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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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옛사랑의 추억 같은 책.   

 

   
 

그는 언젠가 어느 사진잡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인간에게 망각은 불완전한 기능입니다. 완전히 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인간은 불완전해졌습니다. 저는 많은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많은 것을 망각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 그러고 나니 내가 조사한 자료들, 혹은 수없이 바라봤던 그의 사진들은 결국 그가 살아가는 동안 잊어버리려고 했던 것들의 목록일 뿐이며, 그가 마음속에 담아두려고 했던 것들은 결국 그가 찍지 않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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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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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식구들은 모두 즐거웠다. 나 또한 미연이 맞춰준 이태리제 양복을 입고 가족에게 둘러싸여 쑥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마도 이쯤에서 이야기가 끝났더라면 한 편의 훈훈한 가족영화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법이다. 지루한 일상과 수많은 시행착오, 어리석은 욕망과 부주의한 선택...... 인생은 단지 구십 분의 플롯을 멋지게 꾸미는 일이 아니라 곳곳에 널려 있는 함정을 피해 평생 도망다녀야 하는 일이리라.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해피엔딩을 꿈꾸면서 말이다. -45쪽

내게도 아마 헤밍웨이의 젊은 날과 같은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세상은 신비하고 달콤한 희망으로 빛나며 옆에 누워 있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래서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던 시절...... 하지만 상대가 누구였는지, 당시의 감정이 어땠는지는 이제 잘 기억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는 것이며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거였다.-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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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 재습격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구판절판


예전에는-하고 나는 생각했다-나도 희망에 불타던 정상적인 인간이었다. 고교 시절에는 클래런스 대로의 전기를 읽고 변호사가 되기를 꿈꾸었다.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떄 반에서 '가장 큰 인물이 될 것 같은 사람' 투표를 했을 때는 2등을 한 적도 있따. 그리고 비교적 멀쩡한 대학의 법학부에도 들어갔다. 그러다 어딘가에서 삐끗해버린 것이다.
나는 주방 식탁에 턱을 괴고 앉아 그것에 관해-대체 언제 어디서 내 인생이 어긋나기 시작했는지에 관해-좀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알 수 없었다. 특별히 짚이는 시점이나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학생운동을 하다 좌절한 것도 아니고, 대학에 실망한 것도 아니며, 특별히 여자한테 미친 적도 없다. 나는 나로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대학 졸업을 앞둔 어느 날, 갑자기 나 자신이 예전의 내가 아니란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태엽 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 중)-175쪽

"있잖아요, 제가 질문이 너무 많나요?" 소녀는 이렇게 말하며 선글라스 너머로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니?" 나는 물어보았다.
"가끔요."
"질문하는 건 나쁜 게 아냐. 질문을 받으면 상대도 뭔가를 생각하게 되니까."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요." 소녀는 발끝을 보면서 말했다. "모두 적당히 대답할 뿐이에요."
(태엽 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 중)-2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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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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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꿈속에서, 벌거벗은 자신에게 코트를 걸쳐준 기품 있는 중년여자를 아오마메는 떠올린다. 그녀는 은색 메르세데스 쿠페에서 내려, 가볍고 부드러운 달걀색 코트를 내게 주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임신했다는 것을. 그래서 사람들의 노골적인 시선이며 차가운 바람, 그밖의 모든 악한 것들로부터 나를 다정하게 보호해주었다.  

그것은 선의 징표였다.  

아오마메는 얼굴 근육을 풀고 표정을 원래대로 되돌린다. 누군가 그녀를 지켜보고 보호해주고 있다. 아오마메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 1Q84의 세계에서라도 나는 완전히 고독하지는 않다. 아마도."  

 평론가 김홍중은 말했다.   

아마도,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서바이벌키트일지도 모른다고.  

덴고와 아오마메의 닿을듯, 닿을듯한 만남이 아쉽게 어긋나버린 2권 이후,  

그것이 끝은 아니리라고 생각했는데  

1Q84 완결편인 3권에서 하루키는 역시나 그것이 끝은 아님을 보여주었다.  

어쩌면 하루키는 약간의 희망만을 남기고 2권에서 소설을 마무리지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독자들이 간절하게 기다리던 3권은, 좀더 밝은 빛, 좀더 따뜻한 세계의 느낌, 그리고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어렴풋한 사랑의 기억을 환기시켜주었다. 어쩌면 그것은 작가가 꿈꾸던 세상일 수도 있을 것이며, 아오마메와 덴고가 그렇게 다른 세계에서 흩어져버리지는 않길 바랐던 독자들의 꿈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담담하게 섣부른 희망이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하루키 세대들.  

그들에게 일큐팔사 3권이 작은 위안이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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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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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 '청춘' 이런 말만큼 싱싱한 말은 없다.  

하지만 곧 나의 이십대를 돌아보면 나는 다시 도리질하게 된다.  

그런 말 만큼 죽음에서, 절망에서, 혼돈에서, 순간순간 다리를 꺾고 주저앉아버리고 싶은 슬픔에서 가까운 단어는 없노라고.  

나는 단연코 말할 수 있다. 다시 20대 초반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 생생하고 푸른 어둠을 다시 헤쳐나갈 자신이 없다. 누구든 그렇게는 못할 것이다. 청춘은, 멋모르고 한 번 건너기엔 눈 시리게 푸른 강물이지만 그걸 알고 나서 다시 건너기엔 엄두조차 내지 못할 만큼 시퍼렇게 무서운 세월이다.  

이 소설은, 그렇게 처연하고 무서운 우리의 청춘소설이다.  

이야기는 윤과 명서, 그리고 단이와 미루를 중심으로 회전한다.  

그 중심축에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미루는 분신자살한 언니의 영상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아가며, 단이는 폭압적인 시절, 군대에서 총을 든 채 보초를 서며 죽음의 그림자를 본다. 그리고 미루를 지켜보는 명서, 단이를 지켜보는 윤이 있다.  

이들의 관계는 단지 청춘남녀의 '사랑'이란 말로 구획지을 수만은 없어 보인다. 물론 거칠게 말하자면, 윤과 명서가 연인이며, 또 윤은 어린 시절 친하게 지냈던 단이, 그리고 명서는 똑같이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미루와 깊은 공감대를 형성한 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 연대하고 얽히는 이들의 마음은 남녀간의 애정이라기보다는 운동권에서 흔히 쓰던 단어인 '연대'의 정서를 닮았다.  

미루는 끝없이 언니의 죽음에서 빠져나오려고 버둥거리며, 미루는 군대에서의 마지막 탈출구로 윤을 그리워하며 그를 갈망한다. 그리고 이들 청춘의 몸부림에는 서로에 대한 연민이 짙게 스며 있다. 이들은 세상의 중력에 저항한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마치 이들에겐 멘토와도 같은 스승의 말이다.

(291)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내가 여러분에게 종종 들려주었던 물을 건너는 인물 크리스토프에 대해 다시 한번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금 깊고 어두운 강을 건너는 중입니다. 엄청난 무게가 나를 짓누르고 강물이 목 위로 차올라 가라앉아버리고 싶을 때마다 생각하길 바랍니다. 우리가 짊어진 무게만큼 그만한 무게의 세계를 우리가 발로 딛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불행히도 지상의 인간은 가볍게 이 세상의 중력으로부터 해방되어 비상하듯 살 수는 없습니다. 인생은 매순간 우리에게 힘든 결단과 희생을 요구합니다. 산다는 것은 무의 허공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무게와 부피와 질감을 지닌 실존하는 것들의 관계망을 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 있는 것들이 끝없이 변하는 한 우리의 희망도 사그라들지 않을 것입니다. 살아 있으라.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   

가장 아름다워야 할 시기, 가장 화려하게 꽃피어야 할 시기. 청춘. 생의 정점. 어느새 물리적인 나이로는, 나도 서서히 그 시기를 건너서 빠져나가고 있다. 하지만 청춘은 들끓는 에너지와 세상에 대한 순정한 시선을 간직했기에 마냥 불행한 인생의 한때일 수도 있다. 부조리는 도처에 만연하다. 이에 저항한다. 그러나 청춘의 힘은 세상에 맞서기에는 아직도 한참 허약하다. 꿈꿨던 세계가 찬연할수록 세계의 비참함 또한 절절하게 다가오기 때문에 그 간극 사이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시시때때로 본다. 이 청춘을 대체 어찌할 것인가.  

우리는 70년대와 80년대에 20대가 아니었다. 우리는 2000년대에 대학교를 다녔다. 그런 '우리'에게도 세상의 무게에 짓눌리며 괴로워한 아픔이 있는가? 이 소설을 읽으며 혹여 그런 의문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무게는 분명, 존재한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서점가의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  

오늘날 이 시대 대한민국에서 정의를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 아닐까.  

단지 오늘날 청춘의 적은 좀더 교묘해졌을 뿐이다. 예전에는 거시담론이 대학가에서 거창하게 논해질 수 있는 주제였다면,  

오늘날 거시담론은 우리의 비루하고 세세한 일상속으로 파고들어 더 꼬집어 논하기 힘들게 되었을 뿐이다.  

시대는 88만원 세대의 너무도 쉬운 굴복 속에도 있으며, 오로지 스펙을 쌓을 수밖에 없게된 우리 청춘의 나약함 속에도 있으며, 일견 세련돼 보이는 옷차림으로 길을 활보하는 20대의 불안한 눈동자 속에도 있다. 아직도 20대는 사랑에 절망하고 사랑에서 희망을 찾으며, 아직도 20대는 갈 길을 모른다.  

이제 청춘이 너무 쉬워져버렸다고 섣불리 말하지 말자.  

내가 알기로, 청춘은 그렇게 늘 힘겨운 사투이다. 죽음의 그림자와 싸워 이겨냈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당신은 세상에 지나치게 적응해버린 한 마리의 온순한 짐승 같은 평범한 인간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르겠지만  

쉽게 잊어서야 되겠는가.  

20대의 절망을, 그시절의 치기를, 그 시절의 치열함을.

(340) 윤교수와 나와 윤은 하얀 눈이 쌓인 마당이 어두워지는 걸 바라보고만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윤교수가 입을 열었다. 그때 내가 보았던 광경을 내가 어찌 다 잊겠나. 바래긴 해도 잊히지 않아. 그러니 자네들보고 잊으라고 하지는 않겠네. 생각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더이상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생각해. 이 부당하고 알 수 없는 일에 대해 질문하고 회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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