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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진짜 나일까? ㅣ 모두를 위한 그림책 1
다비드 칼리 지음, 클라우디아 팔마루치 그림, 나선희 옮김 / 책빛 / 2017년 6월
평점 :
흙벽돌을 만들던 고대 벽돌공들은 자신이 만든 벽돌에 종종 ‘페키트(fecit)’라고 새겨 넣었다. 제작자로서 자신이 만든 물건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제작자 의식이라서 그런지 ‘페키트’라는 말은 참 심오한 뜻을 담고 있다. “이 일에 내가 있었노라”. 이는 자신이 한 일을 통해 자신의 존재 자체를 드러내고 증명하는 일이었다.
진짜 내가 누구일까를 고민하기보다 진짜 내가 존재했고 지금 그 일을 했다고 밝히고 있던 것이다.
직장을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시간대는 일요일 저녁이다. 내일이면
직장에 나가야 한다는 생각때문에 ‘월요병’으로 함께 감염되는
직장인들의 보편적 시간. 그도 그럴 것이, 자기가 직장에서
하는 일이 무엇을 위한 일인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모른 채 보내는 시간은 당연히 즐거울 수 없다(그런데 괴로움을 느끼는 게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괴로움인지도
모른 상태에서 계속 일만 한다면, 그 때는 더 심각한 게 아닌가!).
일중독이 아닌 이상 직장일에 깊은 의미와 열정을 두는 게 힘들다. 정신없이 업무를 하다보면
스쳐가는 생각.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어떨까?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이 주요교과라 불리는 이유는 학생 자신이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대학 입학을 위한 기준이 될 뿐. 고3이
되면 음악, 미술, 체육은 그 존재의 의미조차 사라져 버린다. 불쌍한 음미체. 그래서 수업 시간은 즐거울 수 없다. 주어지는 내용이 학생 자신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반듯하게
쌓여 있는 시간표 속에서 아무런 뜻 없이 책상에 앉아 의미도 모를 주어진 문제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풀이하는 학생들. 3년 만 고생하면 된다는 말에, 멈추지 않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풀이하고 풀이하고 또 풀이하는 학생들. 정신없이 풀이를 하다보면 스쳐가는 생각.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직장인의 업무나 학생의 문제풀이가 과도하게 쌓이다 보면 누구나 이런 상상을 한번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내가 두 명이라면……’. 두 명이 되고 싶다는 바람은 무엇을 기대하고
상상한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지금
해야 하는 그 일이 너무나 많은 나머지 일을 분배할 또 다른 나 자신을 바란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기대는 참 무섭고 불안하다. 단순히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자체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혹시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는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사람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했었다. 매일 짐승처럼 익숙한 일을 반복하는 사람, 아니말 라보란스와 노동과
행위를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는 사람, 호모 파베르. 쉽게
말해서 호모 파베르는 의미를 찾는 ‘왜’를 묻는 반면, 아니말 라보란스는 일에 함몰된 상태에서 도덕이나 윤리는 모른 채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만 묻는 존재다. 돌아보면 대부분의 우리 삶이
아니말 라보란스의 상태에 있다. ‘왜’ 공부해야 하는지, ‘왜’ 대학에 가야 하는지 모른 채, 대부분의 시간을 ‘어떻게’ 문제를
풀이할 것인가를 생각했었다. 졸업하면 끝일까? 이 직장에
‘왜’ 다녀야 하는지, ‘왜’ 이 일이 의미가 있는지에 관심을 두지 않은 채, 대부분의 시간을
‘어떻게’ 일해야 할 것인가만 생각했었다. 직장이 끝일까? 결혼을 ‘왜’ 해야 하는지, 결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고민보다
‘어떻게’ 결혼을 해야 하는지만 몰두한다. 결혼이 끝일까? 부부에게 자녀는 어떤 의미인지, ‘왜’ 자녀를 키워야 하는지 숙고하지 않은 채,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집중한다.
물론 사람들에게 ‘어떻게’만
강요하는 사회적 구조도 문제다. 그래서 요즘은 더욱 ‘왜’를 묻기 힘들다. 하지만 ‘왜’와 ‘어떻게’는 함께 해야
한다. 이 둘은 서로를 완성시켜주기 때문이다. ‘어떻게’만 있으면 의미를 잃고 부서져 버리며, ‘왜’만 있으면 방법을 몰라 떠다니기만 한다. 이게 바로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의
상태와 같지 않을까. 장난 같은 말 속에 삶의 의미를 뒤져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고자 하는, 장난이라 치부하기엔 너무 무거운 뜻이 담겨져 있다. ‘왜’와 ‘어떻게’를 통해 나의
존재를 묻는다.
앞서 나왔던 고대의 그 벽돌공이 우리 앞에 있다면,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당신은 페키트(fecit)를
새겼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