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배움의 주인이 되는가 - 학습자 주도성과 생성 교육
정기효 지음 / 비비투(VIVI2)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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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계일까? 강의준비를 하지 못하는 시간이 될테니 읽고 싶었던 책을 읽자는 생각. 

그래서 잡았다. 제목이 많이 끌렸던 책. 읽다보니 저녁과 다음날 오전까지 해서 끝. 


사유의 전반적인 흐름에 매우 공감했다. 

책이 이론과 실제 모두 담겨 있어서 교사들은 만족하며 읽을 것 같다. 

철학부터 인식론, 인간론까지 조금조금 채워가는 저자의 글이 그동안의 고민을 잘 보여준다. 

학생의 배움주도성에 대한 저자의 고민. 이를 풀어나가려는 노력. 모두 고마웠다. 

어딘가 같은 고민의 결을 보이는 교사가 있다는 것은 언제나 큰 힘이 되기에.. 

교사라면 한번쯤 일독을 권한다. 


몇가지 더 짚어본다면... 이 책은 그렇게 친절한 책은 아니다. 

저자가 철학적 훈련이 된 사람인 듯, 초반 ‘주도성’을 정의하기 위해 끌어가는 논리와 

이를 나타내는 단어들은 철학적 사유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어색할 수 있다. 


학교급이 초등이다. 

사실 여러가지 학습자 중심 교육관련 사례나 책들이 거의 대부분 초등에서 나온다. 

물론 이 말은 학습자 중심 교육에 대한 중고등 사례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상당히 많다. 

다만...내가 안타까운 건 교사들의 인식 자체가, 초등과 중고등의 차이가 매우 크다는 데 있다. 

교사들은 하려는 마음이 큰데 교육청과 제도의 문제가 크다는 뉘앙스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다. 


어쨌든! 중요한 건 이 책이 정말 필요한 책이라는 것. 

중고등 교사들도 초등이야기라고 치부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학습자 중심 교육은 새로운 게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배제한 인간의 한 측면’을 잘 드러내는, 

정말 중요한 흐름이다 (한 측면이다. 학생을 구성적으로만 보는 것도 모자르긴 매한가지다).


동료 교사들이여. 읽읍시다. 요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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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배움의 주인이 되는가 - 학습자 주도성과 생성 교육
정기효 지음 / 비비투(VIVI2)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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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적 고민이 표면화되고 가벼워지는 요즘,
꼭 필요한 책이라 본다. 많은 교사들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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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일상이 예배가 되다
토니 라인키 지음, 오현미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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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상과학미술대회’. 필자처럼 80년대 중후반을 초등학교(그 때는 국민학교였다) 시절로 보낸 사람들은 학교에서 흔하게 듣고 참여했던 대회다. 크레파스를 든 아이자기한 손들은 저마다 자기들이 꿈꾸는 미래를 4절지 도화지에 그리곤 했다. 물 속 도시, 날아다니는 자동차, 한 끼 식사를 대신하는 알약 등 학생들은 달라도 어느 정도 공통점을 갖고 있는 그림들이었다. 그 중 거의 모든 학생들이 그렸던 미래는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하는화상통화였다. 벽에 달린 큰 화면으로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장면. 그 때는 정말 그게공상’, 상상이었다. 그 후로 20년도 채 지나지 않아 2차원 4절지에만 그려졌던 그것이 물성을 갖추고 수많은 사람들의 손에 들려있다.

스마트폰. 그 이름처럼 성능도 뛰어나다. 1969년 아폴로 11호를 달로 보냈던 IBM 컴퓨터는 고철 취급이 될 정도의 성능을 갖춘 컴퓨터를, 우리는 대부분 손에 들고 다닌다. 사실 스마트폰의 소유는특혜. 스태티스타(statista.com)에 따르면 2020년 스마트폰 보급대수는 약 35억대로 전 세계 인구의 44.9%가 스마트폰을 소유한 것으로 본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물건으로 대부분 통화를 하고, 사진을 찍고, 문자도 보내며 SNS를 확인한다. 상상속에만 있었던 그 물건, 인간 중 2명에 1명도 채 갖지 못한 물건, 우주선을 달로 보내고도 남는 능력을 가진 이 물건을 가지고 우리는 그러고 있다. 괜시리 자괴감이 몰려온다. 이래도 될까 싶다. 물론 이건 나만의 고민은 아니다. ‘, 오늘도 망했구나하는 마음으로 낭비한 시간을 후회하며 휴대폰을 바라보던 그 모든 사람들의 고민이다. 그러던 중 2020 2월에 발견한 책이 <스마트폰, 일상이 예배가 되다>였다. 이런 나에게 이 제목은 마치 망치같았다. 일상이 예배라니. 그것도 스마트폰으로 말이다. 이 저자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가.

저자인 토니 라인키(Tony Reinke)는 한국의 독자들에겐 생소한 작가다. 그도 그럴 것이 본서가 그의 책 중에 처음 번역된 책이다. 하지만 이 저자, 정말 흥미롭다. 일단 라인키는 ‘DesiringGod.org’에 정기적으로 글을 올리는 작가다. ‘Desiring God’은 존 파이퍼(John Piper)목사의 설교 및 아티클 등 여러가지 자료를 제공하는 사이트이기 때문에 나와 같이 전통신앙과 개혁신앙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겐 익숙하다. 라인키가 저술한 <Newton on the Christian Life: To Live Is Christ> 역시 그 시리즈(존 오웬, 마틴 로이드 존스, 어거스틴, 헤르만 바빙크 등) 자체가 개혁신학적 맥락에 있으며, <The Joy Project: An Introduction to Calvimism> 또한 개혁신학을 바탕으로 존 파이퍼의 기독교 희락주의(Christian hedonism)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그의 신학적 입장은 확실하다. 이렇게 전통적 신앙에 뿌리내린 저자가 관심을 두는 영역이 또 하나 있다. 바로 현시대의 미디어다. <스마트폰, 일상이 예배가 되다>와 더불어 <Competing Spectacles: Treasuring Christ in the Media Age>를 보면 알 수 있듯이개혁신앙미디어는 저자가 붙들고 있는 두 축이다. 후에 보겠지만 라인키는 이 두 축을 분리한 채 두지 않는다. 저자의 배경을 봐도, 한국어로 번역된 제목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어쨌든 이 미디어 시대에 스마트폰 문화를 통해 하나님을 더욱 잘 알고 기뻐하며 예배하길 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서에서는 이 두 축을 어떻게 제시하며 요리했을까.

본서는 원제(12Ways Your Phone Is Changing You)에서 말하듯 서론을 제외한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비문학 서적이라는 게 발췌독이 가능하긴 하다만, 본서는책머리에서론으로 시작하여 순차적으로 읽는 것이 독자에게 유익하리라 본다. 저자는 장들을 통해스마트폰이라는 기기와 그로 인한 문화 전반을 언급하는 데, 그 전에 책머리를 통해나도 당신과 다를 바 없이 후회로 점철된 사람이다!”를 외치며, 서론을 통해기술(저자가 말하는테크놀로지매우 넓은 개념이다)’ 자체를 간단히 언급하기 때문이다. 독자는 책머리를 통해 급작스러운 위로와 공감을 얻게 될 것이며 책에 대한 기대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서론을 통해서는 시대의 현상을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되고, 기술에 대한 간략하지만 중요한 신학적 관점을 얻게 될 것이다. 특별히 스마트폰이라는 특정 기기를 언급하기 앞서 저자가 말하는기술의 넓은 의미를 그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 그래서 책머리와 서론은 읽는 독자로 하여금 기분 좋은 독서의 출발을 돕는다.

이제 본격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보자. ‘1장 집중력을 흐트러뜨리는 것에서 벗어나라 ‘2장 피와살을 지닌 사람들을 소중히 여겨라는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게 되는 고민을 각각 다루고 있다. 어느 날 문득, ‘내가 SNS를 너무 많이 하는 게 아닌가?’, ‘카톡방이 왜 이렇게 많지?’라고 느낀 적이 없는가. 나는 그랬다. 수많은 카톡방에서 울려대는 알림들이 나의 일과 시간을 갉아먹고 있다는 생각. SNS의 끝없는 포스팅을 아무런 초점도 없이 바라보며 넘기고 있는 나를 인지할 때, 내가 해야 할 일이 이미 기억 저편에 있다는 걸 깨닫는다. 더 나아가 얼굴과 얼굴을 대면한 적도 없는 사람들과의 만남, 거기로부터 시작하는 피상적 만남에 대한 고민 또한 얼굴을 든다. 저자는 정확하게 이 부분을 지적한다. 물론 기독교적 해석도 놓치지 않고 말이다.

1장과 2장이 현상에 좀 더 초점을 두었다면, ‘3장 우리는 인정받기를 갈망한다는 우리의 내면에 방점을 둔다. 필자도 올려 놓은 게시물에좋아요숫자가 얼마나 찍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시도때도 없이 페이스북 어플을 눌러 댔다. 3장은 그 모습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도록 돕는다.

4장과 5장은 스마트폰 시대에 우리가 잃을 수 있는 것들에 방점을 둔다. ‘4장 읽기능력을 회복하라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우리가 스마트폰 시대에 자연스럽게 잊어버린읽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스마트폰을 통한 디지털 정보, 특별히 글로 전달되는 정보를 읽는 것과 종이에 인쇄된 글을 읽는 것의 차이점을 통해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많은 사람이 공감하듯이 스마트폰으로 글을 읽게 되면 대충 훑어보는 정도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스마트폰의 스크롤을 연신 내리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이는 앞서 언급했던 기술, 그 기술에 따른 인간 생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천천히, 깊이 있게 읽는 것을 잊지 말자고 주장하며 특별히 기독교인의 읽기가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떤 중요성을 갖는지 이야기해준다.

계속해서 저자는 ‘5장 보이지 않는 것을 기뻐하라를 통해 우리가 찍는 사진, 포스팅하는 내용을 다시 돌아보고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끊임없이 사진을 찍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터넷에 올리는 글(특히 SNS)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자신의 모든 콘텐츠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가? 독자들은 이 장을 읽으면서 습관처럼 포스팅하는 모든 내용들의 더 깊은 의미들을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전체 12장 중 중간에 위치한 ‘6장 우리는좋아요한 것을 닮는다는 우리의 시선을 내면의 가장 깊은 곳으로 이끌어간다. 저자는 스마트폰 중독의 핵심을자기 자신 바라보기 중독이라고 제시하며 이를 디지털 나르시시즘으로 명명한다. 이 장은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6장을 통해 독자를 가장 깊은 곳으로 이끌어 들이고, 이 후부터 점차적으로 끌어올려 스마트폰의 유익한 사용에 대해 방점을 두기 때문이다. 책에 명시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독자는 이 장을 통해 사람이 사랑하는 존재라는 것, 그 사랑의 방향성과 대상이 자기 자신을 형성해가는 근원이라는 걸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6장은, 스마트폰 시대에서 우리가 진정 지향하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고민하도록 돕는다.

7장 참된 고독은 영혼을 채운다 SNS를 통해 쉼없이 만남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다룬다. 그렇게 많은 만남의 홍수 속에서 오직 스마트기기와 사용자 자신만 남는 모순 속에서, 저자는 대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고 만들어가는 피와 살의 만남은 스마트폰이 제공하는 쿨한 만남과는 대조적이다. 저자는 이렇게 타인과의 불편한 접촉이 갖는 가치와 의미를 상기하도록 돕는다. 물론 기독교적 가치의 토대 위에서 말이다.

8장 은밀한 유혹에서 시선을 돌리라 7장에서 이야기한, 스마트폰으로 인해 홀로 남게 되는 사람들이 갖게 되는 유혹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저자는 디지털 소비주의가 제공하는 끊임없는 이미지(보는 사람들을 소비자로만 간주하는 사진, 영상 등)에 맞서 보이지 않는 것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기독교 신앙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관한 믿음이다. 저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집중했을 때, 보이는 모든 이미지들이 하나님의 영광 아래 더욱 선명해진다고 말한다.

“신실한 시선으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영광을 지각하며 거듭난 마음으로 그 모든 영광을 포용해야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실제로 농밀해진다.”(179).

9장 잃어버린 의미를 되찾다에서는 앞서 이야기한 디지털 소비주의의 말초적인 컨텐츠들의 가치를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있는 미디어 리터러시, 그 중에서도 비판적 관점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달고 짜기만 할 뿐 아무 영양가 없는 정크 푸드”(188)들 속에서 우리의 몸과 영혼에 유익한 컨텐츠들을 가려낼 수 있는 능력. 정신없이 빠르게 흘러가는 정보들 속에서 속도를 늦춰 사고하는 지혜의 방법. 그렇게 우리는 읽어버린 의미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의미의 정점은 무엇일까? 저자는 10장을 통해 그것을 제시한다.

6장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조곤조곤, 차근차근 올라온 독자들은 ‘10장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다에서 정점을 만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 우리가 스마트폰을 통해 갖게 된, 우리의 죄성과 함께 버무려진 여러가지 FOMO(fear of missing out, 놓칠까 하는 두려움)들은 실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저자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FOMO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밖으로 떨어질 두려움을 제시하며 극적인 반전을 보여준다.

11장과 12장을 통해 독자들은 벌거벗은 느낌이 들 것이다. 정말 부끄럽고 창피하다. 모든 것이 나의 이야기다. 저자는 스마트폰을 통해 우리가 벌이는 수많은 일들에 대해 비교적 조목조목 성경의 기준을 들이댄다. 너무나 부끄럽고 창피하다. 그렇다고 기분이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11장의 제목처럼 성경을 통해사랑으로”, 회복을 위해 제시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은밀한 인터넷 세계에서 일어나는 남을 향한 비방과 중상모략, 거짓. 스마트폰에 비친 활자와 이미지, 영상에 빠져 주어진 시간을 흘려보내던 모습. 저자는 독자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도록 이 모든 내용을 매우 진솔하게 풀어낸다.

마지막으로 결론은 다시기술로 돌아온다. 마치 서론과 결론이 본론의 열 두 장을 감싸고 있는 듯하다. 저자는 다시 한번 기술의 넓은 관점에서 스마트폰을 조명하고 스마트폰 사용자들이 가져야 할 12가지 질문을 제시한다. 이 질문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에 맞게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있는가를 떠올리게 하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이와 더불어 스마트폰 사용자에게 제시하는 열두 가지 경계 또한 상당히 실제적이며 유익하다.

본서는 기독교신앙에 충실하다. 기독교인이 저술했다고 모두 기독교신앙에 충실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본서는 충실하다. 앞서 밝힌 것과 같이 저자가 활동하는 단체의 특성과 그의 저서가 말해 주는 바, 그의 신앙적 관점은 매우 확실하고 탄탄하다. 개혁주의적 관점을 따르고 있기에 신학적 고찰도 깊다(그런데 쉽다! 능력자다). 스마트폰이라는 보편화된 기술은 분명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을 변화시킨다. 저자는 이렇게 변화되는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을 각 장마다 하나님과의 관계로 연결시킨다. 저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도록 한다.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욕망이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가를 성찰하도록 말이다. 이 욕망의 정점이 하나님일 때, 우리는 피와 살을 가진 이웃을 좀 더 돌아보고 우리에게 주어진 기술의 혜택을 다시 하나님을 욕망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아는 바와 같이 개혁주의는 이 땅의 것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창조물은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성품과 태도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느냐 가리느냐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주의는 현실에 충실하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본서는 스마트폰 문화를 통해 인간의 본질과 타락, 창조와 그리스도의 영광까지 폭넓은 기독교 신앙의 스펙트럼을 펼쳐 놓는다. 기독교신앙은 현실도피의 수도원적 삶을 지양한다. 신앙과 현실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신앙이 삶이다. 그렇게 때문에 나의 살과 피가 맞닿아 있는, 실존적인 스마트폰 문화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주제다.

이런 면에서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생물학적으로 사고하는 데 무리가 없다면)연구해야 할 주제는 정말 많다. 본서와 연관하여 한 가지를 특별히 언급하자면, 자본과 기술의 문제도 그렇다. 이 책에서도 잠시 언급되었지만 이건 스마트폰만의 문제는 아니다. 신자유주의에 결탁되어 있는 자본들은 4차 산업혁명으로 부상한 기술 또한 자본의 축적을 위해 사용한다. 자본을 위한 기술은 자본을 따라 사용된다. 자본을 쌓기 위해, 자본을 가진 자를 위해 사용된다. 그래서 반대편의 소외를 낳는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에 있어서 소외는 자본력에 따라 합리화된다. 따라서 소외는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지 않으며 기술의 혜택은 자본을 가진 자들만의 소유가 된다.

저자의 말처럼 그리스도인이 살과 피를 가진 이웃과의 만남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면, 소외된 이웃의 기술을 통한 생존과 복지 또한 우리에게 맡겨진 과제다. 따라서 스마트폰의 이용을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처럼, 기독교인들은 첨단 기술의 개발이 모든 인간에게 유익이 되도록기술의 나눔에도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 더 나아가 본서가 개인의 생활에서기술의 선한 사용을 제시한 것처럼, 사회적인 관점에서 볼 수 있는기술의 선한 사용도 신자들의 고민에 포함되어야 한다. 물론 기술의 나눔과 기술의 선한 사용은 일정 부분 겹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의 기술을 표방하며 등장했던적정기술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초기 적정기술은 구식 기술을, 소위 후진국에 보급하는 역할을 하는 모습으로 비춰졌지만 현재는 UN이 발표한지속가능한 사회를 표방할 수 있는 좋은 예다.

읽는 내내 숨김없는 저자의 현실 묘사에 부끄러움을 느꼈고, 그에 따르는 성경적 해석, 관점은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본서는 분명 시대적 적실성을 가지고 있다. 더불어 좀 더 넓은 관점에서 기술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태도를 확장적으로 나눌 수 있는 여지도 충분하다.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본인을 위해서, 자녀를 위해서, 가르치는 학생들을 위해서 일독을 권한다. 물론 함께 읽고 나눌 공동체가 있다면 더 없이 좋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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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육의 기초
로버트 W. 파즈미뇨 지음 / 디모데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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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정말 중요한 책이다. 하지만!! 번역이 이렇게 엉망인 책은 처음이다.
이건 오역 문제가 아니라 한글의 문제다. 이 좋은 책이 이렇게 수준 낮은 글로 번역되다니..안타깝다.
번역자는 책임을 져야 한다. 편집은 뭘 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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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진짜 나일까? 모두를 위한 그림책 1
다비드 칼리 지음, 클라우디아 팔마루치 그림, 나선희 옮김 / 책빛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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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벽돌을 만들던 고대 벽돌공들은 자신이 만든 벽돌에 종종 페키트(fecit)’라고 새겨 넣었다. 제작자로서 자신이 만든 물건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제작자 의식이라서 그런지 페키트라는 말은 참 심오한 뜻을 담고 있다. “이 일에 내가 있었노라”. 이는 자신이 한 일을 통해 자신의 존재 자체를 드러내고 증명하는 일이었다. 진짜 내가 누구일까를 고민하기보다 진짜 내가 존재했고 지금 그 일을 했다고 밝히고 있던 것이다.


직장을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시간대는 일요일 저녁이다. 내일이면 직장에 나가야 한다는 생각때문에 월요병으로 함께 감염되는 직장인들의 보편적 시간. 그도 그럴 것이, 자기가 직장에서 하는 일이 무엇을 위한 일인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모른 채 보내는 시간은 당연히 즐거울 수 없다(그런데 괴로움을 느끼는 게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괴로움인지도 모른 상태에서 계속 일만 한다면, 그 때는 더 심각한 게 아닌가!). 일중독이 아닌 이상 직장일에 깊은 의미와 열정을 두는 게 힘들다. 정신없이 업무를 하다보면 스쳐가는 생각.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어떨까?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이 주요교과라 불리는 이유는 학생 자신이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대학 입학을 위한 기준이 될 뿐. 3이 되면 음악, 미술, 체육은 그 존재의 의미조차 사라져 버린다. 불쌍한 음미체. 그래서 수업 시간은 즐거울 수 없다. 주어지는 내용이 학생 자신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반듯하게 쌓여 있는 시간표 속에서 아무런 뜻 없이 책상에 앉아 의미도 모를 주어진 문제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풀이하는 학생들. 3년 만 고생하면 된다는 말에, 멈추지 않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풀이하고 풀이하고 또 풀이하는 학생들. 정신없이 풀이를 하다보면 스쳐가는 생각.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직장인의 업무나 학생의 문제풀이가 과도하게 쌓이다 보면 누구나 이런 상상을 한번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내가 두 명이라면……’. 두 명이 되고 싶다는 바람은 무엇을 기대하고 상상한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지금 해야 하는 그 일이 너무나 많은 나머지 일을 분배할 또 다른 나 자신을 바란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기대는 참 무섭고 불안하다. 단순히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자체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혹시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라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는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사람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했었다. 매일 짐승처럼 익숙한 일을 반복하는 사람, 아니말 라보란스와 노동과 행위를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는 사람, 호모 파베르. 쉽게 말해서 호모 파베르는 의미를 찾는 를 묻는 반면, 아니말 라보란스는 일에 함몰된 상태에서 도덕이나 윤리는 모른 채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만 묻는 존재다. 돌아보면 대부분의 우리 삶이 아니말 라보란스의 상태에 있다. ‘공부해야 하는지, ‘대학에 가야 하는지 모른 채, 대부분의 시간을 어떻게문제를 풀이할 것인가를 생각했었다. 졸업하면 끝일까? 이 직장에 다녀야 하는지, ‘이 일이 의미가 있는지에 관심을 두지 않은 채, 대부분의 시간을 어떻게일해야 할 것인가만 생각했었다. 직장이 끝일까? 결혼을 해야 하는지, 결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고민보다 어떻게결혼을 해야 하는지만 몰두한다. 결혼이 끝일까? 부부에게 자녀는 어떤 의미인지, ‘자녀를 키워야 하는지 숙고하지 않은 채, ‘어떻게키울 것인가에 집중한다.


물론 사람들에게 어떻게만 강요하는 사회적 구조도 문제다. 그래서 요즘은 더욱 를 묻기 힘들다. 하지만 어떻게는 함께 해야 한다. 이 둘은 서로를 완성시켜주기 때문이다. ‘어떻게만 있으면 의미를 잃고 부서져 버리며, ‘만 있으면 방법을 몰라 떠다니기만 한다. 이게 바로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의 상태와 같지 않을까. 장난 같은 말 속에 삶의 의미를 뒤져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고자 하는, 장난이라 치부하기엔 너무 무거운 뜻이 담겨져 있다. ‘어떻게를 통해 나의 존재를 묻는다.


앞서 나왔던 고대의 그 벽돌공이 우리 앞에 있다면,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당신은 페키트(fecit)를 새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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