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영웅전설 완전판 스페셜 박스세트 - 전15권 이타카
다나카 요시키 지음, 김완 옮김, 미치하라 카츠미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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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이한 경로로 돌고 돌아 결국 사게 된 은하영웅전설 박스 세트.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딱히 봐야겠다는 생각은 안했었는데 어느 날 애니가 새로 나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기존 애니는 워낙 옛날 느낌도 강하고 분량도 너무 많아서 생각도 없었는데 새로운 애니라면 이참에 한번 보자 싶어서 보게 되었다가...

"우주를 손에 넣겠다, 키르히아이스" 에 뻑가서 빨리 다음편을 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무려 15권이라는 분량과 17만원이 넘는 가격 때문에 많이도 망설였다.

절충안으로 8권짜리 만화책 세트가 있길래 그걸 샀더니 왠걸 만화책 세트는 원작의 아주 일부분만 커버하고 있다는 걸 다 읽고나서야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원작 소설을 봐야겠다 싶어 도서관에도 찾아보고 중고로 한 권씩 사는 방법도 생각해봤는데 결국에는 그냥 눈 딱 감고 사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소설과 만화책 세트가 모두 책장에 꽃혀 있게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정말 한 달 가까이 열심히 읽었다. 심지어는 애 재우고 늘 하던 게임도 멈추고 밤잠을 줄여가며 읽었다. 

본편만 10권에 외전까지 합하면 총 15권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지만 읽는 동안 지루하기는 커녕 오히려 남은 책이 줄어드는 것이

아쉬운 순간도 있었다.  

이 작품과 더불어 SF대작으로 불리는 파운데이션을 읽은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아 비교해가며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푸른 글씨는 원문에서 발췌하였다. 작품 중간중간 감명깊은 구절을 찍어 두었는데 몇 권에서 나오는지를 같이 기록하지 않아 부득이

 페이지만 수록하였다.)

(아래부터는 소설의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음을 밝힌다.)



작품의 스토리라인은 길이에 비해 단순한 편이다.

우주를 손에 넣겠다며 혜성같이 등장한 독재자 라인하르트와 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고자 원치않는 전투를 이어가는 양 웬리.

이 숙명의 라이벌 두 사람의 대결이 소설의 기본 골자이다.


이 작품은 SF를 표방하고 있지만 앞서 읽은 파운데이션과 마찬가지로 함선간의 전투나 은하계를 가로지르는 대규모 원정 등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지는 않다.

물론 파운데이션에 비하면 함선간, 개인간의 전투장면이 비교적 많이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그 비중이 다소 딱딱하게 흘러갈 수 있는 정치대결의 곁다리로 흥미를 이끌어가기 위한 정도이지 작품의 핵심과는 거리가 멀다.

전장의 묘사도 아주 구체적이라기 보다는 '전세가 이러저러 하다가 어떤 상황의 변화로 이렇게 흘러갔다' 정도로 간략히 묘사되는 편이다.

게다가 전투 장면 묘사의 대부분은 신념에 따라, 혹은 따르는 주군의 명령에 따라 전장에 나선 고위 군인들의 죽음은 물론,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전쟁터로 끌려와 희생 당하는 병사들의 무수한 죽음을 허무하고 참혹하게 보여줌으로써 전쟁의 잔인함과 무의미함을 비판하는 용도로 활용하고 있다.  


작품을 가로지르는 핵심적인 내용은 라인하르트로 대표되는 전제정치와 양 웬리로 대표되는 민주정치 간의 이념 대립이다.

이 주제는 지금도 누구나 쉽게 결론 내릴 수 없는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정치과정의 결과만 놓고 보자면 플라톤이 주장한 '철인정치'가 가장 효율적이면서도 좋은 정치체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정치에서 결과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배웠다.

또한 '철인'이 등장할 가능성과 등장한다 하더라도 장기간 변질되지 않고 통치할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일반 대중이 스스로를 통치하는

민주주의 체제가 더 우월하다고 믿는다.

이 책은 그런 배움과 믿음이 어디까지 확고할 수 있는 것인지를 독자들에게 묻는다.


"한 귀족이 죽어 1만 명 평민이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이 짐에게는 바로 정의다.

 굶어 죽기 싫다면 일을 하라. 평민들은 500년간 그리 해왔으니까." (pg 253)


저런 말을 하는 평민 출신의 젊은 독재자가 나타난다면 어떨까?

이성적으로는 그래도 민주주의가 갖는 우수함을 믿는다.

라인하르트라는 독재자는 너무도 이상적어서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매력적인 유혹인 건 사실이다.

정말 저런 독재자가 나타난다면 그를 지지함으로써 자신의 주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도 제법 많지 않을까?


더욱이 소설 속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중우정치의 폐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정치 지도자들은 국가 차원에서의 전략적 판단 보다는 차기 선거와 자신의 표를 의식해 사람들을 전쟁터로 내몬다.


"인간 사회에 흐르는 사상의 경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지.

 생명 이상의 가치가 존재한다는 생각과, 생명보다 귀한 것은 없다는 생각이야.

 인간은 전쟁을 시작할 때는 전자를 구실로 삼고, 전쟁을 끝낼 때는 후자를 이유로 들어.

 그걸 수백 년, 수천 년 동안이나 계속했단 말이지..." - 중략 -

"앞으로 몇천 년이나 그런 짓을 계속할까?" (pg 369)


책을 읽는 내내 어떤 사회가 더 바람직한 사회인가에 대한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이런 측면 때문에 이 작품이 장르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사람들 입에 오르 내리며 명작 반열에 오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물론 작가는 자신의 답을 정해두고 있다. 하지만 그 답을 받아들이거나 반박하는 것은 역시 독자의 자유이다.


"국민을 해칠 권리는 국민 자신에게만 있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루돌프 폰 골덴바움, 또한 그보다도 훨씬 소인배지만

 욥 트위니히트 같은 자를 권좌에 앉힌 것은 분명 국민 자신의 책임입니다. 남을 책망할 수 없지요.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그 점입니다.

 전제정치의 죄란, 국민이 정치의 해악을 남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 죄악의 크기에 비하면 100명의 명군이 베푸는 선정도 조그맣게 보일 정도지요.

 하물며 각하처럼 총명한 군주가 출현하는 일이 지극히 드문 것을 고려해 본다면 장단점은 명백해지지 않을지요..." (pg 355)



역시 명성답게 주옥같은 구절들이 정말 많았다.

먼 미래의 상상 속 이야기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한번쯤 생각해봄직한 문구들이 다 옮겨적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등장한다.

추리고 추려 아래 정도로 마음에 드는 구절들을 추려보았다.


본디 인간이란 자기 의사만으로 역사와 세계를 움직이지는 못하는 법이다.

꽃가루를 날라 황무지에 새로운 꽃을 피우는 바람에 의지는 없으나, 이는 분명 바람의 공적인 것이다. (pg 31)


인간은 자신이 악이라는 인식을 견뎌낼 만큼 강하지 못하다.

인간이 가장 강하게, 가장 잔혹하게, 가장 무자비하게 변모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옳다고 확신했을 때다. (pg 167)


지상에서 가장 단단한 탄소결정체 다이아몬드가 생성하려면 막대한 지질의 압력이 필요하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신 중에서 가장 귀중한 것...

권력과 폭력에 저항해 자유와 해방을 갈구하는 정신이 함양되기에는 강자의 억압이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자유에 좋은 환경이란 자유 그 자체를 타락시킬 뿐 아닐까. (pg 359)


인간의 생명은 별빛이 반짝이는 한순간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 정도는 예로부터 누구나 잘 안다.

그래도 별의 영원함과 인간사의 한순간을 인식하는 것은 인간이지, 별이 아니다. (pg 339)



명성에 걸맞게 좋은 스토리와 좋은 질문을 던져주는 작품이었지만 10권이라는 긴 호흡으로 읽어가면서 그 결말이 용두사미처럼

끝나게 된 것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었다.

두 주요 인물이 모두 작품 속에서 최후를 맞게 되는데 양 웬리의 죽음 이후 작품의 몰입도가 급격히 감소하는 면이 없지 않다.

(실제로 그 이후 읽는 속도가 좀 느려졌었다.)

물론 양 웬리라는 인물에 잘 어울리도록 작가가 의도한 죽음이라는 점은 잘 와닿았다.

다만 그 이후 스토리 전개가 다소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주요 인물의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아쉬움은 오히려 라인하르트 쪽이었다.

소설을 끝내기 위해 약간은 툭 던져놓듯한 죽음이어서 허탈한 느낌도 들었다.  

이번 세트에서는 각 권의 후미에 작가의 인터뷰가 실려 있어서 작가가 이 부분을 나름대로 설명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내가 느낀 아쉬움이 덜어지는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 이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이 한번 보고 싶다고 한다면 적극 추천하고 싶은 작품임에는 틀림없었다.

(작품의 주요 소재가 전쟁이니만큼 다소 남성중심적인 세계관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이 거슬리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겠다.)

재미도 보장되면서 아주 생각없이 읽을 수 있는 작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대한 분량을 짧게 정리하느라 두 인물 외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양국에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각각이 상당히 개성 넘치고

그들 사이에서 보이는 다양한 정략과 모략, 충성과 배신도 작품의 빼놓을 수 없는 재미였다.

그들을 통해 권력과 사회 구조가 인간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고찰도 함께 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지난 해를 마무리하는 책으로 이 작품을 접하게 되어 개인적으로 아주 기쁜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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