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불평등 시점
명로진 지음 / 더퀘스천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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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당신이 그들보다 수입이 좀 좋다고 해서 인생의 다른 분야에서 더 뛰어난 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당신은 사장이지 선생이 아니다. 어떤 사원은 당신보다 학력도 학벌도 학식도 더 좋다. (pg 110)



후련하다. 시원하다.

책을 덮으면서 떠오른 느낌이다.


살짝 얇은 두께에 내용도 대체로 심플하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을 허심탄회하면서도 유쾌하게, 

그러면서도 작가가 가진 고전 인문학 지식과 접목해 거침없이 펼쳐낸 책이다.


사실 한국 사회가 불평등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다만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다.


지방 소도시 출신으로 서울에 있는 한 대학에 처음 갔을 때 난 강남 8학군 출신의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자기 친구들은 이런 학교 안온다며 자신의 인생을 한탄했다.

여기서의 이런 학교란 소위 S.K.Y 바로 아래 순위를 차지하기 위해 피터지게 경쟁하는 대학 중 하나였다.

나는 3년 내내 개같이 공부해서 겨우 온 학교였고 내 고등학교 동창들은 대부분 나를 부러워했다. 

하지만 처음 만나는 OT 자리에서 저런 이야기를 하는 친구를 보며 인생 처음으로 불평등을 인지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래도 고등학교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사는 저 친구의 삶보단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내 인생이 낫다며 정신승리(!)를 하는 것 말고는 딱히 방법이 없었다. 


이 책 역시 그렇다.

이 책을 읽는다고 불평등이 해소되지도, 내가 더 잘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한 껏 부자들을 씹기라도 해 보면 뭔가 뿌듯한 정신승리를 맛볼 수 있다.


작가는 원래 세상이 불평등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불평등한 세상을 수긍하고 살다보면 

이렇게 계속 불평등한 길로 갈 수 밖에 없다는 당연한 진리를 쉽고 진솔한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다.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가난 구제는 나라님이 하는 게 아니다. 백성이 하는 거다.

불평등과 불공정을 혁파하고 보다 나은 사회,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한 나라로 가는 길-그 진보의 도정은

대통령이 아니라 나와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pg 168)


전반적으로 재밌는 책이었지만 특히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법한 사람들은 실명으로 등장하고, 

실명으로 이야기하기 어려운 것들은 이니셜을 써가며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대목들이 아주 재미있다. 

그러다보니 들어가는 글에서 '박정희급'이 아니면 언급하지 않았으니 고소하진 말아달라며 엄살을 피우기도 한다.


남들보다 잘 사는 집 자제로 좋은 대학에 갔다면 조용히 지내라.

가난한 집 자식으로 같은 대학에 들어온 친구가 있다면 그 앞에서 입을 다물어라.

그들은 당신보다 몇 배 더 어려운 감정노동을 겪으며 그 자리까지 왔다.

부잣집 자식이고 허우대 멀쩡하고 명문대까지 갔다면, 언젠가 청문회에 불려 나온 재벌 3세처럼 어리바리하게 굴어라.

그게 잘난 사람의 생존법이다. (pg 24)


누구라고 딱 이야기 하진 않았지만 대체로는 누군가의 얼굴을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실명을 거론할 때에도 아래와 같이 통렬함을 잃지 않고 있다.


에스메랄다라는 인물 성격의 핵심은 결핍인데 함연지에게는 결핍이 결핍되어 있다. (중략)

3백억 원이 아니라 3조 원이 있어도 인정받지 못하는 삶은 누구에게나 괴롭다.

다만 누군가 인정을 위해 애쓸 때 누군가는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건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것뿐이다. (pg 29)


당사자라면 기분이 살짝 나쁠지도 모르겠다.

다만 읽는 사람 대부분은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면 느끼는 부분이 더 많을 수 있다.

직장생활을 비판하는 대목이 자주 등장하는데 상당부분 공감이 되었다.


당신이 그들보다 수입이 좀 좋다고 해서 인생의 다른 분야에서 더 뛰어난 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당신은 사장이지 선생이 아니다. 어떤 사원은 당신보다 학력도 학벌도 학식도 더 좋다. (pg 110)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고전을 통해 현대 사회를 분석하는 것도 종종 등장하는데 하나만 소개하자면 아래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자신이 속한 조직이 어떤 상태인지를 자가점검 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pg 124)



아래부터는 사족이다.

작가가 한 말이 워낙 공감이 가고 마치 내 속을 들여다보는 듯 했지만 딱 하나 공감이 안가는 구절이 있어 굳이 옮겼다.


아마 대학에도 그런 직원이 있을 거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아니, 체육관에 학생은 공짜로 들어간다고? (중략) 학생 1인당 월 3만 원만 받아도 1년에 십수 억이 생기는데!' (중략)

뭐 요런 아이디어를 창출해내는 직원 말이다. (pg 31)


내가 겪은 바, 대학의 직원들은 저런 힘이 없다. 

고작해야 위에서 '체육관에 회비를 얼마를 받아야 인건비 대비 수익이 나올지 계산해보라'는 명령을 이행하는 존재일 뿐이다.

물론 내가 전국의 대학을 대변하진 않으니 작가가 속한 대학의 직원은 그런 힘이 있는 것일 수도 있고, 

그저 작가도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양반이니 대학 노동자들의 삶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일 수도 있다.  


최근에 신상에 변화가 생겨서 읽어야 할 책들이 쌓여가고 있어서 조금 부담되는 시점이었는데

책을 잡자마자 반절을 읽었을 정도로 즐겁게 읽은 책이었다.

이런 책의 소감을 쓰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그냥 내가 듣고 싶었던 말만 족족 써둔 것 같은 책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작가의 책은 처음 접하는데 이제는 나오는 즉시 찾아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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