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즈번즈
박소해 지음 / 텍스티(TXTY)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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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로맨스, 치정, 복수, 오컬트, 범죄가 다 들어있는 종합선물세트를 선물로 받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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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즈번즈
박소해 지음 / 텍스티(TXTY)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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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은 성공했다. 이제 해방은 우리의 것이다.

적산가옥 이야기라고 하고, 조예은 작가가 추천사도 쓰셨길래, 나는 당연히 조예은 작가의 [적산가옥의 유령]을 생각했다. 스릴러겠거니 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요즘의 내 집중력 대비 상당히 두꺼운 책이었기 때문에 겁을 먹었는데, 몇 장 읽다 보니 책에 빨려 들어가 쉴 새 없이 책을 넘길 수 있었다.

읽는 내내 “뭐?”,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지금 뭘 읽고 있는 거지?“란 말들이 육성으로 튀어나왔고, 미처 책을 다 읽기도 전에 친구에게 읽어보라고 추천했다.

일제 식민지 시절부터 해방 후 3.8선이 그어지고, 제주 4.3건과 여순사건도 다루고, 한국전쟁 중 피난을 가다 다리가 폭파되어 사망하거나, 식량이 없어 굶어 죽는 모습들이 생생히 그려져 그 당시의 생활상이 눈에 보이는 듯했고, 절정으로 치닫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와중에도 당시 사람들이 겪었을 고통을 모른척하지 않았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수향은 흔히 떠올리는 그 시대의 여성상과는 전혀 다르다. 연약해 보이지만 결코 순종적이지 않고,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끝내 홀로 서는 쪽을 선택한다. 그 과정에서의 선택들은 계산적이고 냉정하며, 때로는 범죄의 경계에까지 닿는다. 그렇다고 그녀를 쉽게 ‘나쁜 여자’라 부르기에는, 이 모든 이야기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힘이 분명히 수향에게 있었다.

그런 수향의 고통과 적산가옥에 얽힌 이야기를 오컬트로 풀어낸 방식은 지루할 틈이 없었고, ‘반전’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전개 끝에 “둘 다 저예요.”라는 대사에서는 징으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 책을 크리스마스에 읽었다.

한국의 역사, 로맨스, 치정, 복수, 오컬트, 범죄가 다 들어있는 종합선물세트를 선물로 받은 기분이었다.


😀 해당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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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중 - 제13회 제주4.3평화문학상 수상작
김미수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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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해림을 만나면 할 말을 되뇌어본다. 하도 오래 생각해서 외울 것 같은 말들, 해림아. 얼마나 아프니. 아팠니. 이제 만나 고국에 가는 배를 탈 수 있다면, 치유받고 치유하고 그렇게 살자. 이런 몸으로 가도 될까요? 그렇게 묻던 해림의 얼굴이 납덩이 같았다. 군인들이 흘린 핏물로 붉어졌던 바다가 새벽이 되자 푸르게 다시 출렁이더라고, 온 파도를 일으켜 아침 햇빛을 빨아들이려고 반짝이더라고 . 푸르게 설레도라고 말해주었던가. 

… 

아플 때의 너를 다 봤으니 그 상처를 내가 가장 잘 어루만져줄 수 있을 거라고. 내민 손 잡기만 하라고.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소설은 많이 봤지만, 남양군도를 무대로 한 한국 소설은 처음이라 거의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에 조선인들이 강제 동원됐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휴양지로 알려진 팔라우 같은 섬의 아름다운 풍경과 아무런 죄도 없이 끌려가 그 누구의 사과도 받지 못한 채 목숨을 잃어가는 사람들과 위안소에서 몸이 터져나가도록, 살아도 산 것이 아닌 것 같은 시간을 버티고 있는 소녀들의 모습이 도저히 겹쳐지지가 않아 읽는 내내 괴로웠다.

이 소설은 같은 동네에서 자라 서로 얽혀 있던 종태, 이옥, 순이, 해림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전쟁의 고통을 더욱 가까이 느끼게 한다. 어떤 장면들은 너무 생생해서 잠시 책을 덮고 숨을 고르게 될 정도였다.

또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뿐 아니라, 일본인인 척하며 조선인을 전쟁터로 몰아넣는 조선인, 죄책감에 흔들리는 일본인, 책임을 회피하려는 미국인까지 등장해,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 속 인간 본성의 결을 여러 방향에서 보여준다.

누군가의 고통만을 평면적으로 그리는 대신 다양한 위치의 인물을 등장시켜 전쟁을 입체적으로 드러낸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우리 일을 없었던 일로 하면 안 되지. 엄연히 있었던 일이니까. 그러니까 지유 같은 젊은이가 나서서 되살려줘.”

위안소에서 버티며 살아남은 해림 할머니의 이 말은 제일 남는다. 과거를 잊고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에게, 기억을 이어가는 일이 왜 필요한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어둡고 아픈 이야기였지만, 누군가의 삶을 다시 불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이야기였다. 이런 작품들을 앞으로도 더 많이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 해당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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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임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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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온 힘을 모아 크고 또렷하게 엘리네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숨길 수가 없었다. 내 목소리에 깃든 떨리는 사랑 같은 것을, 혹은 갈망 같은 것을, 엘리네의 이름을 부르는 내 목소리는 간청하는 것 같았지만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결코, 그렇게 소리가 나왔을 뿐, 어쩔 수가 없었다. 그토록 큰 갈망, 그토록 오래된 갈망이, 내 안에 쌓여 더는 안으로만 간직할 수 없었기에 내가 방금 막 엘리네라는 이름을 부를 때 그 이름 속에 스며들었던 것이다. 내가 엘리네라는 이름을 혼잣말로 중얼거린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남들 앞에서는 거의 한 번도 말하지 않았고, 적어도 엘리네 앞에서는 절대 부르지 않던, 그녀에게 직접 부른 적은 없던 그 이름을, 이제 나는 불렀다, 처음으로, 그리고 엘리네라는 이름이, 사람들이 말하듯, 마치 공기 중에 맴도는 것 같았다, 오래도록 맴돌았다, 영원처럼 오래도록, 그렇게 느껴졌다.


총 3부로 나누어진 이 소설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 도시 [바임]을 배경으로 한다. 1부는 ’야트게이르‘가 화자로 등장해 짝사랑하던 여인 ‘엘리네’와의 재회를 이야기하고, 2부에선 야트게이르의 유일한 친구였던 ‘엘리아스’가 화자가 되어 야트게이르와의 만남을 이야기한다. 마지막 3부에선 엘리네의 남편이었던 ’프랑크‘가 화자가 되어 엘리네와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재회를 이야기한다.

굳이 필요도 없는 바늘과 실을 사려고 대도시에 갔다가 사기를 당해 돈을 잃고 상심해 있던 야트게이르. 누군가 배의 문을 두드린다. 문을 열자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여인 엘리네가 있다. 남편과의 삶에 지쳤다며 얼른 자신과 함께 바임으로 돌아가자는 그녀를 보고 고민하던 야트게이르는 결국 엘리네와 함께 바임의 집으로 돌아간다. 엘리네가 나타나고 나서 계속 속으로 “도망쳐! 그 여자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아!” 하는 생각으로 읽어나갔다. 오랫동안의 고독에 지쳐서일까? 의심 한 번 하지 않고 그녀와 함께 떠나는 야트게이르가 사실은 이해되지 않았다.

2부에선 야트게이르가 엘리네 다음으로 많이 언급한 엘리아스의 시점이 되었는데, 2부의 거의 대부분이 엘리아스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어 특이했고, 밖에 나가서 알게 된 야트게이르의 죽음은 그를 한층 더 고독하게 만들어주는듯했다.

3부를 읽으면서는 도대체 이 여자는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같은 느낌인가. 술집에서 처음 보는 남자를 프랑크라고 부르며 다가가는 엘리네의 모습을 그렸는데 도대체 엘리네는 뭘까? 고독한 바다에서 어부를 홀리는 세이렌 같은 느낌이랄까? 프랑크를 떠나 야트게이르에게 갔다가, 그의 죽음 이후 다시 프랑크에게 돌아와 바임으로 가자고 말하는 엘리네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녀가 남기고 가는 빈자리에서 더 짙어지는 고독을 보며, 이게 작가가 말하고 싶은 사랑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나의 고정관념일지 모르지만 도시들을 설명할 때도, 엘리네라는 이름의 배를 설명할 때도, 북유럽 특유의 스산함이 느껴졌다. 그 분위기가 야트게이르, 엘리아스, 프랑크의 고독을 더 짙게 보이게 했고, 마치 겨울의 회색빛이 인물들 주변에 가라앉아 있는 듯했다.

크나큰 사건사고 없이 잔잔한 호수처럼 흘러가는 이야기와 작가가 가진 독특함에 초반엔 어떻게 읽어야 할까 고민하기도 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라 무언가 더 있을 것 같은 느낌에, 뭔가 내가 더 느껴야 할 것 같고 숨겨놓은 뜻이 있을 것 같은데 이렇게 납작하게 이 소설을 읽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냥 흐름대로 따라가다 보니 그 담백한 결이 오히려 재미로 다가왔다.

선명한 사건도 없고, 인물들도 뚜렷하게 규정되지 않아서 처음엔 낯설었지만, 오히려 그 흐릿함 덕분에 책을 덮고 난 뒤 더 많은 생각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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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슨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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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대 중반이 되면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묻기 시작해야 한다. 장기간에 걸친 격동의 청년기가 끝났으니까. 자신의 배경을 핑곗거리로 삼을 시기도 지났다. 무능한 부모님? 애정결핍? 지나친 애정? 이제 그만, 더 이상 핑계 대지 말자. 너에겐 십여 년 넘게 사귄 친구들이 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사랑과 이별도 해봤을 것이다. 혼자 유익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을 것이다. 너는 공적인 삶이 어떤 것이고 자신은 그 삶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알고 있다. 너에게 주어진 책임이 너를 압박하고 자신을 규정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부모 노릇도 얼마간의 실마리를 던져줄 것이다. 그의 바로 앞에 주름진 얼굴로 서 있는 인물은 말로가 아니었다. 마흔 살의 그 자신이었다. 너는 이미 자신의 몸에서 죽음의 초기 징후를 보았을 것이다. 허비할 시간이 없다. 이제 너와 분리된 독자적인 자아를 만들어 너 자신을 평가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완전히 틀릴 수 있다. 어쩌면 이십 년을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 그리고 그때도 헤맬 수 있다.

영문학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이언 매큐언의 열일곱 번째 소설. 워낙 유명한 작가라 이름은 들어봤지만 이 작품으로 작가를 처음 만나게 됐다.

이 소설은 총 3부로 구성되는데, 1부에선 어린 시절의 롤런드를 만날 수 있다.

기숙학교에서 피아노를 배우며 경험한, 평생의 트라우마가 된 기억이 중심이다.

2부에선 앨리사와 사랑에 빠진 청년 시절의 롤런드를, 3부에선 로런스가 자라서 부모의 곁을 떠나게 된 노년의 롤런드를 만난다.

사실, 난 굉장히 보수적인 유교걸이라 14세 롤런드와 25세 코넬 선생님과의 ‘로맨스’라 부르기도 싫은 그 부분이 너무 읽기 힘들었다. 사랑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도 불편하고 역겨운 장면들. 코넬 선생님은 롤런드 못지않게 나를 힘들게 했다. 이 책을 계속 읽어야 하나 매우 고민했지만, 롤런드가 정신 차리고? 코넬 선생님을 떠나고 나서부턴 그래도 술술 읽혔다.

자전적 색채가 짙은 작품이지만 회고록은 아니고, 실제로 선택하지 않은 삶에 대한 상상을 바탕으로 쓰였다고 한다(옮긴이의 말, 690쪽). 40대가 되어 과거를 돌아보는 롤런드의 모습이 유난히 와닿았다.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70세가 넘을 때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만큼 2차 세계대전부터 동독 사람들의 힘든 생활, 베를린 장벽 붕괴, 체르노빌 방사능 유출 사건, 그 외 크고 작은 국제 사건들과 코로나로 인한 봉쇄까지 다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읽어나가는 재미가 있었는데, 내가 세계사와 영국사를 조금 더 알고 있었다면 훨씬 재미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한동안 책을 거의 못 읽었는데, 초반엔 피아노 레슨 때문에 힘들었지만 이런 큰 스케일의 소설을 오랜만에 읽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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