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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9년 12월
평점 :
인상깊은 구절
그러나 자신의 인생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든다.
자신이 누군가의 분신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오히려 누구나 자신의 분신을 원하는 것 아닐까. 그걸 찾지 못해서 모두들 고독한 것은 아닐까. (pg 568)
책을 다 읽고 두 번 반성했다.
첫 번째는 책을 처음 받아들었을 때 생각보다 두꺼워 '읽으려면 꽤나 걸리겠는데'라고 생각했던 내 예측이 완전히 틀렸다는 점이다.
휴일을 맞아 무심코 표지를 열었는데 한 번 책을 손에 잡고나니 도저히 멈출수가 없었다.
놀아달라고 조르는 아이에게 TV를 틀어주고 나는 옆에서 이 책을 읽었을 정도로 몰입감이 엄청났다.
결국 6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다 읽는데 이틀이 채 걸리지 않았다.
두 번째는 이렇게 강력한 몰입감을 주는 작가의 작품을 이번에 처음 접했다는 부끄러움이었다.
말 그대로 책을 읽으면서 스릴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소설을 잘 읽지 않는 터라 텍스트로 스릴을 느낀 것이 개인적으로는 오랜만이어서 더 재미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스토리라인은 생각보다 심플한데 이를 풀어가는 방식이 상당히 스릴있었다.
홋카이도에 자신이 엄마와 아빠 그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고 있던 마리코라는 여자가 있었다.
학창시절 집에 화재가 발생해 엄마가 사망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마리코는 마음 한 구석에 엄마가 아빠를 의심하여
가족을 모두 죽이고 자살하려는 목적으로 사고를 일으킨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마리코는 분명 자신의 출생에 미심쩍은 면이 있다고 생각하여 그 뿌리를 추적하기로 한다.
한편 도쿄에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TV에 출연하고 싶은데, 엄마가 극렬히 반대하는 후타바라는 여자가 있었다.
엄마의 반대를 이해하지 못한 채 TV에 출연했지만 곧 이어 그토록 반대했던 엄마가 의문의 사고로 사망하는 일이 일어난다.
자신의 방송출연과 엄마의 사망에 모종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던 차에 홋카이도에서 한 교수가 찾아와
엄마의 과거를 들려주겠다며 접근한다.
둘은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살아가고 있었지만 후타바의 방송 출연을 시작으로 둘을 헷갈려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후로는 스토리에 큰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줄거리는 생략하지만, 사실 책 표지에 '인간의 탐욕과 오만', '신의 영역을 침범' 등의 문구가 있어서 사실 그 둘의 관계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게다가 책 제목 역시 '분신'이다.)
하지만 이 책의 스릴은 그 둘의 관계가 어떠한지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이 장점이다.
그 둘이 자신의 과거를 하나하나 캐가는 장면들이 굉장히 속도감있게 전개되어 꽤 두꺼운 책임에도 불구하고 전개가 늘어진다거나
답답한 느낌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빨리빨리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수 있어서 좋았다.
서술 방식 역시 마리코의 장이 끝나면 바로 후타바의 장이 시작되며 둘의 서술이 반복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각 장에 별도의 부제가 달려있지 않은데 그 점이 오히려 사건에 대한 흥미를 높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작품 내에 출산과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고찰이나 기술의 발전과 윤리적 가치의 충돌 등
사회적인 내용도 적지않게 담아내고 있어 단순한 스토리라인에 풍성함을 더해준 점도 좋았다.
영화화 하면 상당히 재밌겠다는 생각에 검색해보니 이미 5편짜리 드라마가 일본에서 제작된 적이 있었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5편 전부 찾아 볼 수 밖에 없었다.
일본 드라마 특유의 오버스러움이 간혹 눈에 거슬리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책의 이야기 흐름을 충실하게 잘 반영하고 있어서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었다.
원작을 읽은 직후에 보니 원작과 차이가 나는 점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원작에 등장하는 방대한 양의 등장인물들을 드라마에 적합하게 축소하고, 두 주인공(배우는 한 명이지만)의 조력자들의 관계가
단순화되어 묘사된 점들에서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반적인 스토리는 원작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책의 결말이 다소 모호하게 끝나는 반면, 드라마는 보다 명쾌하게 마무리되기 때문에 보기에 따라서는 속이 더 시원할 수는 있다.
다만 책에서 느낀 스릴이 드라마에서는 아주 충분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물론 내가 스토리를 전부 알고 봤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담이지만, 검색하다 보니 이전에 '레몬'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 발매된 적이 있는 작품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레몬이 작품 내에서 중요한 장치로 등장하기 때문에 스포일러성이 다분한 원제보다 오히려 나은 측면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 책에서는 파랑색 표지에 큼지막하게 노란 레몬을 그려두어 이런 면을 잘 살리고 있기도 하다.
읽기도 금방 읽었지만 그 감동이 식기 전에 서평도 금방 쓴 느낌이다.
바로 작가의 다른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