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라스트 걸 - 노벨 평화상 수상자 나디아 무라드의 전쟁, 폭력 그리고 여성 이야기
나디아 무라드 지음, 제나 크라제스키 엮음, 공경희 옮김, 아말 클루니 서문 / 북트리거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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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 작성글 타인의 고통
khs3325
2019.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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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라스트 걸 THE LAST GIRL
[도서] 더 라스트 걸 THE LAST GIRL

나디아 무라드,제나 크라제스키 공저/공경희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2014년 ISIS가 나디아의 고향인 이라크 마을을 공격했고,21세 학생이던 그녀의 삶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녀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끌려가 처형되는 광격을 지켜봐야 했다.

그런 다음 ISIS 대원에서 대원에게로 넘겨졌다.

그들은 강간할 준비로, 나디아에게 강제로 기도하게 하고, 옷을 갈아입혔으며,화장하게 했다.

어느 밤에 그녀는 안 무리의 사내들에게 잔인하게 유린당해 결국 의삭을 잃었다.

그들은 야지디(이라크 모술, 터키 디아르바키르, 이란 일부지역, 아르메니아 등지에 분포된 종파, 조로아스턱,미니교,유대교, 네스토리우스파의 그리스드교,이슬람교적인 요소가 혼합된죵교)여자들을 정복하고 지구에서 야지디를 쓸어내겠다며 야지디를 납치한 후 성노예로서 사고파는 젊은 여인을 의미하는 인간전리품인 사비야라고 부르면서 인권을 유린했다.

ISIS는 2003년 국제테러조직 알 카에다의이라크 하부조직에서 출발해,2011년 시리아 내전 이후 시리아로 거점을 옮겨 활동하였으며 세력을 넓혔다. 급진 수니파 무장단체로,집단 학살과 잔인한 테러를 일삼았다. ISIS는 IS가 그들 스스로 국가 수립을 선언하기 이전의 이름이다. 2019년 IS는 대부분 와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게 대체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구반대편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란 말인가?

2001년 911사건이후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들이 오사마다 빈가텐,사담후세인과 ISIS등이다.
그렇다면 왜 다니아는 고통을 겪어야 했나?
첫번째는 종교간의 갈등이다. 뿌리는 같지만 서로 배타적인듯하다
두번째는 막대한 석유가 매장되어 있는 지역적 특성이다.
문제는 석유를 채취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기술력과 자본이 필요하다. 즉 중동지역 국가 자체적으로는 석유를 채취하지 못한다. 그래서, 선진국가의 힘을 빌려서 석유를 채취한다.그릭 우리가 세금을 내듯이 선진국의 원유회사는 이윤의 일부만 세금형식으로 중동국가에 내게 딘다. 즉, 중동지역은 석유로 얻는 자본은 원유회사에서 내는 세금말고는 없다.

그래서 이름바 중동국가들은 국가와 일부계층만 부자고, 국민 대다수는 가난하다. 바로 이것이 문제의 근원이다.중동국가에서 보면 자기들의 자원인데 정작 자신들은 재미를 못보고, 선진국가의 원유회사만 이윤을 본다. 다시 말해 중동지역 자신들이 마치 이용당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그들은 특정적인 적을 만들게 된다. 바로 미국이다. 미국이 중동지역에 직접적인 해를 끼친것이 아니라, 막연하게 세계의 대표적인 국가이다 보니 어느새 중동국가들의 적은 미국이 된 것이다. 미국은 911테러에 자국민보호라는 타이틀로 다시 공격하고 군사복합체의 이익을 위해 이라크 전쟁을 감행하는 악순환의 연속을 맞이하게 된다.
그 속에서 가장 고통받는 자들을 누구인가?

우리 근현대사 속에서도 쉽게 우리는 고통의 연대를 느낀다.

일제시대때 수많은 위안부와 징용자들,한국전쟁,수많은 민주투쟁,43항쟁,518민주화운동등

하지만 그 공감이란 말도 어떤때는 무기력해진다.

"인간은 왜 끔찍하기 이를데 없는 화재사건이나 충격적인 살인사건을 다룬 신문기사를 늘 읽는가?

불행에 대한 사랑,잔악함에 대한 사랑은 연민만큼이나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남의고통에 대한 관음적인 행략(이런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프지 않다. 나는 죽지 않는다. 나는 전쟁터에 있지 않다."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만족감)이야말로 무관심하게 만드는 요소라라고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이란 책에서 언급한 바있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는 것. 그런 우리의 나약함과 비루함과 비겁함을 다독거려주기는 커녕 과제를 떠 안는 느낌이다.
나디아의 이야기속에서 우리가 두려운 것은 폭력이나 전쟁이 인간을 하나의 개인으로서, 인류로서 구별하게 해줄 수 있는 바를 잔인하게 깔아뭉개고 파괴하는데 우리라는 이름으로 함께 묶인 인류 공동체의 일원이라면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서는 안된다고 역설한다.
그저 누군가의 딸이였고 누이였을 나디아의 나즈막한 독백조의 말에서 그녀와 우리가 다르지 않는 그저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소소한 개인으로서 일상의 행복을 꿈꾸던 여인이였을 느낀다.

"난 내미래를 생각하느라 힘든시기를 보냈다. 어렸을 때. 나는 세상이 아즈 작고 사랑으로 넘쳐 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내 가족만 걱정하면 그만이었고, 모든 상황이 전부 나아질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제 자매들이 모두 살아서 상처를 회복하려고 부단히 보력한다고 해도, 베필감인 야지디 청년들은 어디 있다? 신자르의 공도묘지에 있었다. 우리 사회 전체가 거의 파괴되었다. 야지디 처녀들은 어릴 적 상상과 아주 다른 삶을 살겠지. 우린 행복을 찾는게 아니라, 그저 목숨을 부지하기를, 가능하다면 덤으로 얻은 생을 의미있게 살 수 있기만을 바랐다."

나디아에게 뭐라고 말해주기를 주저한다.

그저 우리가 알게 해줘서 다행이라는 말밖에.

언제든지 함께를 외쳐줄 수 있다라는 소심한 응원뿐일지라도 함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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