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끝없는 투쟁 - 가라타니 고진의 轉回
트랜스크리틱 - 칸트와 마르크스 넘어서기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한길사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트랜스크리틱』 이후의 가라타니 고진에 대해 ‘전회’라는 말을 자주 한다. 최근 출판된 『가능한 코뮤니즘』,『원리』,『NAM生成』 등에서 보이는 이론적인 고찰은 모두 ‘NAM(New Associationist Movement)’에 관한 것들이라고 해도 좋으며, 가라타니 고진의 전회란 이론가 가라타니가 실천가 가라타니로 전환한 것을 막연하게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트랜스크리틱』 이전의 가라타니 고진은 역사상 출현한 사회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두지만, 아이러니컬하게 자본주의를 긍정하고 자본주의의 철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공산주의라는 추상적인 비전 밖에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천가로의 전회가 두드러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90년대 중반까지의 가라타니 고진으로부터 원리적인 것을 탐구, 비판하는 일관된 태도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사회적 실천에 대한 지침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실제로 모순을 안고 있는 제도로부터 균형을 취해 이론적인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지침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지침이란 개인이 사회성을 상실하고 차이성을 잃어 내셔널한 특수성에 매몰되지 않고, 세계 자본주의의 다이내미즘에 몸을 맡겨 단독적으로 자유로운 개개의 결합을 지향함으로써 ‘역사의 종언’이라는 헤겔주의에 대항하는 형태로 ‘끝없는 투쟁’을 추구한다는 추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와이(岩井) : 개개의 자유로운 결합으로서의 공산주의라고 했습니다만, 그것은 세계 자본주의와 어디가 다른 것입니까?

가라타니 : 같은 것입니다. (『끝없는 세계』, 203쪽)


이 책에서 두 사람의 대화는 베를린장벽 붕괴, 동구의 붕괴, 소비에트연방의 붕괴라는 역사적 경험에 의해 발생한 ‘맑스주의의 붕괴’=‘역사의 종언’을 받아들이면서 행한 것이다. 프란시스 후쿠야마 등의 이데올로그는 냉전구조의 붕괴를 ‘역사의 종언’이라는 헤겔주의적인 비전으로 수렴한다. 이 헤겔적 비전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인류가 생명을 걸고 체제선택을 위해 행하는 정치적인 이데올로기 투쟁은 소비에트연방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권이 역사적으로 패배=붕괴하고,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기저적인 틀이 인류의 역사에서 승리함으로써 끝을 보았다. 따라서 역사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는 최종적으로 인류에 의해 선택된 것이며 이후의 인류의 역사는 이러한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기저적인 틀을 전제로서 진행하기 때문에 ‘끝났다’고 하는 비전이 그것이다. 따라서 후쿠야마 등의 이데올로그에 의하면 맑스에 대하여 자유주의 사상가로서의 헤겔이 승리한 것이며 역사는 20세기 말에 ‘끝났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물론 가라타니 고진은 이러한 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의 견해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1990년대에 행해진 대담에서는 ‘역사의 종언’이라는 강력한 역사적 비전에 대해 ‘현실을 지양하는 운동’(맑스)으로서의 공산주의를 주장하면서 역사의 목적이나 종언의 관념을 비판하는데 머무르고 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시기의 가라타니 고진에게도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기본적인 전제 위에서 이루어진 반시스템적인 마이너리티운동 등의 급진적인(radical) 민주주의=포스트 맑스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에는 단호하게 비판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가라타니 고진은 처음부터 상황에 대해 ‘윤리’적이며 자본주의적인 경제의 비판을 전제로 하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이 자신의 입장을 말하는 것에 의하면 그의 ‘전회’는 상황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냉전구조가 존재하는 시대에는 소련권의 사회주의체제와 자유주의체제의 양자를 비판하는 제3의 길을 제시하기 위해, 미소의 양극구조를 근저에서 지탱하는 세계자본주의의 다이내미즘을 아니러니컬하지만 긍정하고, 그것을 초월하는 제3의 길로서의 코뮤니즘을 가라타니 고진은 말하고 있다. 하지만 양극구조를 지탱하는 한편이 붕괴하고 세계가 자본주의 경제권의 승리로 보이는 상황에서는 이론가가 말해야 하는 것은 다른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1968년부터 1990년대까지 유효하다고 생각되었던 탈구축주의가 보수화되어 오히려 구체적이며 실천적인 사고가 요청된다고 그는 말한다. 현재 신칸트주의적인 도덕주의(moralism)로의 회귀가 프랑스, 독일, 미국 등에서 생겨나고 있다. 사회주의권이 붕괴한 후 이론가들은 맑스주의의 이념을 재검토하거나 자본주의 시스템의 근저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인 전제를 인정하면서 자유경쟁과 사적 소유가 야기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안전망(safety net)으로서의 사회민주주의로의 사상적인 회귀=전회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물론 사회민주주의적인 강령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 맑스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는 서구 맑스주의의 역사의 총체, 즉 루카치, 그람시를 거쳐 알튀세르, 푸코에 이르는 계보를 비판한다. 가라타니는 루카치가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임노동-자본의 관계에 적용하고 노동자가 의식의 물상화를 넘어 자본가를 타도한다는 생산중심사관을 제시한 것을 맑스를 헤겔로 후퇴시킨 것이라 비판한다. 더욱이 그람시를 거쳐 알튀세르의 국가 이데올로기장치에 이르는 이론은 혁명화하지 않는 노동자계급의 일상을 상부구조로 목표를 정하여 제도적인 분석을 행하는 것이지만, 가라타니가 지적하듯이 이러한 상부구조의 연구를 아무리 엄밀하게 하여도, 당연한 것이지만, 노동자계급은 혁명화되지 않고 실천적인 지침은 이루어지지 않으며, 역으로 결과적으로 이론가의 헤겔적인 ‘역사의 종언’으로의 ‘전향’을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러한 이론은 맑스주의에는 효과가 없다고 가라타니는 선언한다. 이러한 이론에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노동자계급과 자본가의 관계에 그릇되게 적용한 것과 생산중심주의적으로 이론을 구성한다고 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나아가 가라타니는 이러한 이론이 전제로 하는 상부구조, 토대라는 이원론은 『資本論』에서 의미를 상실한 것이라고 말한다.


가라타니에게 맑스는 『資本論』 전3권의 도달점에서 보아야 하는 것이다. 특히 가라타니는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적인 환상으로서의 종교적인 구조, 즉 신용제도, 가치의 형이상학적인 성질 등에 관심을 돌리고 있다.


그는 맑스의 가치형태론을 래디컬하게 읽으면서 가치의 幻想性을 폭로하기 위해 가치가 교환의 사후성에서 발생하는 것을 강조한다. 상품의 매수인과 매도인 사이에는 키에르케고르가 ‘공포와 전율’에서 신앙에서 윤리의 구조를 문제로 하면서 윤리적인 것을 허공에 매달고 말았듯이, 가치 그것 자체의 근거가 허공에 매달리는 계기가 존재하는 것이다. 맑스는 그것을 ‘목숨을 건 도약’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가라타니의 맑스독해에는 이러한 의미에서 종종 환상 중단적인 비평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존재하고 매수인과 매도인의 비대칭성을 강조하면서 즉물적인 실천을 환상으로 대치하는 것에 의해 환상을 해체하려고 하는 경향이 내재하고 있다.


가라타니는 『가능한 코뮤니즘』의 서문에서 『트랜스크리틱』의 마지막 장을 쓸 때 큰 ‘전회’가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자본제가 요청하는 윤리는 원리적으로 말해 타자를 단지 가치증식을 위한 수단으로 하는 시스템이며, 가라타니는 코뮤니즘을 칸트의 말인 ‘타자를 단지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를 경제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코뮤니즘이 칸트적인 것을 내재시키는 행위에 의해 확증되는 윤리적이며 절대적인 실천으로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의 가라타니의 윤리에 의하면 실천은 경험적인 레벨에 머무르는데 그치고 칸트가 생각하는 정언명령의 레벨로 고려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그 장에서 우연한 실천으로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실천이란 아니러니컬하게 자본주의를 긍정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것으로서 추상적으로 표현하는데 그치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이러한 ‘코뮤니즘’의 가능성을 노동자와 소비자 운동의 결합에서 보려고 한다. 가라타니가 지적하듯이 생산중심주의인 맑스주의는 노동자를 혁명의 주체로 파악하기 때문에 한계에 직면한다. 생산중심주의적인 노동자운동은 자본의 능동성이 노동자를 수동적으로 조직하므로 권리획득운동 이상으로는 진전하지 않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오히려 노동자가 주체로서 등장하는 장에서 가능성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자본제 상품이 판매되는 시장에서 노동자는 주체로서 자본에 향할 수 있게 되며 여기에서 비로소 비폭력적이면서도 혁명적으로 노동자는 자본에 대항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노동자가 저항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자본이라는 G―W―G’의 운동을 그치게 하면 된다고 가라타니는 말한다. 그는 자본이 최종적으로 유통과정에서 밖에 잉여가치를 실현할 수 없는 것을 강조하여 자본의 증식운동에 잠재되어 있는 ‘목숨을 건 도약‘을 내재시킨 환상적인 핵을 소비자운동이라는 즉물적인 실천에 의해 무산시켜 가치증식운동에 정지를 명하는 것이라 한다.


여기까지 오면 NAM을 말하는 가라타니까지 일보 전진한 것이다. 가라타니는 더욱이 잉여가치의 원천인 노동자가 자본에 자신을 팔 때에도 저항을 나타낼 수 있는 조직을 고려하고 있다. 가라타니는 자본의 무한의 가치증식운동을 정지시키기 위해서는 자본제 상품을 사지 않고, 자본제 상품을 생산하지 않는다는 단순명쾌한 윤리를 실천하면 된다고 하여 두 번째의 ‘전회’를 수행하는 것이다.


NAM은 생산협동조합을 통한 소비자로서의 노동운동으로서 고려되는 것이며, 그것은 주체로서의 노동자가 소비자로서 시장에 등장하는 장면을 강조한 불매운동으로부터 한층 나아가는 형태로 발생하는 실천이다. NAM이란 노동자가 자본에 자신을 팔지 않아도 생산이 가능한 장을 창설하는 운동이다. NAM이라는 운동은 호혜성에 근거한 지역화폐의 창설에 의해 개개의 시장이 성립하는 때마다 매수인과 매도인 사이에 자유로이 지역화폐를 발행하는 시스템이므로, 그것이 어디까지 기능하는가 그리고 그 지역화폐인 LETS에 근거한 NAM이 어느 범위까지 확대되는가라는 문제는 유감이지만 여기서 고찰하기에는 어려운 것들이다.


우리들은 가라타니의 1990년 이후의 행보를 조망하면서 그의 전회는 사회주의권이나 동구의 붕괴를 계기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그 전회가 『트랜스크리틱』의 결론부에서 소비자=노동자운동이라는 자본의 유통과정에 대한 저항운동으로서 표현된 것이다. 가라타니의 ‘희망의 원리’로서의 ‘코뮤니즘’은 칸트와 맑스를 비변증법적으로 매개하고 맑스를 칸트로부터 읽는 것, 혹은 칸트를 맑스로부터 읽음으로써 가능한 것이며 ‘가능한 코뮤니즘’으로서의 자본에 대한 저항운동은 윤리적인 자본에 대한 저항으로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NAM에서 가능성을 발견하면서 공동조합적인 생산자에 의한 트랜스 내셔널한 네트워크적 생산이 만들어지는 새롭게 ‘결합된 悟性’을 초월론적인 통각으로서 기능시키는 코뮤니즘을 목적의 왕국으로서 행위에 의해 확증된 실천이성의 의미로 하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어떤 뒤틀림이 있다. 왜냐하면 가라타니 자신이 이러한 LETS를 내재시킨 NAM을 ‘대항물’적인 것으로 생각하며 후기 정보자본주의 단계의 제도 그 자체를 내부로부터 침식하는 실천으로 고려하기 때문이다.


가라타니의 『트랜스크리틱』은 칸트를 맑스에 의해, 맑스를 칸트에 의해 읽는 것에 의해 달성되는 것이다. 원래 가라타니의 이론 자체에 자본주의제도 자체가 만드는 종교적인 환상의 구조를 소박한 실천을 대치시키는 것에 의해 허무하게 한다는 비평적 혹은 환상 중단적인 경향이 내재하지만, 『트랜스크리틱』에서는 가라타니의 종래의 측면에 대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을 절묘하게 적용하는 것에 의해 가라타니의 논리를 기초지우려고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가라타니의 이론적 가능성은 칸트철학 자체의 가능성에 대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다.


칸트는 이론이성에서 인간의 정신의 무한성을 표현하는 것인 내세, 신, 영원 등의 이념을 허무화하면서 이성의 적용을 오성의 범위에 한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실천이성에서는 오성의 범위에 적용된 이성이 실천이성의 우위 아래, 행위에 의해 확증된 이념의 실현으로 확장된다. 다만 칸트이론 자체의 한계와 가능성은 주체의 근거 지움을 욕망하면서 실제는 주체를 허무화시켜 현실과 이론의 관계 자체가 주체의 실천적 효과 밖에는 아닌 것, 즉 이론과 실천의 관계를 근거 짓는 이론 자체가 근거 지움 불가능이라는 불가능성을 내재시키고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헤겔은 칸트의 초월론적인 주체를 공허한 주체로 부르며, 헤겔이론은 그 공허한 위치를 주체에게 확보하기 위해 『정신현상학』을 쓴 것이다.


가라타니의 이론은 메비우스의 띠처럼 현실과 이론이 대응관계를 가지면서 구성된 것처럼 보인다. 가라타니에게 NAM의 실천은 자본주의사회의 종교적이며 환상적인 구조를 허무화시키고 거기에 윤리적으로 개입함으로써, 무한하게 진행할 듯이 보이는 자본의 증식운동에 정지를 명하지만 그 운동 자체가 현재 자본주의제도 총체 자체의 내재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NAM이 제출하는 공동체의 시스템과 자본주의의 시스템과의 구별 자체를 자본주의가 내재화시킨 경향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문제이다. 다만 NAM 자체를 메비우스의 띠처럼 얽힌 현실과 이론의 관계를 유토피아적으로 외부로부터 조망하는 것이 가능한 시점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 점이 중요하기 때문에 NAM에서 주체가 윤리화되어야 할 가능성을 갖는 것이다.


하지만 호혜성에 기초한 LETS의 운동이 확대되어 복잡한 생산시스템을 갖게 되어 버렸을 때 맑스가 『철학의 빈곤』에서 ‘노동화폐’운동을 추진하는 부르동을 비판한 것처럼 자본을 창조하지 않는다고 하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운동은 자본주의사회의 환상의 구조를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며, 또한 그 환상에 내재화되어 있는 경향을 부단히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가라타니는 환상의 허무화, 정지의 순간 자체를 실현하는 ‘행위’ 자체의 유물론적인 힘에 모든 것을 걸고 있으며, 그 환상이 중단되는 시간에서 가능성이 근원적으로 분출하는 것을 이론에 의해 긍정하며 그것을 희망의 원리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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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urblue > [퍼온글] 형이상학의 해체에서 타자들에 대한 환대로: 데리다의 철학적 삶

데리다가 타계한 뒤 지난 열흘 동안 4개의 추모글을 쓰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국내에 데리다 전문가가 드물다보니 저같은 문외한이 이렇게 고생을 하는군요. 오늘 마지막 글을 써보내면서 일단 한숨은 돌렸는데, 급하게 여러 편의 글을 쓰다보니 글이 제대로 된 건지도 모르겠고 중첩되는 내용들도 좀 있고 해서, 후련한 게 아니라 꺼림칙합니다. 한 가지 교훈을 얻은 게 있다면, 짧은 시간 내에 같은 주제로 여러편의 글을 쓰지 말자는 것이라고 할까 ... -_-;;;

그 글들 중에서 비교적 평이하고 분량도 많은 것을 하나 더 올립니다. 지난 번에 가을산님이 데리다 번역본들에 관한 질문을 하셨는데, 마지막 절이 좀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은 조만간 보충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형이상학의 해체에서 타자들에 대한 환대로: 데리다의 철학적 삶


지난 10월 8일 파리에서 췌장암으로 타계한 데리다는 외국에서의 명성에 비한다면 국내에는 거의 알려진 게 없는 철학자다. 실제로 데리다는 그가 타계한 직후 발표된 성명서에서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그는 프랑스가 배출한 동시대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고 애도의 뜻을 표했을 만큼 세계적인 명성을 누린 인물이지만, 국내에는 그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조(始祖)이자 매우 난해한 책들을 쓴 철학자라는 것, 그리고 ‘해체주의’라는 매우 특이한 철학 사조를 창안했으며, 차연(差延, différance)이라는 불가해한 개념을 사용했다는 것 말고는 달리 알려진 바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연일 국내의 신문들이 쏟아내는 추모 기사들, 때로는 상생(相生)의 철학자로, 때로는 ‘반골 철학자’로, 또 때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수로’ 그를 치켜세우는 기사들은 오히려 어리둥절하고 당황스러울 따름이다. 그는 누구인가? 그가 누구이길래 지성과 사상에 인색한 국내의 신문들이 이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과연 그들에게 그를 추모할 권리가 있는 것일까?


현전의 형이상학의 해체

 

데리다는 난해한 사상가라는 평판을 받아 왔다. 그리고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나 [기록과 차이]([글쓰기와 차이]라는 얼마간 그릇된 제목으로 번역되곤 하는) 같은 그의 몇몇 작품들은 상당히 난해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그의 저작들이 60여개의 언어로 번역되고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혀왔다는 사실은 그의 사상과 글쓰기가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켜왔음을 입증해준다. 무엇이 사람들을 그처럼 매혹시켰을까?

  이는 무엇보다 그의 철학의 전복적인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초기) 데리다에게 서양의 철학사는 현전(現前)의 형이상학의 역사다. 생생한 현재 속에서 사태의 의미가 충만하게 의식에 드러날 때, 또는 적어도 그 가능성이 원칙적으로 전제될 때, 비로소 진리로서의 로고스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 또는 로고스를 다른 사람들과 온전하게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는 매체, 곧 음성이야말로 참다운 매체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러한 현전의 형이상학의 원리를 정면으로 거부하거나 반박하는 대신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 그것은 자신의 타자, 자신의 근원적 한계를 전제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데, 이 타자는 바로 에크리튀르(écriture), 곧 기록이다. 실제로 서양 형이상학은 플라톤에서 루소, 소쉬르에서 레비스트로스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생생한 현재, 주체들끼리 주고받는 음성적 대화를 특권화하면서 기록을 하찮은 것으로 매도해왔지만, 데리다에 따르면 기록이야말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 기술적 토대다.    

  왜 기록이 그처럼 중요할까? 왜 이 주장이 그처럼 전복적이고 혁신적이었을까?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기원이나 로고스가 기원이나 로고스로서 존재할 수 있으려면, 그것들은 반복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기원이나 로고스가 일회적(一回的)인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복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기록이다. 기록이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보존할 수도 반복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기원도 로고스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처럼 기록에 의해 비로소 기원이나 로고스가 가능하다면, 현전의 형이상학의 주장과는 달리 기원보다 앞서는 것, 로고스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기록이 된다. 기원, 로고스의 이면에는 카오스의 검은 구멍만이 존재하며, 이 카오스와 로고스의 경계를 세우는 것이 기록인 셈이다.  


유령론: 타자들에 대한 환대로서의 정의

 

그러나 이렇게 해서 기원과 로고스가 현전의 형이상학 내에서, 서양의 문명 내에서 그것들이 지니던 지위를 상실하게 되면, 결국 회의주의와 상대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데리다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조로 불리게 된 배경에는 그의 해체 작업에 의해 현전의 형이상학, 더 나아가 기존의 서양 문명의 질서가 위협받고 있다는, 삶의 질서가 와해될지 모른다는 사람들의 두려움이 깔려 있다.    

  하지만 데리다의 진의는 여기에 있지 않다. 그는 우리가 현전의 형이상학처럼 기원과 로고스를 근원적인 진리로 가정하게 되면, 더 이상 역사도, 정의도 존재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모든 것이 기원, 로고스에 담겨 있는 이상 새로운 어떤 것을 발견하거나 발명하는 일은 불가능하게 되며, 서양 문명의 원리, 로고스의 명령에 충실한 것을 정의로 간주하는 이상, 서양의 문명과 다른 타자들에 자신을 개방하고 그들을 존중하는 일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리다가 90년대 이후 [마르크스의 유령들] 같은 저작에서 유령론에 입각하여 자신의 윤리ㆍ정치사상을 전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니고 현존하는 것도 부재하는 것도 아닌 유령들이라는 형상은 기원의 부재라는 해체의 원리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에게, 지금 여기 존재하고 있는 이들에게 불의를 바로 잡고 정의를 실행할 것을 명령하는 타자들의 모습을 나타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이주노동자들, 인종차별과 종교적 박해의 피해자들, 사형수들 및 그 외 많은 “약자들”에서 이러한 유령들의 구체적인 현실태를 발견하며, 이러한 타자들의 부름, 정의에 대한 호소에 응답하고 환대하는 일이야말로 살아 있는 자들이 감당해야 할 윤리적ㆍ정치적 책임이라고 역설한다. 따라서 데리다가 90년대 이후 사회적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개입한 것은 그의 철학사상의 전개과정과 매우 합치하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형이상학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원리가 해체된 이후 중요한 것은 우리와 다른 타자들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 어떻게 타자들을 절대적으로 환대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데리다를 어떻게 애도할 것인가

 

그렇다면 데리다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조로 간주하거나 생뚱맞게 상생의 철학자로 치켜세우는 일은 그의 철학이나 실천과는 거리가 먼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데리다가 이처럼 엉뚱한 오해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저작들 중 제대로 번역된 책들이 매우 드물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80여권에 이르는 그의 저서들 중 10 종 이상이 국내에 번역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번역본들은 (심지어 프랑스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비전문가들에 의해 번역되어, 데리다 특유의 현란한 언어유희나 섬세한 논의를 전달해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의 삶이란 저작들의 삶과 다르지 않은데, 우리에게 데리다는 처음부터 생명을 박탈당한 유령, 환영이었던 셈이다.

  빼어났지만 그만큼 치열했던 삶을 마감함으로써 데리다는 실제로 유령, 망령이 되어 그의 저작들, 그의 기록들 안에서만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 그에게서 허망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원을 쫒는 대신, 데리다가 그랬듯이, 우리도 그의 기록들 안에 깃들어 있는 타자의 부름에 귀기울일 때가 되지 않았을까?

 

 데리다의 작품들

 

 데리다는 80여권의 저서 및 아직 책으로 묶이지 않은 수백편의 논문들 및 인터뷰 등을 남겼을 만큼 다작(多作)의 철학자다. 국내에 번역된 책도『입장들』(솔, 1991)『마르크스의 유령들』(한빛, 1996),『다른 곶』(동문선, 1995),『에코그라피』(민음사, 2002)『시네 퐁주』(민음사, 1998),『불량배들』(휴머니스트, 2003),『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동문선, 2004), 『법의 힘』(문학과지성사, 2004),『테러 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 2004) 등 10여종이 훨씬 넘고, 그에 관한 해설서도 여러 권 나와 있다.

  하지만 데리다의 책들은 번역하기가 쉽지 않은 데다가 비전공자들이 마구잡이로 번역하곤 해서 대부분의 데리다 저서들이 심각한 오역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 중에서 번역도 괜찮고 읽을 만한 책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는 상당히 난해한 데다가 번역에도 약간 문제가 있어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긴 하지만, 데리다의 사상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책들 중 하나로 꼽을 만한 작품이다. 『입장들』은 초기 데리다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좋은 책이며, 『에코그라피』는 90년대 이후 데리다의 작업을 개관하기에 적합한 책이다. 그리고 『다른 곶』『법의 힘』『테러 시대의 철학』은 유럽 공동체, 법과 정의, 테러와 민주주의, 주권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배경으로 데리다의 정치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책들이다. 

  데리다 해설서 중에서는 다음과 같은 책들을 권하고 싶다. 크리스토퍼 노리스의 『데리다』(시공사, 1999)는 데리다 사상 전반을 균형있게 소개하고 있는 개론서이며, 에른스트 벨러의 『데리다―니체, 니체―데리다』(책세상, 2003)는 니체, 하이데거 철학과 데리다의 철학을 비교하면서 데리다 철학의 특징을 간명하게 잘 제시해주고 있다. 국내 연구자들의 작업 중에서는 김상환 교수의 『해체론 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 1996) 및 이성원 엮음, 『데리다 읽기』(문학과 지성사, 1997)을 추천할 만하다. 좀더 쉬운 입문서를 원하는 독자들은 제프 콜린스의 『데리다』(김영사, 2003)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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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urblue >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인터뷰

새로운 문학이 시작되고 있다. 영상문화에 떠밀려, 아주 작은 골방으로 들어온 문학. 그러나 그 문학은 초라해 보인다기보다는 겸손해 보인다. 그 겸손은, 세계사적 전통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 자가, 즉각적인 세계의 참조 사항이, 즉 존재의 당대적 외적 가치부여 방식이 더이상 밑돈을 대주지 않는 자리에서, 존재의 조건 자체로부터 자신의 존재론적 의미를 길어올린다는 의미에서, 동시에 대단한 오만이기도 하다. 이 문학은, 세계에 대고 정당성을 인준해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아주 고요하지만, 그러나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의미에서 격렬하다. 그 문학은 20세기를 건너뛰어 격세유전적 근원에게로 나선형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문학을 예고하는 한 젊은 작가가 우리 곁을 찾아왔다. 아직은, 속단일지 모르지만, 이 작가는 미국식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유력한 대안으로 보이는 프랑스적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수가 될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대담자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우리의 성정은 미국사람들보다는 이들에게 더 가깝다. 그를 찬찬히 읽는다는 것은, 자본의 음모에 휘말려 헐떡이고 있는 세기말의 한국인에게 문학적 의미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참고 삼아서 말한다면, 거대 담론들에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젊은 작가에게 일반적인 얘기를 묻는다는 게 의미 없다고 느껴졌으므로, 그의 작품, 특히 최근작 『시간의 지배자』를 중심으로 대담을 진행시켰다. 좋은 작가는 무엇보다 작품으로 충분히 말하는 사람이니까. 따라서 작품을 미리 읽고 이 대담을 읽는 것이 훨씬 더 이 작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말을 덧붙여둔다.

김정란 우선 바보 같은 질문부터 던져보기로 하죠. 왜 경영학을 그만두셨어요? HEC를 나오셨는데, HEC라면 프랑스에서 최고 수재들이 진학하는 학교 아닌가요? 빛나는 장래가 보장되어 있었을 텐데…….

바타이유 경영학을 택한 건 실수였어요. 리세(중고등학교 통합과정) 다닐 때 공부를 잘했어요.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대개 택하는 진로 중 하나를 택했던 것뿐이죠. 왜 경영학을 공부해야 하나 하고 자신에게 질문도 던져보지 않고 열여덟 살에 경영학 에콜에 입학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자, 내가 정말 마음 깊이 하고 싶어하는 건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경영학을 선택할 당시의 제 모습은 많은 프랑스 학생들의 이미지와 같아요. 어떤 일이 생길지 생각도 해보지 않고, 무슨 수단을 쓰든 직업을 얻으려고 하는 젊은이들의 이미지 말입니다.

김정란 아주 훌륭한 학생이었을 거예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아주 훌륭한 작가가 되었고.

바타이유 , 그건 잘 모르겠어요. (웃음)

김정란 아니오, 진심으로 드리는 말이에요. 바타이유 씨의 처녀작을 읽고 전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스물두 살짜리가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을까, 하고 말이죠. 삶의 어떤 면모를 정확히 파악하고 쓴 작품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마치 나이가 지긋한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 쓴 글 같았거든요. 젊은이답게 감각이 날카로우면서도, 완벽한 자기 통제력 같은 게 느껴졌거든요. 이번 작품 『시간의 지배자』도 마찬가지였구요.

바타이유 그건 아마도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노인을 나레이터로 설정했기 때문에 오는 효과일지도 몰라요. 생의 경험이 없이 글을 쓴다는 것이 당연히 두렵게 느껴졌거든요. 그래서 늙은 대사를 나레이터로 선택한 거죠. 그는 자신이 잘못 살았다고, 권력과 돈을 찾아다니며 삶을 탕진했다고, 이제 내 삶은 공허 속으로 추락할 거라는 회한에 시달립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글쓰기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죠. 왜냐하면, 이 남자가 글쓰기를 통해서 구원과 부활을 꿈꾼다는 게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품 첫머리에서 그가 여인들의 속옷과 치마들이 던져져 있는 강가를 배회하는 거예요. 썩어갈 우리의 육체를 감싸는 이 옷감들로 이제 종이가 만들어질 테니까요. 그 종이들, 책장들을 가지고 그는 자신을 구원할 거예요.

김정란, 무거운 주제군요. 글쓰기와 구원의 주제.

바타이유 그렇습니다. 하지만 전 이 작품에서 특히 죽음에 대해 썼어요.

김정란 첫번째 작품 『다다를 수 없는 나라』에서도 죽음의 주제가 나왔잖아요? 죽음이 앞뒤로 맞물려 있었죠.

바타이유 조금 달라요. 『다다를 수 없는 나라』에서 다룬 주제는 사라짐과 버림받음이죠. 예를 들면, 일곱 살에 프랑스에 온 어린 왕자 칸은 완전히 홀로 버림받고 병들어서 혼자 죽어요. 끔찍한 일이죠.

김정란 바타이유 씨에겐 그게 삶의 근본적인 조건인가요?

바타이유 그렇습니다. 전 파스칼 식으로 교육받았습니다.

김정란, 그래요. 바로 그 점 때문에 제가 바타이유 씨 작품을 특히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시간의 지배자』 끝부분에 나오는, 세 번의 비명 있잖아요? 그 장면이 특히 그랬어요. 인간의 근원적인 비참을 알리는 비명. 마르그리트 뒤라스 작품 안에도 그 비명이 나오죠. 뒤라스도 아주 파스칼적인 작가잖아요? 저 역시 마음속 깊이 파스칼적인 인간이거든요.

바타이유 가톨릭 리세를 십이 년간 다녔습니다. 프랑스에선 드문 일이죠. 사제들에게서 교육받았다는 것이 제 문학의 모든 특성, 특히 문학을 통한 구원이라는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선 상당히 중요한 점인 것 같아요. 신을 믿건, 그렇지 않건 상관없이 제 주인공들은 인간의 비참이라는 문제 앞에 홀로 대면하거든요.

김정란 『시간의 지배자』를 번역하기 전에, 일간지에 난 기사들을 대충 훑어보았습니다. 인터뷰에서 밝히신 바에 따르면, 베트남 여행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라구요. 왜 하필 베트남인가요?

바타이유 유럽을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 거예요. 대학에서 경영자 수련과정으로 외국 트레이닝 코스가 있었거든요. 처음엔 스위스엘 갈까, 아니면 영국엘 갈까 하고 망설였죠. 그러다가 베트남을 택하게 되었는데, 스무 살짜리 젊은이들이 잘 그러듯이 어떤 도전의식 때문이었을 겁니다. 내가 잘 모르는 이국적인 나라를 택하자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오 개월 과정으로 베트남으로 떠났는데, 그곳에서 겪었던 고독이 내 정신에 깊이 각인되어버렸어요.

지독한 더위였어요. 그리고 말도 못하게 끈적거리구요. 식물들은 무시무시하게 울창하고요. 많이 힘들었죠. 왜냐하면 집에서 떠날 때만 해도 전화를 하거나 팩스를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돈이 별로 없었거든요. 그런데 전화 비용은 엄청나게 비싸구요. 그 누구하고도 이야길 나눌 수 없었던 거죠. 프랑스에 돌아온 뒤에, 그 고독의 경험을 글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20세기 말에 혼자가 된다, 자, 그럼 3세기 전 어느 날인가 자신의 삶을 구원하기 위해서 베트남으로 떠났던 그 선교사들은 어떤 걸 느꼈을까. 난 그렇게 해서 태어난 내 첫번째 소설 『다다를 수 없는 나라』가 일종의 기도였다고 생각해요. 100페이지 정도 되는 짧은 책인데, 포교를 포기하고 수도사들에게 금지되어 있는 사랑을 하고 죽어가는 수녀와 수사의 이야기죠. 스무 살짜리가 그런 이야기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엉뚱한 생각이었죠. 그렇지만, 중요한 건 내가 버림받음과 침묵에 대해 쓰고 싶어했다는 사실이었다고 생각해요.

김정란 그러나 역사가 있잖아요? 대문자로 씌어지는 역사일지는 몰라도. 한 명의 아시아 여자로 난 이 선택에 관심이 많거든요. 작가는 왜 하필 식민주의에 의해 고통당한 나라를 선택했을까? 그 고독은 바타이유 씨에겐 개인적인 고독이지만, 제겐 베트남의 고독으로 느껴져요. 특히 고통스러워하는 나라의 고독으로요.

바타이유 제가 1992년에 이 나라에 가겠다고 결정한 건 어쩌면 역사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요. 천 년간 중국인의 지배하에 있었고, 백오십 년간 프랑스인에게 식민통치를 받았고, 삼십 년간 공산주의 지배를 받은 나라였으니까요. 겉으로 보기에 사이공 같은 도시는 멀쩡해 보이죠. 아시아의 파리라고 불리기도 하잖아요? 하지만 그건 겉모습일 뿐이죠. 겉모습 아래엔 학살과 전쟁의 피가 가득 차 있어요. 그러니까 프랑스인에게 베트남을 향해 다가간다는 건 회한을 향해 다가간다는 의미예요. 베트남은 프랑스에겐 커다란 실수니까요. 난 소설 속에서 그 실수를 향해 두세 명의 수도사들을 데리고 다가갔던 거죠. 굉장한 야심이었어요. 그런데 그들은 베트남 안에서 점점 더 조국과 종교로부터 버림받게 돼요. 그리고 점점 더 자유로워지죠. 점점 더 헐벗고요.

김정란 주인공들이 현대적 삶으로부터 떠날수록 베트남의 오지로 들어가고, 오지로 들어갈수록 높은 곳으로 올라가도록 설정하셨더군요.

바타이유 그건 해방과 상승을 말하는 장치입니다. 세속의 삶으로부터 떠나서 그들은 자신의 따스하고 가벼운 육체를 발견해요. 자신들을 육체적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죽습니다. 죽을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겉으로 보면 이들이 불행해 보일 수도 있어요. 모든 접촉을 잃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았으니까요. 그렇지만 마지막 장면에 그들은 미소를 짓고 있죠. 그리고 그들의 모습에는 어딘가 신성한 데가 있어요. 이 책의 결말은 주인공들로서도 전혀 예상치 않은 것이었을걸요.

김정란 한국에선 선교사의 이미지가 좀 그래요.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어떤 역사적 상처로부터 자유롭질 못한데, 선교사들이 많은 경우 식민정책의 첨병 노릇을 하니까…….

바타이유 제 선택은 어렵지 않았어요. 병사들은 베트남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죠. 반면에 수도사들은 경직되어 있는 선교사들, 즉 식민주의자들이 아니었어요. 그들은 부드럽고 단순한 사람들이었죠. 그들과 베트남 사람들은 서로 가까워지죠. 베트남 사람들은 개종하지 않았어요. 개종한 건 오히려 수도사들이죠. 그들은 그들의 단순한 교리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포기해버려요. 그들은 자기들이 환경 때문에 신앙을 잃게 되리라곤 생각지 않았겠죠.

김정란 하지만 그들과 원주민들은 새로운 신앙 안에서 만난 것 아닌가요? 도그마가 아닌 신앙 말예요. 아니, 오히려 새로운 조건이라고 말해야 할까?

바타이유 그래요. 새로운 조건이죠. 인간성에 대한 확신이라는 조건. 처음에 그들은 별로 인간적이질 않았죠. 왕의 명을 받아서, 십자가를 들고, 제복을 입고 도착했으니까. 그들이 새로 발견한 신앙은 일종의 혼합 종교죠. 가톨릭적 바탕에 더하기 지혜, 젊음, 우주 안에서의 현존.

김정란 바타이유 씨 첫번째 소설을 읽고, 아주 소박하지만 동시에 오만한 작품이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생의 문제, 아니면 패러독스를 해결하고 싶어한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상업성은 없겠지만, 그건 굉장한 형이상학적 야심이죠.

바타이유 사실 오만한 책이긴 하죠. 제 말은 해피엔딩으로 끝났더라면 그럴 뻔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책은 비극으로 끝나죠.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은 겁니다.

김정란 장래가 보장된 직업을 버리고 작가가 된 것도 일종의 오만 아닌가요? 글 써서 먹고살기 힘들잖아요? 그 선택 자체가 물질주의에 대한 저항, 또는 도전 아녜요? 내가 과장하는 건가요? 바타이유 씨 책이 많이 팔릴 것 같지는 않은데…… 프랑스라고 해도 말이죠. 어쨌든 『람세스』처럼 팔리진 않을 거잖아요. (웃음)

바타이유 불행히도 아니죠. (웃음) 하지만 주제에 비하면 꽤 많이 팔렸어요. 제 책이 무척 어둡잖아요. 아까 오만과 도전이라는 말을 하셨는데, 그래요, 사실 그렇죠. 하지만 전 작은 사물들을 통해서 생의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해요. 『시간의 지배자』는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해서 모든 것을 유지시켜보려고 하는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예요. 무질서는 죽음이니까요. 그러니까 그건 죽음을 해결하려는 시도죠. 그런 의미에서 오만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하지만 작은 기계장치, 여기서는 시계를 통해서 추구가 이루어져요. 『시간의 지배자』는 시간에 대한 형이상학적 소설이 아닙니다. 시간에 대해서 뭘 말할 수 있겠어요? 시계를 선택한 건, 그건 그냥 말하는 방식일 뿐이죠. 시간을 맞추는 주인공은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어요. 어떤 의미에서 그는 범죄자예요. 죽음, 그의 시계에 너무나 신경을 쓴 나머지, 그는 오히려 카오스가 시테 안에 자리잡게 만들어요. 카오스는 시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강간당한 그의 딸을 통해 시테 안에 들어오죠. 왜냐하면, 강간이란 찢어진 살을 의미하는 것이고, 카오스는 살 안에 깃들여 있는 것이니까요. 헬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사랑에 대한 감각을 가진 여자, 부드럽고, 섬세한 헬렌은 책의 끝부분에서 다시 아기를 가지게 돼요. 아르투로가 떠난 지 한참 뒤인 이 년 후에 가진 아기이니까, 아르투로는 아버지일 수가 없죠. 아버지는 결국 공자그겠죠. 그렇게 부드럽고 아름다운 여자에게 공자그라는 시체를 연인으로 가지게 한다는 건, 그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에요.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고 도망쳐버린 아르투로는 그런 의미에서 범죄자입니다.

김정란 해결하지 않은 게 아니고,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셨던 것 아닌가요?

바타이유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오만하지만 동시에 겸손한 소설입니다.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이에요. 나레이터 역시 죽을 사람이죠. 죽을 사람이 한 소녀의 죽음에 대해 말하는 형식을 택한 겁니다. 장소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는 베르사이유에서 말하지만, 불 꺼진 베르사이유, 끝나버린 베르사이유, 가을의 베르사이유예요.

김정란 바타이유 씨의 소설 세 권이 모두 바로크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거든요. 그 시대에 특별히 매혹되어 있는 건가요?

바타이유 편의상 그 시대를 선택한 것이기도 해요. 『다다를 수 없는 나라』를 예로 든다면, 만일 오늘날을 배경으로 베트남에 대해서 썼다면 우스꽝스러웠을 거예요. 제가 택하는 시대는 역사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역사 밖에 있지요. 과거 시대를 택하면, 덤으로 생겨나는 효과가 있어요. 깊고 비극적인 울림이 생겨나거든요. 『시간의 지배자』도 마찬가지예요. 난 이 소설이 당대적이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게 똑같아요. 권력과의 관계, 남자들의 행태, 여자를 취급하는 방식. 난 이 책이 과거의 텍스트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비극적 차원은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어요. 신하들과 공자그의 관계는 기업에서 사장과 근로자들이 맺는 관계와 똑같아요. 인간 조건의 차원은 전혀 바뀌지 않았어요.

그러나 내가 이 시대(1700~1715년경)를 택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이 시기는 루이 14세 시대 말기입니다. 루이 14세의 시대는 멋진 시대였지만, 절망스러운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왕은 지치고, 왕궁을 유지하기도 힘들고, 몰래 후궁들을 계속 맞아들이고…… 그러니까 그 시대는, 제 소설에 나오는 메타포를 인용한다면, “바위에 깃들여 있는 죽음”이에요.

김정란 전 이 시대의 선택을 그렇게 해석했어요. 이 작가는 20세기의 인류가 기대고 있었던 패러다임이 부서져버린 것을 예감하고, 20세기 패러다임의 근원지로 돌아가본 거라구요. 즉 근대성 패러다임, 국가 정체성을 발생시킨 근원지지요. 근원지로 돌아가 옛날 패러다임이 발생시킨 타자들을 뒤져내는 거라고요. 그래서 궁전의 하인들을 주인공으로 택한 것 아닌가요?

바타이유 탁월한 해석이군요. 하지만 난 그렇게 깊이까지 생각했던 건 아닙니다. 내가 궁정 하인들에게 관심을 가진 건 사실이에요. 그래서 밤에 촛불을 들고 시계를 맞추러 복도를 돌아다니는 사나이의 이미지가 얻어졌죠. 난 무엇보다도 왕국의 어떤 비전을, 천국의 이면을 살펴보고 싶었어요. 밤에 일하는 사람들이 발견했을 비전, 어떤 형태, 어슬렁거리는 그림자. 낮의 사람들인 권력자들은 그걸 보지 못하죠. 그에겐 모든 것이 가려져 있어요. 낮의 베르사이유는 우월한 버전이죠. 그러나 다른 버전도 있어요. 그건 베르사이유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분지, 호수, 늪지대예요. 그건 결국 디오니소스적 통행로, 켈트적 요소들이죠. 다른 쪽에는 태양왕 루이 14세와 함께 프랑스적 질서가 자리잡고 있고요. 사물들을 질서 속에 유지시키려고 애쓰지만, 한순간 디오니소스가, 옛날의 바탕이 돌아옵니다. 그건 폭력성, 잔인함이죠. 바위 속에 숨겨진 저주처럼 말예요.

김정란 시테의 어두운 분위기가 그걸 말해주는 장치겠군요. 주인공 이름 아르투로가 재미있어요. 전형적인 유럽 이름이면서도 혼성 문화적이거든요. 귀족적인 이름인데, 어쩐지 좀 동양적으로, 타르타르적으로 느껴져요. 어떻게 정해진 거죠?

바타이유 좀 우스꽝스럽게 보이라고 그렇게 정했어요. 프랑스어로 O로 끝나는 이름은 어쩐지 좀 웃기게 들리거든요.

김정란 아더와는 연관이 없나요? 킹 아더? 그도 역시 세계의 구원자가 아닌가요?

바타이유 약간은요. 카멜롯의 아더 말예요. 그러나 프랑스에서 아르투로는 촌스런 이름이에요. 아르투로는 키가 크고, 패션감각도 없고, 말도 할 줄 몰라요. 한마디로 농부 같은 사람이죠. 아르투로는 침묵입니다. 반면에 헬렌은 말을 잘하죠.

김정란 그건 이를테면, 문학의 자질 아닌가요?

바타이유 아르투로­헬렌 부부를 통해서 내가 보이려고 했던 것은, 오히려 어떤 구어 전통 같은 것이었어요, 헬렌은 목소리이고, 아르투로는 육체지요.

김정란, 그래요! 몸이 알고 있는 언어, 남자들에게서 사장되어버린, 남자들이 어둠 속에 파묻어버린, 그러나 여자의 음성을 통해서 햇빛 속으로 불려나오는 말이란 말이군요. 이를테면 어떤 ‘잠재적 문학’ 같은 개념이겠군요!

바타이유 틀림없습니다. 정확하게 보고 계시군요.

김정란 내게는 로도이프스카가 그 언어의 상징일 거라고 생각되었어요. 그러나 바타이유 씨는 작품 말미에서 그녀를 죽여버렸죠. 그녀는 삶 안에서 생존 형식을 얻지 못해요. 난 그녀가 아직 오지 않은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바타이유 바로 그렇습니다. 그녀의 얘기는 좀 복잡합니다. 처음엔 로도이프스카를 중심으로 얘기를 해나갈 생각이었거든요. 그런데 쓰다보니까 조금 달라졌어요. 그녀에 대해선 아직 무언가 잘 쓰지 못하겠더라구요.

김정란 로도이프스카는 사랑할 줄 모르는 남자에 의해 강간당하죠. 공자그는 여자의 살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니까. 공자그는 나에겐 물질주의, 또는 권력의 상징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타이유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는 소유에 대한 광기이죠. 그와 로도이프스카의 관계는 미묘해요. 공자그가 로도이프스카를 소유하려 했는지, 아니면 아르투로의 딸을 소유하려 했는지 분명하지 않거든요. 공자그는 로도이프스카를 소유함으로써 아르투로를 지배하려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로도이프스카는 일종의 전달 장치인 셈이죠. 로도이프스카를 소유한다는 건 공자그에게는 아르투로에게 누가 아르투로의 주인인가를 보여주는 방법도 되는 거죠. 아르투로는 복수하지 않고 도망가요. 떠나버리죠.

김정란 아무 데로나 가버리죠. 아니면 아무 곳도 아닌 곳으로 갔든가.

바타이유 사라진 거예요. 공자그의 태도를 ‘권력’말고, ‘권태’로 설명할 수도 있어요. 그는 여자, 문학, 도서관, 그런 식으로 계속 오락을 찾아다니죠. 결국 마지막엔 로도이프스카를 강간하죠. 그의 마지막 오락은 잔인함이죠. 그것이 강간의 동기예요. 한순간, 그는 한 여자의 육체에 물리적인 힘을 행사함으로써 진짜 힘을 소유했다고 느끼는 거죠. 중요한 건, 그녀가 자기가 파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거예요. 그것이 강간의 도착적 쾌락이죠. 그건 더 나쁜 일이에요.

김정란 『시간의 지배자』에선 시계가 중심 상징으로 나오죠. 218개의 시계가 나오는데, 그 숫자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나요?

바타이유 아뇨. 난 숫자를 믿지 않아요. 무엇인가 의미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정말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난 그것이 엄청난 숫자라고 생각해요. 엄청날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근거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베르사이유에는 약 6백 개 정도의 벽시계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2백 개 정도는 가능한 숫자죠.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샤를르 캥(샤를르 5세)이 스페인의 성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을 때 일인데요. 어느 날인가 꿈속에서 40개의 벽시계가 한꺼번에 울리는 꿈을 꾸고 그것을 실현해보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물리학자들이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는 거예요. 40개의 벽시계는 수학적으로 무한에 가깝다는 거지요.

김정란 아르투로의 태도 중에서 특히 나에게 흥미로웠던 것은, 그가 한 시간 늦게 가는 고장난 시계를 다 분해하고 난 뒤에, 고장난 것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런 거예요”라고 말하는 장면이었어요. 모순을 견디는 태도지요. 말하자면, 어떤 동양적 견딤, 똘레랑스를 알고 있는 거죠.

바타이유 그리고 동시에, 그가 나약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 나약함 때문에 그는 로도이프스카를 공자그의 품에 내던지죠. 물론, 그 때문에 그가 공자그처럼 편집광적 인간이 되지 않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는 결국 운명이 굴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사람이에요.

김정란 그건 결국 『시간의 지배자』 전체를 덮고 있는 쇠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헝겊’과 ‘속옷’의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지 않나요? 몸에 아주 가까운, 꼭 조이는 코사쥬, 투명한 헝겊. 아르투로가 오간디 보자기 위에 시계 부품을 늘어놓는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바타이유 그 장면에서 드러나는 건 특히 살과 시간과의 싸움이죠. 아르투로는 그래서 매일 밤 시계 부품들을 재조립하는 거지요. 하지만, 공자그는 그걸 잘 견디질 못해요. 그는 분명히 살을 택했으니까요.

김정란 아르투로는 밤의 존재지요. 그렇지만 헬렌과의 결혼에 의해서 그는 낮의 자질을 흡수하게 되잖아요? 여자의 존재에 의해서 디오니소스적인 살이 아폴로적인 살로 바뀌잖아요. 결혼 전에 문을 꽁꽁 닫고 커튼을 치고 살던 그가 결혼 후에 비로소 빛을 만나는 걸로 묘사하셨던데…….

바타이유 정확히 말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냥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서른다섯 살이나 마흔 살 먹은 독신남성이 사는 방식 말예요. 엉망으로 살죠. 여자를 얻으면 사는 게 좀 나아지니까. (웃음)

김정란 에이, 그것만은 아닌 것 같던데요. 아르투로의 아파트는 작품 안에서 중요한 상징적 역할을 하고 있던데요.

바타이유 그래요. 솔직하게 말하면 그래요. 아르투로의 아파트는 왕궁 안에서 무질서가 허용되는 유일한 공간이에요. 그 무질서를 누리기 위해서 ‘다른곳’으로 갈 필요가 없다는 거죠. 왕궁은 일종의 공식적인 장소예요. 모든 것이 조직화되어 있죠. 궁정사람들은 온갖 잡동사니들이 널려 있는 그곳에서 스스로에게 약간의 가벼움을 용인합니다. 아르투로의 아파트는 약간의 카오스예요.

김정란 포스트모던한 태도죠. 카오스를 로고스로 통제하지 않고 견디는 거죠. 그런데, 아르투로는 시계를 꼬박꼬박 맞추거든요. 그건 분명히 모던한 태도구요. 그건 바타이유 씨 작품 전반에서 읽히는 완벽한 통제력과 맞물려 있어요. 그런 특성을 어떤 평론가들은 ‘고전주의적’이라고 보고 있는 것 같구요. 그런데, 이게 아주 흥미로운 부분인데요, 바타이유 씨 작품은 그렇게 통제되어 있고,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는데도 어딘가 부서져 있어요. 어떤 신비한 비논리, 또는 비규정성이 안개처럼 작품을 감싸고 있거든요. 그게 뭘까? 그래서 난 이 작가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서 어떤 오솔길을 찾아내었다”라고 썼어요.

바타이유 아주 흥미로운 해석이군요. 하지만, 그건 제가 일부러 시도한 건 아녜요. 어쨌든, 아르투로에게 포스트모던한 데가 있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가 기계만을 만지는 건 아니거든요. 그는 지성의 인간이 아니라 직관의 인간이죠. 그는 생각하지 않고 느껴요. 특히 밤의 소리, 무한의 소리를 듣죠.

김정란 그 직관적 비논리가 폭발하는 장면이 강간의 장면 아닌가요? 아까도 말했지만, 난 그 장면이 너무나 좋았어요. 어떤 아름다운 잔인함. 아주 잘 형식화된 잔인함이라고 할까? 난 로도이프스카가 지르는 세 번의 비명 소리가 그녀의 아버지의 세 번의 야간 순찰과 겹쳐진다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네번째의 비명은 헬렌이 가지고 있는 그 아기 아닌가요? 어때요? 그 네번째 비명은 세계와 화해할 수 있을까요? 저는 노래가 될 수 있느냐고 묻고 있는 거죠.

바타이유 아기가 나오려면 일 년은 기다려야 하니까, 일 년 뒤에나 보아야 할 것 같은데…… (웃음) 어쨌든 그 아기는 희망의 기호입니다. 모두들 다 죽은 다음에도 한줄기 빛이 남아 있을 거라는 믿음이죠. 어쩌면 로도이프스카가 너무나 비현실적인 인간으로 느껴져서 그 아기의 아버지를 공자그로 설정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강간의 장면만 해도 그래요. 전혀 현실적이지 않거든요. 그건 강간이 아녜요. 피도 살도 없어요. 내가 써놓고도 비현실적 순간처럼 느껴져요.

김정란 전 로도이프스카를 작은 프란체스코라고 불렀어요. 그녀가 짐승의 말에 가까운 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녀의 비명은 일종의 말하기 방식 아닌가요? 응결된 말. 아니면, 말에 대한 거부로서의 말하기.

바타이유 이 비명에는 다른 뜻도 있습니다. 이건 로도이프스카가 시테에 말하는 방식이에요. 그 비명 때문에 시테 전체가 사건을 알게 되었거든요. 그리고 그 다음날 바닷가에서 아이의 시체를 발견하죠. 그런데 이상한 건,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러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죠. 헬렌도, 아르투로도, 그 누구도. 밤에 일하니까 분명히 깨어 있었을 아르투로도 꼼짝하지 않았어요. 이 비명은 반향이 없는 비명입니다. 무거운 납으로 짓눌려 있어요.

김정란 원초적 살인사건 같은 거죠.

바타이유 결과가 없는 행동.

김정란 이미 저질러졌고, 그리고 그것에 대항해서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건.

바타이유 , 정확해요. 그 때문에 내가 책 앞머리에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인용한 거죠. 시테는 침묵했지만, 분명히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었어요. 그게 바로 강간―부서진 살에 대한 비전, 그리고 그것이 어떤 위치를 가질 수 있느냐 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죠. 그런데 위치가 없는 거죠. 그건 그냥 벌어진 일일 뿐이에요. 이미지죠.

김정란 모든 게 나아질 거예요. 제로부터 다시 출발하면 되죠, 뭐.

바타이유 제로보다 못한 데에서 출발해야 할지도 모르죠. (웃음)

김정란 이 정교한 글쓰기가 어떻게 가능한가요? 어떻게 작업하세요?

바타이유 처음엔 몇 개의 이미지가 있어요. 베르사이유의 오두막에서 밤에 일하는 하인이 생각났다든가 하는 식으로 어떤 합리적 요소들이 있어요. 그런데, 나머진 어떻게 씌어지는지 잘 모르겠어요.

김정란 아마 천재성이 받아쓰기를 시키나보죠?

바타이유, 설마…….

김정란 바타이유 씨의 작품은 삶에 대해 깊이 절망한 사람이 쓴 책처럼 보여요. 어떤 이유라도 있나요? 어떤 인터뷰에선가 “난 현대가 추악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걸 보았는데…….

바타이유 그건 제 확신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때, 난 의식하고 있습니다. 부자이고, 힘세고, 과거가 찬란했던 나라 사람으로서 쉽게 하는 말일 수도 있다는 걸 말입니다. 내가 “세계는 추악한 곳이다”라고 말할 때, 그건 부자나라 국민의 예술적 시각을 말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제 느낌은 분명해요. 난 세계가 추악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진정한 유일한 이유예요.

김정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걸 문학의 이유로 생각하신다는 거죠?

바타이유 싸움입니다. 제 감각으론 언제나 싸움입니다.

김정란 역시 파스칼리엥다운 용어로군요. 벌써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던 싸움 아닌가요? 그렇게 젊은 나이에…….

바타이유 흥미로운 건, 세계가 추악한 곳이라면, 문학 역시 추악한 것을 사용한다는 얘기거든요. 예를 들어서 포크너는 강간에 대해서 무려 3백 페이지 가량을 쓰고 있어요. 그런데, 아름다움에 의해서, 그 추악함이 윤리적인 것으로 바뀌어버려요. 도스토예프스키도 그 비슷한 말을 했어요. 그의 말은 일종의 종교적인 언급이지만, 신의 현존 안에서든, 밖에서든, 전 아름다운 것을 찾아요.

김정란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니라면, 당신 책에는 어떤 종교성에 대한 믿음이 있어요. 신도 등장하지 않고, 신의 이름도 말해지지 않지만, 분명히 어떤 존재를 찾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요.

바타이유 그렇습니다. 신은 없지만, 신이라는 목표가 없는 건 아녜요. 하지만 성공하고 있지 못한 목표죠. 언젠가 난 신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죠. 내 등장인물들 중에서 그럴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은 헬렌뿐이에요. 사실, 신을 만날 수 있는 자질은 사랑으로부터 오는 것이거든요. 그녀만이 제대로 사랑할 줄 알죠. 사람들이 공자그에게서 용서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즉, 신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에요. 신에 대한 감각은 사랑을 통해 드러나거든요. 사랑에는, 그것이 아무리 괴상하고 폭력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어떤 기독교적 의미가 있어요. 자기자신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악마적인 것이죠.

김정란 이제 작품 밖으로 조금 나가볼까요? 약관 22세에 쓴 『다다를 수 없는 나라』부터 평단의 대대적인 조명을 받으셨는데, 그런 뜨거운 반응을 기대하셨나요?

바타이유 아뇨, 전혀. 하지만 칭찬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어요. 잘 썼다고 칭찬해준다고 들뜰 이유 없어요. 결국 저 자신에게 달린 문제죠.

김정란 요샌 예술적 재능을 가진 젊은이들이 몽땅 영화판으로 몰리는 추세잖아요? 프랑스만 해도 30세 미만의 재능 있는 시네아스트들이 진을 치고 있고…….

바타이유 그래요. 괜찮은 친구들이 많죠. 하지만, 영화는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거든요. 그 점도 중요한 요소죠.

김정란 문학은 지원 안 해줘요?

바타이유 문학은 없어요.

김정란 어떤 작가들을 좋아하세요?

바타이유 아직 잘 모르겠어요. 계속 발견해가고 있는 중이니까. 도스토예프스키, 포크너, 클로델, 보들레르, 랭보, 라 로슈푸코, 복음서 저자들, 생종 페르스 등등.

김정란 프랑스 문단은 어때요? 간단하게 묘사해줄 수 있어요?

바타이유 베르사이유죠. 좀더 요란하거나 덜 요란한 코스츔을 입은 15명 정도의 권력자들이 중앙에 포진하고 있고, 그들을 3천 명 정도의 궁인들이 둘러싸고 있죠. 어디나 다 똑같지 않은가요?

김정란 궁녀들은 없어요? (웃음)

바타이유 물론, 다행히도, 있죠. (웃음) 재능 있는 작가들이 많아요. 뚜렷하게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없지만, 기다려볼 만하다고 생각해요, 지금 프랑스 문단은 1895년 상황과 비슷하거든요. 말라르메와 랭보가 사라졌지만, 벌써 지드, 클로델, 발레리, 생종 페르스 등이 대기하고 있었거든요. 사르트르, 아롱, 들뢰즈, 푸코, 사로트 등의 대가들이 지난 삼십 년 동안 모두 세상을 떠났어요. 지금 나타나지 않았다 뿐이지 어딘가 숨어 있는 작가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영화는 정말 굉장히 힘차고 아름다운 걸 만들어내고 있거든요. 타르코프스키나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들은 정말 기차요. 같은 영화는 너무나 힘차고 아름답거든요.

김정란 아주 야만적이면서도 도시적이죠. 아름다운 잔인성. 그러면서도 생에 대한 아주 구체적인 감각이 있어요.

바타이유 카프카가 그랬어요. “책이란 무엇인가? 그건 균열이다.” 읽고 나서 무언가 깨어지는 느낌을 받아야 하는데, 요즈음 책들에선 그게 안 느껴져요.

김정란 영상 문화 앞에서 문학이 너무 주눅들어 있는 건가요?

바타이유 아뇨, 꼭 그렇다고 생각 안 해요. 물량적으로 하도 밀고 들어와서 그렇지, 많은 영화들은 쓰레기들이죠. 문학은 약한 입장이긴 하지만 폭발의 핵이 될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서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철』은 발표 당시엔 15페이지 정도의 팜플렛 같은 책이었거든요. 그 당시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김정란 그땐 영화가 없었잖아요. (웃음)

바타이유 글쎄, 그런가요? 어쨌든, 기다릴 줄도 알아야죠. 그래서 편집자의 입장에서도 전 대가들보다는 젊고 이름 없는 친구들을 돌보는 쪽이죠. 그들 중에 미래의 랭보가 있을지 어떻게 알겠어요?

김정란 당신 자신은 아닌가요? 이런 게 그야말로 독­아첨인가? 문학뿐 아니라, 인문학 전체가 상업주의 앞에서 맥을 못 추는 것이 세계적 추세인 것 같아요. 프랑스는 어떤가요?

바타이유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 자체의 위기라기보다는 출판 유통의 위기죠. 책들을 도통 안 사거든요. 그나마 인문학 책을 사는 사람들마저도 영성이나 종교에 대한 책들만 사요. 파라셀즈, 프리메이슨단, 연금술 등등. 인문학이 힘을 잃고 있는 반면에 신에 대한 추구는 강력하게 나타나고 있는 거죠.

김정란 그건 인문학이 대중의 요구에 대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요?

바타이유 그런 측면도 있겠죠. 어쨌든 이런 반응이 어떤 특별한 콘텍스트를 구성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아요. 하나의 콘텍스트가 끝났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일련의 현상들이 있어요. 사회학, 생태학 책들은 이미 충분히 소비되었거든요. 지금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는 시기인 것 같아요.

김정란 기다리면서, 당신의 문학이 훗날 폭발의 핵이 되길 바랍니다. 어쨌든, 지구의 어디에선가 진지한 태도로 글을 쓴 사람이 있다는 걸 안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운 일입니다. 오랜 시간 애쓰셨습니다.

바타이유 한국의 독자들을 만나게 되어 많이 기쁩니다. 앞으로도 다시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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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urblue > [퍼온글] 피카소의 드로잉 모음

 


Francoise in the Form of the Sun, 1946


Rooster


Permission Vega/Spadem

 

Dance of Youth


Woman/Flower, 1946


King Kagpha


Dove of Peace


Maternity


Evening Flowers


Portrait of Olga Picasso and Son


Fleurs et Mains


Head, 1946 (on special paper)


Dove of Peace - Sun


Dove with Flowers


Femme


War and Peace (embossed)


The Face of Peace


Sitting Nude 


Sur la Plage,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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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urblue > [퍼온글] 김지하는 왜 파시스트로 전락했는가?

  "김지하는 왜 파시스트로 전락했는가?"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6> 바그너와 김지하
  2005-08-11 오전 11:57:06
  파르지팔
  
  2001년 12월 런던에 도착한 이틀 후 아직 시차에 적응하지 못한 채로 코벤트가든의 로열오페라하우스를 향했다. 사이먼 래틀의 지휘에 의한 바그너의 <파르지팔(Parsifal)>의 공연날인 것이다.
  
  나는 오페라 애호가이지만 바그너에 한해서는 불과 세 번째 관람이었다. 분명히 말하자면 멀리해 온 것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십수 년 전에 빈국립가극장에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보고 아주 따분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건 내가 미숙했던 탓일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바그너와 반유대주의, 바그너와 나치즘이라는 곤란한 문제이다.
  
  뛰어난 예술을 정치적 이유만으로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바그너의 경우, 그렇게 말하고 끝내기에는 문제가 너무도 크다. 나치가 바그너를 이용했다고 하는 옹호론이 있는데 1850년에 '음악에 있어서의 유대성'이라는 논문을 공표했듯이 그자신이 19세기의 반유대주의이데올로기의 주요한 제창자였던 것이다.
  
  히틀러는 바그너에 심취한 사람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할 때 배낭에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악보를 넣어가지고 지냈다고 전해진다. 바그너의 음악자체에도 나치를 매료하는 요소, 국수주의나 파시즘에 이어지는 요소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것에 무경계해도 될 것인가? 이점을 바그너 애호가로 불리는 몇명에게 물어 본적이 있지만 속 시원한 대답을 들은 기억은 없다.
  
  그런데 실은 그 전해인 2000년 여름 잘츠부르크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본 것이다. 지휘는 병중인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대신해 로린 마젤. 나에게 있어 두 번째 바그너 체험이었다. 그게 좋았던 것이다. 불가해한 감동이었다. 더 알고 싶다는 강한 호기심이 솟아났다. 위험한데, 라고 생각한다. 생각하지만 호기심의 수위가 경계심보다 높은 것이다.
  
  공연은 오후 4시부터의 마티네였다. 토요일 오후인만큼 주위는 대단한 인파이다. <파르지팔>은 중세의 <성배전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로, 바그너 자신이 '무대 신성 축전극'이라고 부른 그의 생애 최후의 악극이다. 1882년에 이 작품을 완성해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에서의 초연을 성공리에 마친 후 바그너는 베네치아로 정양을 떠나 이듬해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
  
  * * *
  
  스페인 북부의 산지 몬살바트의 성주이자 성창(聖槍)과 성배(聖杯)의 수호자인 암포르타스왕이 요녀 쿤드리를 향한 애욕에 눈이 멀어 사악한 마법의 신 클링조르에게 성창을 빼앗기고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순수한 바보'인 파르지팔에 의해 구제되어 성창을 되찾는다. 파르지팔은 성금요일에 왕의 후계자가 된다.
  
  이런 식으로 줄거리를 써 본들 동화로밖에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이 단순한 스토리를 상연하는데 3막, 5시간 남짓의 시간을 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생각해 제 정신이라고 보기 어렵다. 바그너의 세계를 외부에서 바라보는 한 그것은 이해곤란이며 편집광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그 안에 들어가면 상황은 달라진다.
  
  나치제3제국의 선전 담당 장관 괴벨스는 1938년 "유대성과 독일음악은 그 성질부터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당연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독일적인 음악과 유대적 음악을 명확하게 구별해 인식하는 선을 긋는 것은 불가능하다. 제3제국의 문화 정책 이데올로기 이론에서는 바하, 베토벤, 헨델, 모차르트는 모범적이고 독일적으로 간주되었으며, 멘델스존, 말러, 쇤베르크, 코른골트, 쿠르트바이엘 등의 유대계 작곡가의 작품은 독일 음악의 모방에 불과하며, 기법에 치우치고, 깊이가 없으며 진부하거나 부도덕하다는 평가되었다. 힌데미트는 유대계는 아니었지만 문화 볼셰비키여서 배척당했다.
  
  이와 같은 나치에 의한 사이비 이론화 작업을 유리하게 만드는 데 대대적으로 인용된 것이 바그너였다. 나치즘 미학에서 바그너야말로 이상적으로 독일적이었던 것이다.
  
  '성배'란 예수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에서 쓴 식기로, 십자가 위의 예수의 상처에서 솟는 피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11세기부터 12세기에 걸쳐 이와 같은 '성유물'에 대한 숭배가 유럽전역에 퍼졌다. 십자군이 원정에 의해 동방으로부터 갖고 돌아 왔다고 하는 성유물,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피', 성인의 유골, 성의(聖衣)등이 성스러운 것으로 받들어져 그것을 모시는 성당이 각지에 세워졌다. 당시의 사람들은 그 성유물들이 실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부조리한 열광이 이교도인 이슬람교도나 유대교도에 대한 적의와 하나였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스도 수난극'도 이 시기에 전파되어, 일반 민중들 사이에 '유대인'은 '그리스도의 살인자'라는 반감을 심게 되었다. 각지에서 유대인 학살 사건도 다발했다.
  
  '성배'를 찾는 행위는 절대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행위의 은유이다. 암묵리에 소박하고 순진한 그리스도 교도인 파르지팔에 대비되는 것은 교활하고 신용할 수 없는 '유대인'이다. '유대인'을 타자로서 배제하고 그것과는 다른 '그리스도교도', '아리아인종', '독일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나르시스틱하게 강조하는 것에 성배 전설은 크게 기여했던 셈이다. 그에 더해 바그너는 이 전설을 먼 과거에의 동경, 헌신과 자기희생에의 도취, 초인이나 천재의 찬미와 같은 낭만주의 미학에 의한 일대 그림극으로 그려내었던 것이다.
  
  * * *
  
  이런 것들를 알고 경계심을 잔뜩 가지고 관람을 시작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다섯 시간 남짓한 상영 시간 내내, 시종 바그너의 악극이 지닌 불가사의한 광택에 매혹당하고 말았다. 내 머리 속에 전에 함부르크에서 본 프리드리히의 그림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높은 봉우리의 정상에 선 남자. 멀리 보이는 저편에는 험한 산봉우리가 이어지고, 지상은 구름의 바다에 덮여 보이지 않는다. 고독, 우울, 그리고 차가운 고양감. 프리드리히는 독일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바그너의 음악세계는 프리드리히의 회화 세계와 강렬한 친화성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통설을 몸으로 검증하고 있는 심정이다.
  
 
Caspar David Friedrich, , Oil on canvas, 94 x 74.8 cm, Kunsthalle, Hamburg, 1818. ⓒ프레시안  

  베토벤에서는 문제 있다고 생각되었던 래틀의 지휘가 바그너에서는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왕의 역을 맡은 토머스 함프슨의 가창도 일품이었다. 막이 내린 후 나는 흥분과 동시에 크게 당황했다. 한편에는 크나큰 감명이 있었으며 다른 한편에는 깊은 의문이 있었다.
  
  게다가 교양 있는 백인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관객들이, 오늘날의 이른바 '아우슈비츠 이후의 세계'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바그너에 도취되어 있는 것도 나에게는 섬뜩한 것이다. 또한 백인들과 마찬가지로 도취되어있는 일본인 관객의 대부분이 아마도 이와 같은 위험성에 무지할 것이 불안해 견딜 수없는 것이다.
  
  바그너의 음악에 자주 쓰이는 것이 '무한선율'이다. '무한선율'이란 '리듬적, 화성적인 단락의 느낌, 종결의 느낌을 가지지 않는 자유로운 선율'을 의미한다. 즉 '네, 그럼 여기서 일단락'이라거나 '자 이걸로 끝'과 같은 마디를 의식적으로 없애고 있는 것이다. 높이 올라갔는가 하면 다시 내려오고, 내려갔는가 싶으면 다시 올라간다. 커다란 음향이 귀를 울리는가 하면 가늘게 잦아들어가고, 사라졌는가 하면 다시 울려퍼진다. 끝없이 파도치고, 너울거리며,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계속된다. 드디어 끝났나 싶으면 다시 다음 물결의 너울이 밀려온다.
  
  처음에는 당혹감이 있고, 따분함과 피로감이 있지만, 일단 그 무한의 물결에 몸을 맡겨버릴 수만 있다면, 불가해한 관능과 고양감에 잠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장치가 되어있는 것이다. 아마도 다섯 시간이라는 긴 무대에서 오는 피로나 일종의 감각의 마비가 관객의 감성에 가져오는 효과까지 계산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바그너의 '종합예술'의 경우도 부르크너의 교향곡의 경우도, 음악과 듣는 이의 관계는 말하자면 '대등'한 것이 아니다. 바그너의 장대한 '물결의 너울거림' 속에 청자는 '몸을 맡겨야'하며 몸을 맡긴 청자는 부르크너의 음의 신전을 '우러러야' 한다. (클 H 케이터, <제3제국과 음악>, 아카시마 사노리 옮김, 水声社) 바그너는 물결의 너울거림에 몸을 맡기자, 바로 이게 특징이다.
  
  개인의 취향이나 취미, 의심이나 비판, 위화감이나 저항, 그와 같은 감정을 어쨌든지 일단 젖혀두고 말하자면 몰주체, 몰아의 경지로 나아가 거기에 몸을 두고 크나큰 물결의 너울거림에 몸을 맡기는 것, 그것이 바그너의 음악에서 감명과 도취를 얻는 최상의 방법이다. 그리고 그런 태도만큼 파시즘에 바람직한 것은 없는 것이다.
  
  예술과 정치는 별개다, 라는 말을 들을까? 그러나 나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범용한 예술이라면 어떤 정치와도 타협할 수 있을 것이다. 바그너의 예술이 뛰어난 점은, 바로 그 둘이 별개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그래서 고민스러운 것이다.
  
  성배민족(聖杯民族)
  
  코벤트가든에서 지하철을 갈아타고 본드스트리트에서 내려, 조용한 밤길을 걸어 호텔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누워도 아직 바그너의 무한선율이 몸속을 흐르고 있어 신경이 흥분되어 잠이 올 성싶지 않다.
  
  잠들지 못하는 채로 일본에서 가져온 잡지를 집어 들었다. <현대사상(現代思想)> 2001년 12월호, '내셔널리즘의 변모'라는 특집호이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는 바빠서 아무리 해도 읽을 시간이 없어, 그대로 여행 가방에 넣어가지고 온 것이다.
  
  거기에 실린 연세대학교 교수 김철의 '한국의 민족-민중문학과 파시즘 김지하의 경우'라는 논문을 무심히 읽기 시작했는데 금세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논문에 김지하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은 사명과 과제를 가진 민족입니다. 뛰어난 전통, 영적인 전통을 가졌으면서 오랜 고난 속에서 수난만 받아온 고난의 민족입니다. 한 문명의 쇠퇴기에는 반드시 인류의 새로운 생의 원형을 제시하는 민족이 나타납니다만, 그 민족을 성배의 민족이라고 합니다.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지배할 당시에는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지금은 한민족입니다. (<사상기행 2>)
  
  또 '성배'라니. 이것은 어찌된 우연인가. 바그너로부터 기분을 바꾸려고 하는 참인데 여기서도 '성배'와 만나고 만 것이다.
  
  김철의 논문은 1970년대 한국 민주화 투쟁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민족-민중문학론(그 대표적 표현자인 시인 김지하과 이론가인 백낙청)이, 오늘날에는 과거에는 투쟁의 대상이었던 파시즘과 심정과 이론을 공유하고 상호침투해 마침내는 공범관계를 이룬다고 하는 빠져나갈 길이 없는 모순과 배리에 빠져버렸다, 이렇게 주장한다. 과거에는 식민지주의나 파시즘에 대한 저항의 정신적 근원이었던 내셔널리즘이, 오늘날에는 국수주의, 파시즘사상으로 전락해버렸다, 그 주된 원인은 민족-민중문학론이 '민족'이나 '민중'이라는 개념을 근본적으로 묻지 않고, 자기완결적으로 절대화해 온 것이 있다는 것이다.
  
  논문을 읽고 심경이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논자의 주장에 반대해서가 아니다. 그 반대인 것이다. 이와 같은 논의는 내게는 처음이 아니었다. 나 자신 1995년에 '김지하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을 통해 그의 국수주의 사상으로의 전락을 비판한 적이있다. (<분단을 산다>, 影書房)
  
  김철의 논문이 지적하듯, 김지하가 하는 말은 어리석고 황당하고 논리성을 결여하며 전형적인 국수주의성향을 보이는 것은 틀림없다. 그 점을 다시 한번 인식해야만 하는 것은 유쾌하지는 않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어버렸는가. 저 80년대의 어둡고 험난했던 날에 김지하라는 이름이 얼마나 특별한 것이었는지 상상할 수 있을까.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타는 목마름으로>, 창비, 1982)
  
  1970년대의 김지하의 대표작 <타는 목마름으로>이다. 이것은 신에게 선택받은 위대한 '성배민족'을 찬양하는 노래가 아니다. 뒷골목에서 흐느껴 울며, 나무 판자에 남몰래 '민주주의만세'라고 쓰는 사람들의, 자유를 갈망하는 노래이다. 여기에는 의심할 바 없이 한국이라는 하나의 국가를 꿰뚫는 보편적인 인간해방에의 지향이 있다.
  
  나 자신, 1970년대초 두 형이 투옥돼 재일조선인으로서 일본에 살면서 바로 타는 목마름으로 자유, 자립, 한국의 민주화를 절절히 바라고 있었다. 당시 나는 한국이 민주화되어 형들이 해방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마음으로부터 믿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런 날은 끝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인생을 의의 있는 것으로 만들기를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나는 주관적 상상에 있어서는 김지하로 대표되는 민족-민중문학을 매개로 해 민주화 투쟁를 하는 한국의 동포들에 속해 있었다. 그것은 내가 일본이라는 장소에서 사는 재일 조선인 2세로서 스스로의 생의 의의와 방향성을 모색하는 데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살기 위해 필요했다고까지도 할 수 있다.
  
  그랬는데, 지금은 어떤가? 그 무렵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형들은 둘 다 살아서 감옥으로부터 풀려났으며 한국사회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민주화의 길을 걸었다. 잇따른 시련이 계속되고는 있으나 저 '한 시대'는 과거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탑과도 같이 우뚝 서 있던 시인은 '성배의 민족' 운운하는 국수주의자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이전에 1970년대 한국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진정으로 괄목할 만한 움직임을 보였던 한국 민중 신학이 지금은 김지하와 '선민사상(選民思想)'을 공유해 '일종의 자기중심주의, 나르시시즘'에 전도해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우려를 표한 적이 있다. 그리고 재일 조선인과 같은 '디아스포라의 조선인'을 시야의 밖에 두지 말고 오히려 어떻게 하면 '디아스포라'와 과제를 공유할까를 생각하는 것이 자기 중심주의의 함정을 피하는 길에 통할 것이라는 생각을 썼다. ('재일 조선인은 민중인가', <반난민의 위치에서>, 影書房)
  
  물론 김지하 한사람이 1970년대 저항 내셔널리즘의 대표는 아니다. 이 시인은 오히려 과격한 예외라는 견해가 있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70년대를 그와 함께 겪은 사람들 속에서 강하고 이성적인 비판이 나오지 않는 걸까.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내가 피억압민족에 의한 해방과 자립을 위한 운동들이, 언제든 어디에서든 불가피하게 자기중심주의나 국수주의에 전락해버리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고 결론짓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을 외면한 시니컬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생각은, 식민지지배의 책임을 인정하게 않으면서 피억압민족의 저항을 눈의 가시처럼 느끼는 사람들에게만 환영받을 것이다.
  
  내셔널리즘을 넘는다는 것은 '선진국'이라는 안락한 장소에서 '선진국'으로서의 기득권을 의심 없이 향수하면서 타자를 내셔널리스트라고 지칭하면 그걸로 되는 것이 아니다. 피억압자가 저항을 위해 내셔널리즘을 필요로 하는 상황, 피억압자를 내셔널리즘에 결집시키는 억압구조,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방향성을 결여한다면 그 담론은 '내셔널리즘'이 아니라 '저항'을 무력화시키는 힘으로만 작용할 것이다.
  
  197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내셔널리즘'이라는 한 마디로 아우르는 것도 하물며 그것을 김지하로 대표하게 하는 것도 단락적인 시각에 불과하리라. 그것은 무엇보다 해방과 자립을 위한 투쟁이었다. 그것은 내셔널리즘에서 기독교, 자유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정치적 입장의 상이를 지니고, 군사 독재 타도라는 공통의 목표로 묶인 일군의 사람들이 진 역할이었다. '김지하'란 그와 같은 다양한 사람들의 집합을 상징하는 집합명사였다. 시대의 변화, 상황의 진전은 그 집합적 '인격'의 분열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분열과정을 거쳐 한국의 저항 내셔널리즘이 더 보편적인 인간해방의 사상을 향해 스스로를 열어 가는 가능성을, 나는 단념하고 싶지 않다.
  
  지금의 한국에서는 1970년대, 1980년대에 군사 정권과 싸운 세대가 사회 각 분야의 중핵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의 대부분은, 하나의 시대, 하나의 사회의 주인공으로의 자신에 넘쳐있다. 김철이라는 논객도 자신이 한국이라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시련의 한 시대를 살아왔다는 자각에는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그의 논의는 저항 내셔널리즘의 바람직한 분열과정을 촉구하고, 그 최량의 자산을 내일에 살리는 것에 기여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해서 어떤 한시대의 변혁을 중심에서 짊어졌던 '우리'는 해체돼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답할 수 있는 다음의 '우리'가 형성된다. 다이나믹한 분열과 종합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새로운 시련에 맞서는 새로운 운동과 사상이 단련을 받아갈 것이다.
  
  내 심정이 혼란되어 있는 것은, 나 자신이 그와 같은 다이나미즘의 '밖'에 놓여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한국의 동포들과 똑 같은 고통을 체험한 것은 아닐지라도, 나 또한 '시련의 시대'의 수인(囚人)의 몸이었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허락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난 30년을 '밖'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20대부터 50대라는, 사람의 인생의 중심을 이루는 세월이었다.
  
  나와 같은 디아스포라와 한국 동포들이 투쟁을 통해 '합류(合流)'하는 것이 1970년대초에 내가 막연하게 지니고 있던 비젼이었다. '합류'란 한국 민중 신학의 용어이다. 그러나 '합류'는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 나는 자신이 여전히 '밖'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 인생의 유한한 시간이 그렇게 지나갈 것이라는 것을 런던의 오래된 호텔에서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번역 : 김혜신 가쿠슈인대학 강사(미술사)
   
 
  서경식/일본 게이자이 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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