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저널 그날 조선 편 4 - 임진왜란 역사저널 그날 조선편 4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신병주 감수 / 민음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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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저널 그날'은 역사를 좀 더 가깝고 재미있게 보게 하는 프로그램이어서 한 번 보면

옛날이야기를 듣듯이 끝까지 보게 된다.

조선 건국 200년이 지난 후 발생한 임진왜란이 조선과 동북아시아의 역사에 미친 영향은

엄청난데 이번 '역사저널 그날 4'는 그래서 전체 내용이 임진왜란을 다루고 있다.

최근 드라마 '징비록',영화 '명량','광해군'등 임진왜란 시기를 다룬 작품들이 많아지면서 

이 시기가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라서인지 책을 더 흥미롭게 읽게 된다.


전 7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1591년 조선통신사의 일본에 대한 보고부터 시작해서 광해군이

즉위하기까지의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1장 조선통신사, 상반된 보고 하던 날


 1591년 3월 일본에 파견됐던 통신사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을 경계해야 한다는 보고를 하지만

반대로 부사 김성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일본은 걱정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의견을 낸다.

오랜 기간 지속된 평화가 독이 된 것인지 선조는 김성일의 의견에 따른다.

이런 안일한 판단이 결국 전쟁이 발생했을 때 제대로 응전도 하지 못하는 상황을 일으키는데,

처음부터 선조의 무능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2장 임진왜란 개전, 일본군 부산에 상륙하다


1592.4.13 에 부산으로 들어온 일본군은 개전 20일 만에 수도 한양을 점령하는 무서움을 보여준다.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투에서 군인들과 일반 백성들이 죽어가고 있는데,선조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북쪽으로 몽진을 한다.

100여명의 신하와 함께 북으로 향하던 선조는 파주에서는 수라상을 도난 당하는 수난을 겪으면서도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올라가 여차하면 명으로 피신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전쟁 중에 진두지휘를 하고 앞에 서지는 못할망정 백성은 죽든 말든 나만 살겠다고 외국으로 도망갈 생각까지 하는 사람이 한 나라의 왕이었다니 이 점이 당시의 조선에게는 가장 비극적인 일이었던 것 같다.


3장 조선의 반격, 바다로부터 시작되다 


 육지의 전투에서 패배를 거듭하던 상황에서 1592년 5월 옥포해전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승리를 거둔다.

이를 시작으로 이순신은 1598년 노량해전까지 20회에 걸쳐 기적에 가까운 승리를 이어가며 바다를 지켰다.

 전쟁 전에 이순신은 종6품 정읍현감에서 7계급이 올라 정3품 전라좌수사가 되었는데,그의 이런 고속 승진에는 류승룡의 천거(1591년 2월)가 배경이 되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이순신은 너무도 완벽해서 조금은 과장된 내용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실록이나 징비록,난중일기 등을 통해서 본 그는 그야말로 오로지 나라만을 생각하는 인물이다.


 3장에서 흥미로운 내용은 무엇보다 거북선에 대한 이야기인데,조함전문가인 나대용이 제작을 했다고 한다.

또한 이순신에 패배해서 무인도로 피신한 일본수군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미역으로 목숨을 연명해서 일본군은 치욕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 미역을 먹는다고 한다. 


육지에서도 반격이 시작되는데,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활약한다.

익히 알고 있는 곽재우,정인홍,사명대사,고경명,김천일,조헌 등이 의병장으로 맹활약을 했다.


 이중  충청도 의병장 조헌의 "지혜를 가진 자는 계책을,용력을 가진 자는 용력을,재산을 가진

자는 군량을,노력을 가진 자는 대열을 보충하라"(p.106)는 격문이 인상적이다.

나라와 왕이 지키지 않으면 스스로 지키겠다는 의지가 오랜 기간의 전쟁에서도 조선이 지속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선을 돕기 위해 출정한 명나라군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운데,그들이 지나가고난 후 곡식과

가축의 피해가 얼마나 컸으면 '일본군은 일본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이라는 말이 돌았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4장 정유재란, 일본군 조선을 다시 침략하다


 동아시아 7년 전쟁이라고 말하지만,사실 1592년부터 1593년까지 전투가 있었고,3월부터는 일본과 명 위주의 강화회담이 시작되었다.

양국 모두 조선을 배제하고 회담을 진행시키려 했다니 약한 나라의 서러움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말도 안되는 일본의 요구사항에 강화가 이루어지지 않자,일본은 1597년 1월 조선 4도를 차지하려는 목표를 갖고 다시 전쟁을 일으킨다.

특히 곡창지대인 전라도가 목표였는데,남원성 전투는 일반 백성이 만명이 죽고,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 외국에 노예로 팔려 가기도 했다니 가슴이 아프다.

 당시 끌려간 도공의 후손이 유명한 도예가 심수관이라고 한다.

전과를 확인하기 위해 죽은 사람의 코나 귀를 가지고 오게 시켜서 귀무덤이 생기기도 했다니,일본의 잔인함을 또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이순신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1597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이순신을 파직하고 원균이 뒤를 잇는다.

조선은 원균이 이끈 1597.7.14에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고 전선을 거의 잃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백의종군 후에 복직이 된 이순신이 1597년 9월 16일에 명량해전을 치루게 된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 전선 열두 척이 있나이다. 나아가 죽기로 싸운다면 해볼 만하옵니다"(p.140) 라는 각오로 전투에 힘했다니 상상하기 힘든 투지인 것 같다.


 1598.11.18 조명연합군이 노량해전에서 승리하면서 길고긴 전쟁이 끝나게 된다.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주역인 이순신은 후대에 가서 제대로 인정받게 되는데,정조때 영의정으로 추존된다.

 

5장 류성룡,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한 날 


역사시간에 제대로 다루지도 않던 인물인 류성룡이 대단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요즘에서야 알게 됐다.

그는 권율,이순신을 요직에 추천해서 임진왜란을 대비할 수 있게 하고,훈련도감 설치,면천법,작미법 등의 개혁안을 제안했던 뛰어난 재상이었다. 

1591년 좌의정,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역임했던 그는 묘하게도 이순신이 죽은 1598.11.1에  파직되서 고향인 하회마을로 내려가게 된다.

사심 없이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그의 모습은 진정한 관리,지도자의 모습이어서 전쟁 후에 그의 개혁안을 실천했다면 존선의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6장 동아시아 베스트셀러 <징비록> 


 미리 징계하고 후환을 대비한다는 뜻의 징비록은 임진왜란의 원인과 결과,외교전,백성들의 생활상,공을 세운 인물들의 소개 등 전쟁기간 전반에 걸쳐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어,임진왜란을 다룬 최고의 문헌으로 꼽힌다.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이순신 장군의 유명한 말도 징비록에 실린 것이라고 한다. 

이 책이 후에 일본에 전해져 베스트셀러가 됐다고 하니 흥미롭다. 


7장 광해군, 세자 책봉되던 날 


 폭군으로 기록되어 있는 광해군은 길고긴 16년의 세자 기간 동안에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전쟁 기간 중 분조로 왕 대신 군주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던 인물이다.당시 그의 나이가 18살이었다니 더 놀랍다.


 이렇듯 성군이 될 수 있던 인물이었는데,평생을 따라다니 방계승통의 콤플렉스와 아들을 믿지 못하고 15회나 선위 파동을 일으킨 선조와의 잘못된 관계,명에게 국왕으로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들이 그를 결국 폭군으로 몰고 갔다니 안타깝다.

광해군의 균형잡힌 실리외교 정책이 지속됐다면 명을 지지하다 금에게 침략 당하는 일도 없었을텐데 하는 가정을 해보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 선조 같은 인물이 41년 동안 왕을 했다는 사실에 답답함을 느낀다.

그런 왕에게 정말 반정을 해야 했는데,관리들은 다들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의문스럽기까지 하다.

오직 왕위를 지키기 위한 노력만을 해온 선조는 1593년에는 5번이나 선위 소동을 일으키고 세자를 괴롭혔다니 이런 상황에서도 꾹꾹 참고 버티어낸 광해군의 인내심이 놀라울 뿐이다.


 위기가 닥쳐와도 제대로 된 지도자가 있다면 미리 준비를 할 수도 있고,위기에 적절한 대처를 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무능하고 무책임한 왕을 갖고 있었던 조선은 불행했지만,이순신,류성룡 등 흘륭한

인물들이 있었기에 완전히 불행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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