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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의 부름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77
잭 런던 지음, 임종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상깊은 구절
삶의 절정을 이루는 황홀경이 있다.
그리고 삶은 그 황홀경 너머로 오를 수는 없다.
그런 점은 일종의 생존의 역설이다.
이 황홀경은 가장 생기 있게 살아 있으면서도 살아 있다는 것을 완전히 망각했을 때 찾아온다.
이 황홀경, 생존에 대한 망각은 예술가가 창작열에 사로잡혀, 불타는 격정 속에 자신을 상실할 때 오는 것이고,
전장에서 광기에 사로잡힌 채 항복을 거부하는 병사에게 오는 것이다. (pg 57)
개인적으로 바쁜 일이 있거나 마음이 심란할 때에는 책을 잘 보지 않는 편인데
책 소개를 보니 호기심이 일어 도저히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개 한 마리가 자신의 야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하는데 작가의 이력을 보아하니
개라는 동물을 통해 인간 사회를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지한 폰트로 적힌 강렬한 제목에 웬 EBS 다큐 썸네일 마냥 늑대 두 마리의 사진이 실린 표지.
개인적으로 책은 그 속의 내용으로 평가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0년 6월에 받아 들기엔 다소 당혹스러운 디자인이었다.
하지만 그 당혹감도 책을 펼치고 1장을 읽으면서 싹 사라졌다.
뒤에 해설까지 포함해도 160여 페이지로 얇은 편인데다가 글씨가 조밀한 것도 아니어서 읽은 시간으로 따지면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은 것 같은데 읽으면서 화장실도 가지 않고 한 자리에서 다 읽었다.
그 두 시간 동안 한 개의 삶을 스펙터클하게 지켜본 느낌이다.
읽기는 매우 즐거웠지만 소감을 쓰기는 다소 난해하다.
개를 통해 인간 사회를 보여줄 것이라 기대했던 애초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오히려 벅이라는 개의 삶을 통해 한 인간으로서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혹은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주어지는 환경 변화 속에서
어떻게 자신을 지키며 삶에 대한 의지를 이어갈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해주는 것에 가까웠다.
평화로운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인간에게 속아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가게 된 벅은 서서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법을 익혀간다.
하지만 그 적응의 과정은 '새로운 것'을 깨닫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잊고 있던 무언가'를 되찾는 것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경험이라는 한계를 벗어나 자신의 조상, 인간에게 길들여지기 그 이전 세대의 본성까지도 찾아 나서게 된다.
(블랙팬서 영화를 보았다면, 티찰라 왕이 자신의 경험을 뛰어넘어 선대 왕들에게 지혜를 전수받는 장면이 떠오르는 구절이 등장한다.)
벅이 자신의 본성을 깨닫는 과정 중에 인간은 옆에서 때로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때로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벅의 주변환경을 변화시킨다.
환경의 변화는 벅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었고 벅은 자신이 진정으로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즉 스스로를 자신이 원하는 최상의 모습으로 변화시켜 나간다.
이리하여 삶이 얼마나 꼭두각시와 같은가를 증명이나 하듯, 원시의 노래가 벅의 몸속으로 파도처럼 흘러들었고
그는 다시 본성을 되찾았다.
그가 이처럼 원시적 본성을 되찾게 된 것은 사람들이 북쪽 지방에서 황금을 발견했기 때문이며,
매뉴얼이 자신의 임금만으로는 아내와 여러 자식들을 도저히 부양할 수 없는 정원사 조수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pg 39)
삶이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인다고 여기는 이는 극히 드물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도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국민들을 상대해야 하며 이재용도 검찰 조사를 피할 수 없었다.
하물며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오죽할까.
삶에서 변화는 내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찾아온다.
이런 변화 속에서 진짜 나 자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변화 속에서 함께 변화해야 할 모습과 절대 변하지 말아야 할 모습은 무엇인가.
이 책은 나에게 이런 질문들을 던져 주었다.
짧고 굵은 소설이었지만 감상만은 가볍지 않은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다.
원문인 '콜 오브 더 와일드'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되어 국내에도 개봉되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배우가 주연이라 하니 더 관심이 간다.
코로나 여파로 흥행에는 실패한 모양이지만, 예고편을 보니 원작의 스토리라인은 비교적 잘 담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인간이 아닌 개의 삶을 보여주는 작품인지라 개의 본성 찾기 과정을 얼마나 상세히 담아 낼 수 있었을지 걱정도 되지만)
극장에는 가지 못했으나 추후 스트리밍으로라도 접하게 되면 원작과 비교하며 즐겁게 감상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