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류학자라고 새를 다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만
가와카미 가즈토 지음, 김해용 옮김 / 박하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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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만약 사회에 좀비가 만연한다면 우선 살아남는 게 최우선이지 환경 보전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굶고 있는 가족을 위해서라면 설령 멸종 위기종의 마지막 한 마리라 해도 잡아먹음으로써 주린 배를 채울 것이다.

환경 보전은 경제나 치안 모두 안정된 사회에서나 안심하고 추진할 수 있는 것이다. (pg 171)

 

 

나름 책 읽는 것이 취미라고 하다보니 책을 읽다보면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최근에 본 책 중에서 누가 하나를 추천해달라고 하면 어떤 책을 추천할까?'


보통은 책을 다 읽고서 '와, 이 책이라면 정말 누구한테 추천해줘도 욕먹지는 않겠다' 싶은 느낌이 들게 마련인데,

이 책은 좀 달랐다.

읽는 내내 너무 재밌어서 당장이라도 추천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온라인 서점에서 이 책이 '자연과학'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특별하다.

뼛속부터 문과충인 나는 책을 볼 때에도 '자연과학'쪽은 좀처럼 손대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서평을 남긴 책 중에서도 자연과학 서적은 처음일 것 같다.


(책의 뒷표지)


보통 자연과학 책이라 하면 갖는 선입견이 있다.

딱딱한 이론적 배경 설명과 수식, 그리고 전문적인 용어들이 난무할 것 같다는 편견이다.

하지만 이 책은 뒷표지에 장식된 화려한 말들이 민망하지 않게 정말 '재미'가 있었다.

'조류학자'라고 하는 다소 희귀한(?) 직업을 가진 저자가 자신이 연구를 어떻게 진행하는지를 재치있게 풀어가고 있다.

(저자의 말로는 지인 중에 조류학자가 있을 확률이 연예인을 알고 있을 확률보다 낮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챕터마다 하나의 새를 주제로 놓고 썰을 풀기 시작하는데, 그 썰의 전개 방식이나 문장들에 유머가 넘친다.


예를 하나 들어보면, 보통 차에 묻어 있는 하얀 새의 배설물을 우리는 '새똥'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저자는 하얀 배설물은 오줌이라는 설명을 아래와 같은 방법으로 한다.


(pg112)


'아, 그렇구나' 하면서 읽다보면 무심코 나도 모르게 빵터지게 만드는 문장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그렇다고 재미만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제목과는 달리 저자가 새를 상당히 좋아한다는 것이 모든 챕터에서 드러난다.

심지어는 새의 뼈까지 좋아해서 골격 표본을 최대한 모으고 있다며 오타쿠스럽게 고백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새에 대한 전문적인 정보들도 최대한 쉬운 서술로 풀어놓았다.

심지어는 현존하는 새가 아닌, 한 식품광고에 등장하는 마스코트 새의 외모를 분석하여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살지를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유추하는 챕터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아주 재밌었던 챕터였다.)


희귀한 연구 분야에 종사하다보니 생기는 어려움들도 생동감있게 전달하고 있다.

주로 무인도에서 연구를 많이 하는데 그러다보니 물자나 인프라가 없어 고생한 이야기들이 특히 인상깊었다.

밤에 연구를 하다 귀에 벌레가 들어가서 죽을 뻔한 이야기나 선착장이 없어 수십미터를 헤엄쳐 가야하는 이야기 등

마치 '정글의 법칙'을 보는 듯한 사례들도 많았다.


(pg 75)


최근들어 경기가 좀 침체되었다고는 하나 일본은 그래도 선진국이라는 이미지가 있는데 그 곳에서도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생생한 오지를 경험할 수 있다니 새로운 느낌도 들었다.

화산 활동으로 인해 연구지가 통째로 용암에 잠기는가 하면, 화산 활동으로 인해 새로운 연구지가 생겨나기도 한다.

간척사업 말고는 일평생 지도가 바뀌는 일이 없는 나라에서 살다보니 그런 것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동물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환경 문제에 대한 시각도 몇몇 챕터에 걸쳐 서술하고 있다.

그 중 멸종위기에 처했던 '빨간위기흑비둘기'의 개체수를 다시 증가시킨 사례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

한 종이 멸종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며 이를 다시 복원하는 데에는 상당히 많은 노력과 비용이 든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만약 사회에 좀비가 만연한다면 우선 살아남는 게 최우선이지 환경 보전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굶고 있는 가족을 위해서라면 설령 멸종 위기종의 마지막 한 마리라 해도 잡아먹음으로써 주린 배를 채울 것이다.

환경 보전은 경제나 치안 모두 안정된 사회에서나 안심하고 추진할 수 있는 것이다. (pg 171)


앞서도 말했지만 조류학은 독으로도 약으로도 쓸 수 없는, 고상한 연구 분야이다.

새가 무엇을 먹든 어디를 날든, 사회나 경제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

덕분에 일반 영리 기업에서 연구에 몰두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분야이기 때문에 연구에는 세금이 투입된다. 국민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

성과를 논문으로 만들어 공개함으로써 세상에 환원하는 것은 연구자에게 주어진 당연한 의무이다.

그러나 학술 잡지는 과학의 발전에는 기여하지만 일반인의 눈에 띄는 일은 거의 없다.

실질적인 스폰서인 국민이 성과물을 볼 기회가 없는 것이다. (pg 182)


당연한 이야기지만 '조류학'이라는 것이 일반 대중들에게 피부로 와닿는 부분은 거의 없을 것이다.

위에 저자가 밝힌 것처럼 학술 잡지에 실릴 논문도 물론 필요하지만 이 책처럼 일반 대중들이 쉽게 연구성과를 접할 수 있게끔

해주는 것도 국민의 혈세로 연구를 진행하는 연구자들의 책무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나도 어릴 적 새와 물고기를 너무 좋아해서 도감 속 새와 물고기 종류를 달달 외우고 다녔지만,

막상 그것을 먹고 사는 직업으로 연결시킬 생각은 꿈에도 못했다.

이제는 다 까먹어버린 이름들이지만 이 책을 보면서 어릴 적 생각이 많이 났다.

뼛속까지 문과충인 내가 조류학 전공자가 될수는 없었겠지만 조금이나마 조류학자의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쯤이면 응당 평점을 다섯 개 줘야 마땅할 것 같으나, 하나는 편집상의 문제로 제하였다.

요즘 책 답지않게 자잘한 오타들이 너무 많아서 책의 빛을 좀 가리는 것 같다.

(위에 예시로 든 75페이지 캡쳐에서도 '발휘하다는'이라는 오타가 들어 있다.)

책의 2쇄, 3쇄가 나온다면 꼭 오탈자 검수는 다시 해주기를 바란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재미있어서 주말에 놀아달라는 애도 무시하고 만 하루만에 다 읽어버린 책이다.

저자가 일본인이므로 일본 문화(특히 일본 만화나 드라마)를 잘 안다면 웃을 수 있는 포인트가 더 많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저자의 다른 책들이 있나 검색해봤는데 국내 온라인 서점에서는 뜨지 않았다.

이 책이 인기를 끌어 다른 저서들도 번역되어 나와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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