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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당신이 남긴 증오
앤지 토머스 지음, 공민희 옮김 / 걷는나무 / 2018년 1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상깊은 구절
"이건 네 잘못이 아니란 걸 알지?" 엄마가 말했다. -중략-
"하지만 가끔은 올바른 행동만으로 부족하잖아요?" -중략-
"전부 다 제대로 해도 가끔 상황이 안 좋은 경우가 있죠. 그렇다고 해서 제대로 하고 있는 걸 멈추면 안 돼요." (pg 158~159)
간만에 낯설지만 민감한 주제를 풀어낸 소설을 접했다.
작가는 미국 내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주제로 45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소설을 발표했다.
이미 미국 내에서는 큰 인기를 끌어 영화로도 제작되었다고 한다. (마블의 팔콘으로 유명한 앤서니 매키도 출연한다고 한다.)
게다가 이 책이 작가의 데뷔작이라고 하니 놀라움과 궁금함이 더해져 접하게 되었다.
특히 국내에도 난민 문제가 큰 화두가 되고 있어서 국내에 주는 시사점도 많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더 읽고 싶었다.
이런 민감한 주제를 가진 책을 평하기란 좀처럼 어려운 것이 아니다.
조금만 이 책의 아쉬운 부분을 지적해도 레이시스트처럼 보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흑인들도 비하하는 동양인이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생각을 조금 남겨보고자 한다.
이 책은 '스타'라는 이름을 가진 십대 소녀의 삶을 통해 현재 미국 내 저소득층 흑인들이 처한 현실을 보여준다.
스타는 저소득층이 모여사는 마을인 가든 하이츠에 살고 있다.
주민 중 대부분이 흑인이며 마약을 파는 두 갱단이 세력 다툼으로 판을 치고 치안이 불안한 곳이다.
스타의 부모는 이런 마을에서 아이들을 지키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게 하고 싶어 무리를 하며 아이들을 집에서 멀리 떨어진
백인들이 주로 다니는 사립 고등학교에 보낸다.
스타는 이런 곳에서 두 가지의 자아를 갖게 된다.
가든 하이츠의 주민이자 흑인으로서 가지는 자아와 주로 백인 부유층이 다니는 학교의 재학생으로서 가지는 자아이다.
상충하는 두 자아 사이에서도 가족에게는 사랑받는 딸이자 누이로, 학교에서는 백인 남자친구를 사귀며 운동도 잘하는 학생으로
둘 사이의 균형을 이루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런 스타에게 얘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난다.
해외토픽 뉴스에서 심심치 않게 한번씩 등장하는 소재인 백인 경찰이 비무장 상태의 흑인을 쏘아죽이는 사건이었다.
스타는 그 사건으로 소꿉친구였던 칼릴이라는 친구가 눈 앞에서 총에 맞아 숨지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이후로 총을 쏜 경찰을 구속해야 한다는 흑인들의 견해와, 피해자가 마약상이었고 총기를 휴대할 수 있었던 정황상 어쩔 수 없었다는
백인 경찰측의 견해가 치열하게 맞서며 소설이 전개된다.
(여기까지가 소설의 초입까지이며 이후의 스토리는 지나치게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생략하고자 한다.)
책은 이런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십대 소녀의 심정과 내면의 변화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경찰에 대한 트라우마, 소꿉친구의 부당한 죽음을 밝혀야 한다는 사명감, 자신이 빈민마을에서 일어난 그 사건의 핵심 목격자라는 것을
부유한 백인 친구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는 부끄러움, 자신을 위로하고 지켜주려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 관심에 대한 부담감까지.
이 모든 감정들이 긴 호흡으로 충분하게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내 추악한 진실을 마주한다면 난 가든 하이츠와 그 속의 모든 것이 부끄럽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바보같지만.
내가 어디 출신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바꿀 수 없는데 왜 날 만들어준 것들을 부끄러워했을까?
그건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것과 같다. (pg 447)
그러면서도 미국 사회에 대한 비판의 시각도 놓치지 않고 있다.
언론이 보여주는 양면성(흑인 측면의 미디어와 백인 측면의 미디어가 모두 등장한다.)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고,
미국 사법 시스템, 특히 배심원제가 갖는 맹점도 빠뜨리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강력범죄에 대한 처벌이 약하기 때문에 미국처럼 배심원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종종 제기된다.
이 소설을 보고도 그 주장에 100% 동의할 수 있을지는 읽는 사람들의 판단에 맡기겠다.)
난 우리 동네, 우리 집이 화면에 등장하는 것을 긴장한 채로 쳐다보았다.
방송은 최악인 부분만 꼭 집어 보여주는 것 같다.
마약 중독자들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허물어진 시더 그로브 구역, 비행 청소년 집단의 점멸 사인, 흰 천이 덮인 길가의 시신.
룩스 부인의 케이크는? 루이스 아저씨네 이발관은? 루벤 아저씨의 식당은? 병원은? 우리 가족은? 나는? (pg 250)
저자가 하고픈 말이 많아서인지 450페이지라는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전개가 빨라 술술 읽어갈 수 있었다.
무거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읽는 내내 무거운 감정만 느끼는 것도 아니다.
십대들의 이야기이니만큼 십대들이 향유하는 문화와 말투를 살린 개그코드들도 곳곳에 숨어있다.
(흉악한 일을 당했다고 해서 늘 우울하게 사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작가의 의도 같기도 하다.)
힙합이나 드라마 등 미국 문화를 잘 아는 독자라면 더욱 공감가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난 감상은 다소 복잡하다.
누군가 이 책이 '작가가 의도한 메시지를 거부감 없이 잘 전달하고 있는가?'라고 물으면 주저없이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흑인을 너무 억지스럽게 피해자화 한다거나 백인을 일방적으로 악하게 묘사하고 있지 않아서
내 나름으로는 균형을 잘 살린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어떤 집단의 일부가 갖는 특성이 그 집단 전체를 매도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높이 살만하다.
이는 요즘의 한국을 살아가는 우리의 시각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최근 우리 사회에서 보여준 난민에 대한 혐오는 이 책에서 숨진 칼릴을 바라보는 스타의 친구, 헤일리의 시각과 놀랍도록 비슷하다.
난민에 대해 (부정적으로든 긍정적으로든)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일독을 권하고 싶다.
하지만 이 책이 '소설로서 재미가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난 대답을 다소 망설일 것 같다.
왜냐하면 중반을 넘어서기 전에도 대충 이야기의 흐름이 충분히 예상되기 때문이고 별다른 반전이나 서사의 변화 없이
그대로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쉽게 별 다섯개로 이 책을 평가하기가 어려웠다.
(심지어는 누가 다치거나 죽고, 사건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 스타가 무슨 행동을 하게 될지까지도 그리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큰 목소리를 내는거죠? 우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달라지는 것이 없으니까요."
"그렇단다. 우린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그럼 저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네요." (pg 176)
저 구절이 450페이지 중 176페이지에 등장하는데, 이쯤 읽을 때 '대충 이런저런 스토리로 흘러가겠군' 했었는데
역시나 그대로 이야기가 끝이 나서 다소 아쉬웠다.
이미 미국에서는 영화가 개봉을 한 모양이다.
유투브 등을 찾아보면 이미 영화의 트레일러가 올라와 있는데, 책을 읽고나서 트레일러를 보니 느낌이 아주 색달랐다.
아무래도 책을 읽으면서 내가 상상했던 등장인물들과 실제 배우 캐스팅이 완벽히 매칭될 순 없으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이 책을 접하고 싶은 사람들은 트레일러를 먼저 보고 책을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아쉬움을 남기는 책이었지만 영화가 국내에도 개봉이 된다면 다시 한번 보고 싶은 작품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