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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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부지는요, 은교보다요, 더...... 불쌍해요......"  

이 말처럼 <은교>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 있을까?  

나는 오래 전부터 늙었다. 어쩌면 열대여섯살때부터였을 것이다.  

어쩌면 이십대 초반부터였을 것이다.  

소멸에 대한 두려움, 정점을 찍고 하강해갈 것에 대한 두려움, 결국은 '좋았던 한때'를 추억하기만 해야 할 것 같은 아쉬움에 잠들지 못한 날들이 많았다.  

늙음과 노쇠는 죄악이다.  

이 사회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소설의 주인공인 이적요도 그렇게 속절없이 늙어가는 한 명의 인간이었다.  

그가 은교를 만나기 전까지는.  

금방이라도 초록물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명랑하고 맹랑한 은교는, 적요에게 생명을 주었다. 이 세상을 더 살아갈만한 힘. 뒤늦게 만개한 꽃처럼. 은교는 그렇게 늙은 시인에게 찾아왔다. 시인은 늘그막에 비로소 마치 마지막인 듯, 생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고, 사랑을 향해 다시 마음을 열게 된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점잖았던 스승의 변화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했던 제자가 있었다. 서지우다.  

 육체의 껍질을 벗어나 은교를 향한 순정한 마음을 불태우는 이적요  

그보다는 현실적으로, 은교와 사랑을 나누는 제자 서지우.  

그리고 통통 튀는 은교.  

이 소설은 이 세사람이 엮어가는 회색과 노랑에 대한 이야기다.  

이적요는 죽음이라는 회색으로 점점 달려가지만, 마음만은 은교로 인해 점점 고양된다.  

한편 끝까지 스승을 이해할 수 없었던 서지우는 언제까지고 현실이라는 회색빛 속에 머물지만 스승이 자신을 죽이려 했음을 깨달을 무렵 비로소 어렴풋이 뭔가를 깨닫는다.  

그리고 은교. 은교는 이 모든 일을 겪으며 병아리빛 노랑에서 좀더 깊고 묵직한 노랑으로 물들어간다. 그녀의 마음 속에는 시가 찾아온 것이다.  

 어쩌면 은교란, 정말 환상일지도 모르겠다.  

영원히 다시 오지 않는 젊은 나날, 회색빛의 삶에서 빛을 줄 마지막 구원. 매 순간이 뜨거운 다시 돌아가고 싶은 그런 시간. 은교는 그 모든 것의 상징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은교는 늙은 시인에게 찾아왔다.  

당신의 인생은 다시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은교는 사람들의 영혼을 툭 건드려놓고 갔다.  

아직, 많은 것이 "가능하다". 은교는 아름다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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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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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없는 소소한 습관들은 언젠가 인생을 송두리째 집어삼킬 것이다. -73쪽

한때 몹시 비겁했던 적이 있다. 돌아보면 지금껏 비겁하기만 했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아무것도 망가뜨리지 않을 수 있다고 믿었다. 덧없는 틀 안에다 인생을 통째로 헌납하지 않을 권리, 익명의 자유를 비밀스레 뽐낼 권리가 제 손에 있는 줄만 알았다. 삶은 고요했다. 그 고요한 내벽에는 몇 개의 구멍들만이 착각처럼 남았다. -199쪽

법의관 최가 남자의 흉곽에 메스를 가져다댔다. 힘껏, 기다랗게 내리긋자 쉽게 몸이 열렸다. -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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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미술관 - 그림이 즐거워지는 이주헌의 미술 키워드 30 이주헌 미술관 시리즈
이주헌 지음 / 아트북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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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미르 드 호리가 위조의 대가로서 오랜 세월 많은 감식안들의 눈을 속이고 1,000점이 넘는 위작을 팔아넘길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그의 대담하고 자신감 넘치는 위조 수법 때문이었다. 많은 위조화가들이 원작을 그대로 베끼는 것과 달리 그는 원작자의 스타일로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다량의 위작을 생산했다. 원작과 모든 면에서 유사한 그림은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오히려 의심의 대상이 되기 쉽다. 화가가 똑같은 그림을 반복해서 그리는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스타일만 같고 주제나 소재가 다르면 진품이라는 확신을 주기가 훨씬 쉽다. 많은 위조자들이 이를 알면서도 스타일만을 살리는 길을 택하지 못하는 것은 그렇게 하려면 모방 능력뿐 아니라 대가 수준의 창작능력까지 갖추어야 하는 등 훨씬 뛰어난 예술적 재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엘미르 드 호리는 그런 점에서 대단히 탁월한 위조 능력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3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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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J.M.G. 르 클레지오 지음, 홍상희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0월
구판절판


그들은 모래와 바람과 빛과 밤의 남자와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마치 꿈속에서처럼 모래언덕 꼭대기에 나타났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내려온 듯, 공간의 혹독함이 사지 속에 배인 듯한 모습으로. 허기, 입술이 갈라 터져 피가 배어 나오는 갈증, 태양만이 번득이는 잔혹한 침묵, 추운 밤, 은하수의 섬광 그리고 달. 이 모든 것을 그들은 몸속에 품고 있었다.-9쪽

두려움의 소리가 랄라에게 들리는 날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양철판 위를 두드리는 둔중한 소리 같기도 하고, 귀를 통해 들리는 것이 아니라 발바닥에서부터 올라와 몸속에서 울리는 먹먹한 소음 같기도 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이것이 고독이다. 그리고 어쩌면 허기인지도 모른다. 다정함과 빛과 노래의 허기. 모든 것에 대한 허기의 소리인지도 모른다. -314쪽

그러나 더러운 큰 건물은 그 높은 키로 사람들을 짓누르며 그대로 우뚝 서 있다. 핏빛 같은 잔인한 눈을 굴리며 꼼짝 않고 서 있는 이 괴물들은 여자와 남자들을 통째로 집어삼킨다. 괴물의 내장 속에서 젊은 여자들은 얼룩진 낡은 침대 매트에 드러누워 말 없는 남자들의 불씨처럼 타오그로 있는 성기에 단 몇 초 동안을 소유 당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남자들은 침대 가에 놓인 담배가 다 타버릴 시간도 두지 않은 채 옷을 입고 가버린다. 사랑을 삼켜버리는 괴물 같은 건물 내부에는 늙은 여인들이 자신들을 짓누르고 그녀들의 노란 살을 더럽히는 육중한 남자 밑에 깔려 누워 있다. 그러면 이 모든 여인들의 뱃속에는 공허가 잉태된다. 이 강렬하고 차디찬 공허는 그들의 뱃속에서 빠져나와 바람이 되어 끝없는 소용돌이를 일으키면서 골목길과 거리를 따라 분다.-3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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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존재
이석원 지음 / 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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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들이 있다.  

현실이 그런 걸 알지만, 현실이 그런 걸 알기 때문에, 누군가가 애써 부정해주길 바라는 말들.  

이를테면 이런 말.  

"난 사랑을 믿지 않아. 너도 똑같아."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성이 있다면, 곧이듣지 말 일이다. "아니야, 사랑은 있어. 난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 난 영원히 널 사랑할거야."  

뭔가를 부정하는 말, 뭔가를 외면하는 눈빛. 그건 때때로 간절히 그것을 바라는 자의 역설적인 몸짓이며 그걸 더 확실히 보여달라는 어리광일 때가 더 많다. 우리는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타인의 승인을 기다리고 타인이 확신을 보여주길 바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절반은 뼈저린 현실을, 그리고 절반은 부정 속에 꼭꼭 숨겨둔 언젠가 꼭 찾고 싶은 희망을 보았다.(이 희망은, 저자가 싫어하듯 누구나 쉽게 말하고 외치는 희망은 아닐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내가 느꼈던 건,  "이 사람, 정말 끝을 두려워하는 사람이구나. 생의 끝이든, 사랑의 죽음이든. 그 모든 끝을 두려워하는 사람이구나."  

사랑의 환상이 깨지고 일상에 잠입해들어가는 게 보기 싫어서 사랑을 중단한 사람, 누구와 사랑을 시작할 때든 사랑이 영원하진 않음을 상대방에게 각인시키려는 사람. 그렇지만 어쩌면 그건, 영원을 갈구하는 마음은 아니었나. 이 세상에 비범한 한 사람의 존재로 남고 싶었던 열망은 아니었나. 어쩌면 그는 사랑의 완벽한 보존을 위해 절정에서 사랑을 멈춘 채 외면했을 터이고, 영원하길 바랐기 때문에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끝을 다짐했을지도 모른다. 비록 본인은 책에서 내내 그걸 강하게 부정하고 있지만.  

 인간이란, 보통의 존재임을 깨달을 때 철이 드는 것이겠지만 누구나 또 그 보통을 끊임없이 넘어서고 싶은 열망을 버리지 못하기에 괴롭고 고독한 존재일 것이다.   

끝으로 덧붙이는 말.  

책엔 아주 유용한 충고가 두 번 반복해서 나온다.  

사랑상담을 하는 자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  

"그 사람이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그럴 수가 있어?"  

이해하려 들 필요가 없다니깐. 너가 느낀 게 정답이야. 너가 그렇게 느꼈으면 그게 진리야. "그 사람이 요즘 바빠서" "무슨무슨 이유 때문에" 하고 스스로를 이해시키려 들지 마. 그건 거짓이야.  

요약. 누군가가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껴진다면, 뭐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정말 그렇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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