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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엉킨 실타래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그 끝이 어디를 향하는지도 모른체 실을 따라가다가 발부리에 채인 돌덩이에 고개를 들었다. 그 앞에 거대한 벽이 놓여 있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는 동안 내내 이런 기분에 휩싸였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만들어 놓은 세계에 빠져들어 한 글자씩 따라가다보니 주변에 있는 것들이 전혀 보이지 않고 오로지 그가 만들어 놓은 거대한 벽만 보였다. 그렇게 책을 읽던 중 소설에 등장하는 벽이 마치 삶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수없이 만나게 되는 웅장한 벽을 그의 소설을 읽으며 떠올릴 수 있었다.
해가 갈수록 늘어가는 것은 불안감이었다. ‘이맘때쯤이면 이런 것들을 했어야 하는데 나는 여전히 반도 못 왔구나.’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꾸 옆 사람을 곁눈질하며 그들이 이루어 놓은 업적에 나의 성과를 비교했다. 그때부터 나에게는 성장과 성공에 대한 조급함이 함께 자랐다. 불안함을 지우기 위해서 그동안 자기계발서 위주의 책만 읽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업무에 관한 책과 지금의 나를 한 단계 점프시켜 줄 수 있을 것 같은 책만 읽었다. 시나 소설을 읽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삶이 무미건조해지고, 기계적으로 바뀌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로지 성장과 발전만이 40대를 살고 있는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인 것만 같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만났다.
처음부터 그랬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벽은 우리의 삶이자 미래인 것처럼 보였다. 작가가 만들어 놓은 가상 세계 속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막닥뜨리는 벽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면서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불확실한 벽에 둘러싸인 도시는 바로 우리의 인생 그 자체인 것이다. 도망치고 싶어도 쉽게 도망칠 수 없고 때로는 현실을 피해 어딘가로 숨고 싶어하는 곳, 모두가 될 수 있다.
주인공인 ‘나’는 17살, ‘너’는 16살에 만나 사랑을 알아간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해 주는 가장 다정하고 친근한 ‘너’를 ‘나’는 사랑한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아픔으로 주인공은 평생 외로움 속에서 살아간다. 사랑을 하고, 사회 생활을 해도 진실된 마음을 찾지 못한다. 결국 ‘나’는 ‘너’와 함께 만들었던 그 불확실한 벽으로 둘러 쌓인 도시를 찾아간다. 오로지 ‘너’를 만나기 위해서 자신의 분신인 그림자를 버리고, 자신에게 상처를 내면서까지 ‘너’를 만나기 위해 고통을 감수한다.
책을 읽는 동안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현실과 가상 세계를 번갈아 가며 진행되는 이야기 구조로 인해 무라카미 하루키가 만들어 놓은 세계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책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분명 소설 속 화자는 차분하고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 하는데 책을 읽고 있는 나는 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옴짝달싹 못할 지경이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는 그림자와 벽, 너, 문지기, 단각수, 웅덩이, 도서관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소설을 이해하고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낱말들이 감싸고 있는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 책을 읽는 내내 작가가 만들어 놓은 수수께끼를 푸는 듯한 느낌이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이야기가 전개되는 거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라는 궁금증에 마치 흥미진진한 추리소설을 읽는 것만 같았다. 수수께끼를 풀어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찾고 싶은 열망이 강해졌다. 그러다 문득 주인공인 ‘나’가 그 불확실한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로 들어간 시점이 눈에 밟혔다. 40대, 딱 중년의 나이였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감이 극으로 치닫는 나이가 40대임을 몸소 체험하고 있기에 소설 속 ‘나’의 마음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40대가 되면서 나 또한 꿈을 찾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이뤄놓은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서 주변을 기웃거리며 타인의 꿈을 곁눈질 했다. 소설 속 ‘나’가 도서관에서 다른 이들의 꿈을 들여다 보며 ‘꿈 읽는 이’가 된 것처럼 말이다. 그에게서 미래라고 하는 불확실한 벽 안에서 꿈을 찾고자 고군분투하던 내가 보였다. 그즈음 우울감과 번아웃이 연이어 왔고,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멈추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주인공인 ‘나’가 그림자를 떼어 놓고 도시로 들어가서 오로지 타인의 꿈만 읽었던 것처럼 말이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는 동안 영화 몇 편이 떠올랐다. ‘매트릭스’와 ‘인터스텔라’ 그리고 ‘인셉션’이다.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꿈과 현실, 허구와 진짜 세상과 시간의 영속성이다. 책 표지를 유심히 살펴 보았다. 검은 색 홀 안에 살짝 숨겨진 또 다른 행성이 보인다. 이 홀을 통과하면 다른 세상으로 연결될 것만 같다. 초록색 겉표지를 벗기자 그 안에 신비롭게 숨어 있던 또 다른 표지가 보인다. 마치 빛이 산란하는 듯 오색찬란한 선들의 향연이 보인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봤음직한 장면이다. 모든 사물이 빛으로 번져 뚜렷한 형태가 없다. 형태란 바깥 세계에서가 아니라 그 세계에 온전히 속할 때만 의미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소설 속 ‘나’가 불확실한 벽으로 둘러쌓인 도시로 들어갈 때 만났을 것 같은 빛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책은 나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그림자를 찾는다는 것의 의미는?’, ‘어디에서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가?’, ‘행복의 조건은?’처럼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나에게는 무늬만 소설인 철학책이었다. 한 페이지씩 읽으며 공책에 질문을 적어 내려갔다. 사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은 곧 ‘나’의 또다른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7살에 만났던 16살의 ‘너’도 ‘나’이고, 문지기와 노인도 모두 ‘나’다. 이를 유일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림자는 ‘나’의 메타인지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아우르고 주인공인 ‘나’가 상황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에서 그림자를 찾는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0대의 나이는 한창 사춘기를 보내며 인생에 대한 질문을 쏟아내는 시기이자 ‘나’는 누구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탐구하는 첫 번째 시기다. 그리고 40대는 인생에 있어서 두 번째 사춘기를 보내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삶, 또 다른 나를 고민한다. 주인공인 ‘나’는 그렇게 두 번째 사춘기를 지나는 시점에서 도시로 찾아 들어간 것이다. 진짜 나를 찾기 위해서 말이다.
그림자와 함께 도시를 탈출하기 위해서 웅덩이를 찾아가던 장면이 귓가에 맴돈다.
책 206쪽 인용)
“들으면 안 돼요. 그림자가 등뒤에서 속삭였다. 보는 것도 안 됩니다. 그저 환영이에요. 도시가 우리에게 환영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눈을 감고 이대로 돌파하는 겁니다. 상대의 말을 믿지 않으면, 두려워하지 않으면, 벽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요.
나는 그림자의 말대로 눈을 질끈 감고 그대로 전진했다. 벽은 말했다. 너희는 벽을 통과하지 못한다. 설령 하나를 통과하더라도 그 너머에 다른 벽이 기다리고 있다. 무슨 짓을 하든 결과는 똑같아.
듣지 마요. 그림자가 말했다. 두려워해서는 안 돼요. 앞을 향해 달리는 겁니다. 의심을 버리고, 자신의 마음을 믿고.”
어쩌면 이 부분이 무라카미 하루키가 우리에게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싶다. 인생을 살면서 수없이 많은 벽을 만나겠지만 두려워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이다. 의심을 버리고 자신의 마음을 믿고 당당하게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이 책에 담은 것 같다.
사실 리뷰를 쓰고 있는 이 시점에도 책의 결론을 모른다. 책을 완성하는데 43년이 걸렸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작가가 긴 삶의 시간으로 완성한 책을 단숨에 읽는 것 보다는 나도 시간을 내서 천천히 읽고 싶어졌다. 책을 아껴가며 읽고 싶어졌다. 그래서 매일 소화하고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만큼씩만 읽고자 한다. 그렇게 찾은 의미를 내 삶에 적용해 볼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나에게 시간을 선물하는 책이 되었다. 빨리 읽길 채근하지 않는 책이다. 앞으로 이 책을 읽으며 소설 속에서 길어올릴 나의 성찰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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