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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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 '청춘' 이런 말만큼 싱싱한 말은 없다.  

하지만 곧 나의 이십대를 돌아보면 나는 다시 도리질하게 된다.  

그런 말 만큼 죽음에서, 절망에서, 혼돈에서, 순간순간 다리를 꺾고 주저앉아버리고 싶은 슬픔에서 가까운 단어는 없노라고.  

나는 단연코 말할 수 있다. 다시 20대 초반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 생생하고 푸른 어둠을 다시 헤쳐나갈 자신이 없다. 누구든 그렇게는 못할 것이다. 청춘은, 멋모르고 한 번 건너기엔 눈 시리게 푸른 강물이지만 그걸 알고 나서 다시 건너기엔 엄두조차 내지 못할 만큼 시퍼렇게 무서운 세월이다.  

이 소설은, 그렇게 처연하고 무서운 우리의 청춘소설이다.  

이야기는 윤과 명서, 그리고 단이와 미루를 중심으로 회전한다.  

그 중심축에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미루는 분신자살한 언니의 영상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아가며, 단이는 폭압적인 시절, 군대에서 총을 든 채 보초를 서며 죽음의 그림자를 본다. 그리고 미루를 지켜보는 명서, 단이를 지켜보는 윤이 있다.  

이들의 관계는 단지 청춘남녀의 '사랑'이란 말로 구획지을 수만은 없어 보인다. 물론 거칠게 말하자면, 윤과 명서가 연인이며, 또 윤은 어린 시절 친하게 지냈던 단이, 그리고 명서는 똑같이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미루와 깊은 공감대를 형성한 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 연대하고 얽히는 이들의 마음은 남녀간의 애정이라기보다는 운동권에서 흔히 쓰던 단어인 '연대'의 정서를 닮았다.  

미루는 끝없이 언니의 죽음에서 빠져나오려고 버둥거리며, 미루는 군대에서의 마지막 탈출구로 윤을 그리워하며 그를 갈망한다. 그리고 이들 청춘의 몸부림에는 서로에 대한 연민이 짙게 스며 있다. 이들은 세상의 중력에 저항한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마치 이들에겐 멘토와도 같은 스승의 말이다.

(291)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내가 여러분에게 종종 들려주었던 물을 건너는 인물 크리스토프에 대해 다시 한번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금 깊고 어두운 강을 건너는 중입니다. 엄청난 무게가 나를 짓누르고 강물이 목 위로 차올라 가라앉아버리고 싶을 때마다 생각하길 바랍니다. 우리가 짊어진 무게만큼 그만한 무게의 세계를 우리가 발로 딛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불행히도 지상의 인간은 가볍게 이 세상의 중력으로부터 해방되어 비상하듯 살 수는 없습니다. 인생은 매순간 우리에게 힘든 결단과 희생을 요구합니다. 산다는 것은 무의 허공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무게와 부피와 질감을 지닌 실존하는 것들의 관계망을 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 있는 것들이 끝없이 변하는 한 우리의 희망도 사그라들지 않을 것입니다. 살아 있으라.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   

가장 아름다워야 할 시기, 가장 화려하게 꽃피어야 할 시기. 청춘. 생의 정점. 어느새 물리적인 나이로는, 나도 서서히 그 시기를 건너서 빠져나가고 있다. 하지만 청춘은 들끓는 에너지와 세상에 대한 순정한 시선을 간직했기에 마냥 불행한 인생의 한때일 수도 있다. 부조리는 도처에 만연하다. 이에 저항한다. 그러나 청춘의 힘은 세상에 맞서기에는 아직도 한참 허약하다. 꿈꿨던 세계가 찬연할수록 세계의 비참함 또한 절절하게 다가오기 때문에 그 간극 사이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시시때때로 본다. 이 청춘을 대체 어찌할 것인가.  

우리는 70년대와 80년대에 20대가 아니었다. 우리는 2000년대에 대학교를 다녔다. 그런 '우리'에게도 세상의 무게에 짓눌리며 괴로워한 아픔이 있는가? 이 소설을 읽으며 혹여 그런 의문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무게는 분명, 존재한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서점가의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  

오늘날 이 시대 대한민국에서 정의를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 아닐까.  

단지 오늘날 청춘의 적은 좀더 교묘해졌을 뿐이다. 예전에는 거시담론이 대학가에서 거창하게 논해질 수 있는 주제였다면,  

오늘날 거시담론은 우리의 비루하고 세세한 일상속으로 파고들어 더 꼬집어 논하기 힘들게 되었을 뿐이다.  

시대는 88만원 세대의 너무도 쉬운 굴복 속에도 있으며, 오로지 스펙을 쌓을 수밖에 없게된 우리 청춘의 나약함 속에도 있으며, 일견 세련돼 보이는 옷차림으로 길을 활보하는 20대의 불안한 눈동자 속에도 있다. 아직도 20대는 사랑에 절망하고 사랑에서 희망을 찾으며, 아직도 20대는 갈 길을 모른다.  

이제 청춘이 너무 쉬워져버렸다고 섣불리 말하지 말자.  

내가 알기로, 청춘은 그렇게 늘 힘겨운 사투이다. 죽음의 그림자와 싸워 이겨냈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당신은 세상에 지나치게 적응해버린 한 마리의 온순한 짐승 같은 평범한 인간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르겠지만  

쉽게 잊어서야 되겠는가.  

20대의 절망을, 그시절의 치기를, 그 시절의 치열함을.

(340) 윤교수와 나와 윤은 하얀 눈이 쌓인 마당이 어두워지는 걸 바라보고만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윤교수가 입을 열었다. 그때 내가 보았던 광경을 내가 어찌 다 잊겠나. 바래긴 해도 잊히지 않아. 그러니 자네들보고 잊으라고 하지는 않겠네. 생각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더이상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생각해. 이 부당하고 알 수 없는 일에 대해 질문하고 회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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