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한 염세주의자 - 흔들리는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마지막 태도
염세철학가 지음, 차혜정 옮김 / 나무의철학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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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어쩌면 장자는 우리에게 이런 충고를 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당신은 성형이나 화장을 통해 자신을 원하는 모습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런데 우주가 굳이 우리에게 저마다의 육체와 운명을 준 것은 우리 각자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를 주고 싶어서일 것이라고. 

용기를 내어 당신이 가진 그 모습대로 주변 사람들과 다른 인생을 살라고 말이다. (pg 207)



내가 아는 장자의 사상은 사실 고등학교 시절 수능 공부에서 다룬 몇 페이지의 정보가 다였다.

'무위자연'으로 대표되는 노자와 장자가 수립한 사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속에 왠지 노장사상은 유가나 법가의 사상보다는 뭔가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었다.

두 사상에 비해 비교적 규율이 적고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에 집중하는 사상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종교활동을 하고 있지 않은 이유도 이런 저런 규율들을 싫어하는 본성 탓이 가장 클 것이다.)

물론 노장 사상도 도교라는 종교로 발전했었지만 지금 도교를 믿는 이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을 보면 성공적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 책은 장자의 사상을 저자가 나름대로 해석하여 비교적 쉬운 문체로 일반 독자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서술한 책이다.

책을 다 보고 나니, 장자는 역시 자신의 사상이 종교로 발전하기를 원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본인에게 물어봐야 알겠지만;;)


저자가 말하는 장자의 사상은 자신의 대한 인식에서 시작한다. 

이 부분부터가 굉장히 신선한데, 일단 내 자신이 그렇게 특별할 것도, 

모종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태어난 존재도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자신이 사회에 별 쓸모가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세상의 잣대에 맞추기 위해 자신을 억누를 필요가 없게 된다.

그보다는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며 나는 도대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탐색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세상에서 폐물이 되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인생의 선물이며,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가는 계기가 된다. (pg 35)


진정한 나는 결코 일시적인 정서, 느낌, 사상, 이념이 아니며 심지어 신체의 특정 장기조차도 내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런 식으로 자아를 찾는 방법은 전부 잘못된 것이라고 장자는 주장한다.

장자의 주장대로 나를 규정하는 것을 하나둘씩 제거하고 나면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

결국 진정한 나는 사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그러나 우리는 이 당연한 사실을 너무도 쉽게 잊어버리고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집착한다. (pg 44)


책을 읽는 사람에 따라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정도는 다를 것이다.

얼핏 '모든 사람이 다 부질없는 존재들이니 그냥 막 살다 가라'라는 메시지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냥 막 살다 가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쉽다면 모두가 서울역 앞에서 죽치고 잠이나 자거나 산 속에 틀어박혀 자연인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사회 전체 구성원 중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막상 막 살고자 해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욕망과 욕구가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무언가 거창한 자아실현을 바란다기 보다는, 당장에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고 좋은 집에서 살고 싶고 멋진 배우자를 만나고 싶고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에 무언가 사회에서 쓸모있는 사람이 되려고 어느 정도는 노력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장자는 그 자신의 욕심이 과연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회가 그렇게 살도록 만드는 것인지를 생각해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고 나는 해석했다. 

'나는 꼭 이루고 싶은 성취가 있고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장자는 그저 그리 하라고 했을 것이다. 

결국 자신이 진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진짜 자연적인 존재'라고 본 것이다.


물론 진짜 자신을 안다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노장 사상 하면 역시나 호접몽을 빼놓을 수 없는데, 이 이야기의 핵심도 그것이다. 

결국 꿈꾸는 주체가 나비인지, 장자인지 장자 자신도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호접몽을 아래와 같이 해석하고 있다.


각성이란 어떤 사람이 꿈에서 벗어나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각성이 의미하는 것은 세상 일에 대처하는 모종의 태도이며, 비록 꿈속에 있더라도 그 꿈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각성은 꿈속의 모든 것이 결코 현실이 아님을 분명히 깨닫는 것이다. 

자신이 '스스로 깨어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핵심은 꿈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꿈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당신이 꿈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인정하지 않을 때 당신은 결코 휘둘리지 않을 것이며, 그때부터 진정한 자유를 얻을 것이다. (pg 111)


이게 가능해지면 인생은 더없이 간단해진다. 

이번 생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에 충실하며 무대에 올라야 할 때 오르고, 퇴장해야 할 때 퇴장할 뿐이다. -중략-

설사 꿈에서 깨어 있더라도 여전히 꿈속에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생을 한바탕 꿈으로 보는 관점이야말로 우리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pg 136)


앞에서 자아란 별 의미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나비가 된 삶이나 장자가 된 삶이나 꿈이기는 매한가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결국 나비의 꿈을 꾸고 있을 때에는 나비로서 살고, 장자의 꿈을 꾸고 있을 때는 장자로서 살면 그만이라 말하는 것이다. 


자신의 본성대로 사는 삶을 지향하기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비슷한 맥락으로 설명을 이어간다. 


사랑이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만의 방식으로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곁에서 포용하고 지지하며 바라봐주는 것이다.

나의 방식을 고집한다면 상대가 원하고 추구하는 삶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세상 모든 사람은 저마다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pg 195)


이는 단순히 연애 감정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부모 자식간 혹은 단순한 친구 사이에서도 통용되는 말일 것이다. 


무릇 천지간의 사물에는 제각기 주인이 있으니, 그 자체가 나의 소유가 아니라면 한 터럭일지라도 억지로 추구하지 않아야 한다.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저 산 위의 밝은 달을 바라보라.

바람 소리는 귀로 얻는 좋은 안주요 밝은 달은 눈으로 보는 향연이니, 바람 소리를 듣는다고 금할 이 없고, 

밝은 달을 아무리 바라봐도 다함이 없다.

이는 조물주가 우리에게 무상으로 공급하는 보물이니 나와 그대가 함께 누릴 바로다. (pg 201)


책의 내용은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렵다.

저자가 일단 쉽게 설명하고 있고 번역도 너무 깔끔해서 문장 수준에서 이해가 되지 않을 부분은 거의 없다. 

책의 페이지도 부록을 포함해도 280페이지 정도로 두껍지 않고, 본문에 고전의 원문(한자)이 함께 실려 있기 때문에 의외로 금방 읽힌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자 사상 자체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특히나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현대의 우리에게는 

생경하게 들릴 수 밖에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오는 어려움은 있었다.

하지만 간만에 고전의 해석을 통한 신선한 철학 산책을 할 수 있었던 기분좋은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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