 그래픽노블이라는 비교적 진입장벽이 낮게 발간된 책이 있어 기뻤다.
더구나 소개 자료로 본 몇 장의 그림들이 너무 이뻐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내용을 소개하는 것은 이미 너무도 유명한 작품이니 큰 의미가 없을 것 같고,
이 작품을 그래픽노블이라는 형태로 접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소개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일단 풍경과 장소에도 이름을 붙이며 사랑에 빠지고 마는 앤이 어떤 곳을 어떻게 보았는지를 글로 보는 것과
예쁜 그림으로 보는 것이 가장 큰 차이일 것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서술된 글을 보며 자기 나름대로 머릿속에 떠올린 풍경을 선호할 수도 있겠으나,
개인적으로는 그림작가가 예쁘고 개성적인 그림체로 표현한 다양한 장소들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예를들면 처음 마차를 타고 커스버트 남매의 집으로 가면서 보게 되는 푸르른 풍경은 밝고 아련한 느낌을 주는 반면,
밤에 심부름 길에 나서면서 보게 되는 풍경은 어둡고 으슥한 느낌을 제대로 시각화해서 보여준다.
더불어 계절의 변화나 시간의 흐름도 느껴지도록 지면을 크게 활용하여 주변 풍경을 표현한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인물들의 표현도 좋은 편이다.
만화라고 해서 등장인물들을 미화해서 표현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특히 좋았다.
어릴적 본 만화 주제가에서는 앤을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라고 묘사했지만 막상 만화 속 앤은 '저 정도면 예쁘지 않나'라고
생각하게 표현되었던 것과는 달리, 이 책에서는 정말 그 가사에 매우 적합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주변 인물들도 단순히 외모를 개성적으로 표현한 것 뿐만 아니라 앤을 처음 접하던 순간의 표정과 책의 후미 부분에서 앤을 바라보는
표정들을 비교해보면 차이가 확 느껴질 정도로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원작 소설이 거의 기억나지 않는 시점이어서 비교가 어렵지만 분량이 다소 짧다는 느낌은 들었다.
물론 그림의 비중이 큰 책이라 그럴수도 있겠으나 그림을 충분히 감상하면서 읽어도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을 것 같은 분량이었다.
일부 장면들은 좀 더 길게 표현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남지만 그래도 장르적 특성을 잘 살려서인지 책을 덮은 후 만족감이 꽤 좋았다.
다음부터는 사족이지만, 어릴 적 처음 접했을 당시에는 느낄 수 없었을 법한 부분들도 분명 있었던 것 같다.
고아를, 그것도 아직 미성년자를 단순히 먹이고 재워주면 노동력을 제공해주는 노예처럼 부리는 것이 당연한 줄 아는 사람들,
앤이 같은 반 친구 머리를 석판이 깨질 정도로 후려 쳤는데 아무 징계도 없이 다시 학교에 갈 수 있었던 것 등등
(학교에 간 자식이 뚝배기가 깨져서 왔는데 부모가 가만히 있었다고?!)
지금 기준으로 생각하면 지난 100년간 사람들 인식도 참 많이 변했구나 하는 것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나온지 100년도 넘은 작품이지만 지금도 계속해서 다양한 형태의 매체로 제작되고 있는걸 보면(최근에는 넷플릭스 시리즈로도)
시대를 뛰어넘는 감성이 분명 있는 모양이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이런 작품들은 확실히 나이가 좀 들고 난 뒤에 접하면 느껴지는 부분도 많은 것 같다.
(pg 192)
이 장면 다음에 이어지는 마릴라의 독백은 아이를 키워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궁금한 사람은 작품을 접해보기 바란다.
이처럼 앤이 세상을 대하는 동심 어린 시각과 앤의 성장을 바라보는 커스버트 남매의 심리 변화에서 느껴지는 잔잔한 감동들은
사실 세상의 때가 좀 묻은 눈으로 바라봐야 제대로 느껴지는 법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