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것들을 누릴 자격이나 안목이 있다면 삶을 보다 편안하게 사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적당한 돈을 지급하고 대신 안락함을얻는 일에 너무 인색하지 말 것. 그렇게 얻어지는 평화가 창조에기여할 수 있다면 물질을 아끼지 말 것. - P49
나는 어떤 일이든 강한 집념을 가진 사람을 좋아한다. 한번 마음먹은 일이라면 그것으로 파국을 맞을망정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주위를 돌아보면 그런 성격은 의외로 드물다. 모두 다음에 닥칠 기회를 행여 놓칠까 전전긍긍하며 망설인다. 매사에 흐리터분하고, 간단한 일조차 결단을 못 내리고, 늘 주저주저하며 뒤를 돌아보는 소심한 기회주의자들이 나는 싫다. 그 우유부단함을 보고 있자면 그들과 같은 인간이라는 점에서 부끄러워 견디기 힘들 지경이다. - P50
외로움이나 그리움 같은 감정은 습지대의늪처럼, 썰물 때의 갯벌처럼, 한번 발을 넣으면 좀처럼 빼내기 어려운 것이다. - P64
그러나, 아니다. 나는 자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이처럼 아주 많은 경우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그것을 진실이라고 여기며 산다. 북극의 유빙이 그렇듯 숨겨진 힘은 드러난것보다 강하다. - P68
그 누구도 어떤 다른 사람을 지도할 수 없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방식대로 살뿐이다. 선각자는 있어도 지도자는 없는 것이다. 자신을 내던져 새로운 것을 깨우치는 일은 존중받을 수 있으나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은 채 남을 지도하려 드는 일은 조롱받아 마땅하다. - P86
외줄 타기의 곡예사가 외줄과 대결하듯이 인간도 삶의 외줄과 대결한다. 이 대결에서도 절망은 버려야 할 대상이다. 대결자들은 멀리는 보지만 굴러떨어질 나락을 보아서는 절대 안 된다. 이미 대결은 시작되었고, 남은 것은 이기는 일뿐이다. 다른 것은없다. - P98
그러나 나는 박 여사와는 생각이 다르다. 남자가, 이미 검은 발톱을 드러낸 남자가 ‘뜻밖에 회개하는 경우는 결코 많지 않다. 아니, 절대 없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남자가 모든 것을 잃었을 때다. 모든 것을 다 잃고 나면 가증스럽게도 다시 여자 마음을 얻어 기대보려는 것이 남자들이란 족속이다. 검은 발톱은 부러진 것이지 사라진 것이 아니다. 게다가 발톱은다시 자란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특히 남자는 여자에 대해 반성할 줄 모른다. 알고 있더라도 실천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 것이 남자다. - P109
나는 내 기억의 저장 창고를 아주 철저하게 관리하는 사람이니까. 사람이 평생을 살며 저장해야 할 기억은 무수히 많은 법이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그것을 선별하고 취사선택해서 회상의 목록을 만든다. 나의 무의식은 이런 일에 아주 까다롭다. 즐겁고 아릿한 것만 추억하고 살기에도 짧은 삶이 아니던가 - P113
한번도 깨져 보지 않아 굳은살이 배기지 않은 삶은 정상적인 삶의 행로라고 볼 수 없다. 그런 삶은 가짜다. 역사가 없는 것이다. - P144
나는 이 일을 도모하면서 한 번도 실패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나는 늘 그랬다. 나는 모든 일에 실패를 겁내지 않는다. 실패할 일은 하지도 않지만, 일단 시작한 일에도 실패 따윈 없었다. 나는 인간이란 이름의 텍스트로 살아가는 운명이 아니다. 나는아주 일찍 그것을 거부했다. 단호하게, 또한 확실하게. - P146
아무도 하지 않은 말, 아무나 할 수 없는 말, 나는 그런 미지의언어를 원한다.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이 세상에 새로움이란 없다‘는 식의 단언이다. 나는 낡은 생각, 낡은 언어, 낡은 사랑을 혐오한다. 나의 출발점은 그 낡음을 뒤집은 자리에 있다. 장애물이 나와도 나는 그것을 뒤집어 버린다. 세상은 나의 운동장이다. 절대 그늘에 앉아 시간이나 갉아먹으며 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겠다. - P155
비극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우리 모두가 주인공인 비극 말이다.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에 맞춰, 비극을 상연하는 무대의 커튼은 스르르 위로 말려 올라간다. 죽음만이 그 커튼을 다시 내릴 수 있는 지겨운 공연. 앙코르도 받을 수 없는 단 한 번의공연. 할 수 있는 일은 이 비극이 황홀해지도록 노력하는 길밖에 없다. 사람마다 가치가 다르듯이 황홀함에 대한 척도도 물론 다르다. 모두 자기 방식대로 내용을 완성하고 자기주장대로 형식을이끌어간다. 평가는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평가는 신이 내린다 해도 절정을 느끼는 것은 삶의 주인공인 바로 우리다. 황홀함은 다른 모든 것은 다 절대자가 관장한다 하더라도, 그 감정만은 우리가 소유한다. 인간이 움켜쥘 수 있는 유일한 것. 그래서 모든 비극은 황홀감을 지향한다. - P211
비록 적군이라 해도 가끔은 동지가 되기도 하는 것이 삶이란 이름의 연극이므로. - P262
영혼을 찍는 카메라가 있다면, 짓눌리고 억압받는 정신을 촬영하고 인화할 수 있는 과학이 있다면, 렌즈를 들이대고 분명히 찍어두어야 할 여성의 깊은 상흔은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어디에서 어디까지를 찍어야 상처의 증거가 되는지 알수 없을 만큼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억압은 교묘하고 복합적이다. 이런 일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일상적으로 이해되고, 그리하여 일상의 하나로 무심히 잊히는 사회는 진정 옳지 않다. - P357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이란 이 긴 제목은 뽈 엘뤼아르의 시 「커브」의 전문(全文)이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 지속되는 삶의 궤도 위에서 온 힘을 다해 커브를 도는 일은 누구에게나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소설이 커브를 결심한 모든 이에게, 잠시라도 힘이 되었길 바란다. 1992년 여름 양귀자 - P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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