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urblue >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인터뷰
새로운 문학이 시작되고 있다. 영상문화에 떠밀려, 아주 작은 골방으로 들어온 문학. 그러나 그 문학은 초라해 보인다기보다는 겸손해 보인다. 그 겸손은, 세계사적 전통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 자가, 즉각적인 세계의 참조 사항이, 즉 존재의 당대적 외적 가치부여 방식이 더이상 밑돈을 대주지 않는 자리에서, 존재의 조건 자체로부터 자신의 존재론적 의미를 길어올린다는 의미에서, 동시에 대단한 오만이기도 하다. 이 문학은, 세계에 대고 정당성을 인준해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아주 고요하지만, 그러나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의미에서 격렬하다. 그 문학은 20세기를 건너뛰어 격세유전적 근원에게로 나선형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문학을 예고하는 한 젊은 작가가 우리 곁을 찾아왔다. 아직은, 속단일지 모르지만, 이 작가는 미국식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유력한 대안으로 보이는 프랑스적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수가 될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대담자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우리의 성정은 미국사람들보다는 이들에게 더 가깝다. 그를 찬찬히 읽는다는 것은, 자본의 음모에 휘말려 헐떡이고 있는 세기말의 한국인에게 문학적 의미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참고 삼아서 말한다면, 거대 담론들에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젊은 작가에게 일반적인 얘기를 묻는다는 게 의미 없다고 느껴졌으므로, 그의 작품, 특히 최근작 『시간의 지배자』를 중심으로 대담을 진행시켰다. 좋은 작가는 무엇보다 작품으로 충분히 말하는 사람이니까. 따라서 작품을 미리 읽고 이 대담을 읽는 것이 훨씬 더 이 작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말을 덧붙여둔다.
김정란 우선 바보 같은 질문부터 던져보기로 하죠. 왜 경영학을 그만두셨어요? HEC를 나오셨는데, HEC라면 프랑스에서 최고 수재들이 진학하는 학교 아닌가요? 빛나는 장래가 보장되어 있었을 텐데…….
바타이유 경영학을 택한 건 실수였어요. 리세(중고등학교 통합과정) 다닐 때 공부를 잘했어요.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대개 택하는 진로 중 하나를 택했던 것뿐이죠. 왜 경영학을 공부해야 하나 하고 자신에게 질문도 던져보지 않고 열여덟 살에 경영학 에콜에 입학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자, 내가 정말 마음 깊이 하고 싶어하는 건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경영학을 선택할 당시의 제 모습은 많은 프랑스 학생들의 이미지와 같아요. 어떤 일이 생길지 생각도 해보지 않고, 무슨 수단을 쓰든 직업을 얻으려고 하는 젊은이들의 이미지 말입니다.
김정란 아주 훌륭한 학생이었을 거예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아주 훌륭한 작가가 되었고.
바타이유 아, 그건 잘 모르겠어요. (웃음)
김정란 아니오, 진심으로 드리는 말이에요. 바타이유 씨의 처녀작을 읽고 전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스물두 살짜리가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을까, 하고 말이죠. 삶의 어떤 면모를 정확히 파악하고 쓴 작품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마치 나이가 지긋한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 쓴 글 같았거든요. 젊은이답게 감각이 날카로우면서도, 완벽한 자기 통제력 같은 게 느껴졌거든요. 이번 작품 『시간의 지배자』도 마찬가지였구요.
바타이유 그건 아마도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노인을 나레이터로 설정했기 때문에 오는 효과일지도 몰라요. 생의 경험이 없이 글을 쓴다는 것이 당연히 두렵게 느껴졌거든요. 그래서 늙은 대사를 나레이터로 선택한 거죠. 그는 자신이 잘못 살았다고, 권력과 돈을 찾아다니며 삶을 탕진했다고, 이제 내 삶은 공허 속으로 추락할 거라는 회한에 시달립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글쓰기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죠. 왜냐하면, 이 남자가 글쓰기를 통해서 구원과 부활을 꿈꾼다는 게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품 첫머리에서 그가 여인들의 속옷과 치마들이 던져져 있는 강가를 배회하는 거예요. 썩어갈 우리의 육체를 감싸는 이 옷감들로 이제 종이가 만들어질 테니까요. 그 종이들, 책장들을 가지고 그는 자신을 구원할 거예요.
김정란 와, 무거운 주제군요. 글쓰기와 구원의 주제.
바타이유 그렇습니다. 하지만 전 이 작품에서 특히 죽음에 대해 썼어요.
김정란 첫번째 작품 『다다를 수 없는 나라』에서도 죽음의 주제가 나왔잖아요? 죽음이 앞뒤로 맞물려 있었죠.
바타이유 조금 달라요. 『다다를 수 없는 나라』에서 다룬 주제는 사라짐과 버림받음이죠. 예를 들면, 일곱 살에 프랑스에 온 어린 왕자 칸은 완전히 홀로 버림받고 병들어서 혼자 죽어요. 끔찍한 일이죠.
김정란 바타이유 씨에겐 그게 삶의 근본적인 조건인가요?
바타이유 그렇습니다. 전 파스칼 식으로 교육받았습니다.
김정란 아, 그래요. 바로 그 점 때문에 제가 바타이유 씨 작품을 특히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시간의 지배자』 끝부분에 나오는, 세 번의 비명 있잖아요? 그 장면이 특히 그랬어요. 인간의 근원적인 비참을 알리는 비명. 마르그리트 뒤라스 작품 안에도 그 비명이 나오죠. 뒤라스도 아주 파스칼적인 작가잖아요? 저 역시 마음속 깊이 파스칼적인 인간이거든요.
바타이유 가톨릭 리세를 십이 년간 다녔습니다. 프랑스에선 드문 일이죠. 사제들에게서 교육받았다는 것이 제 문학의 모든 특성, 특히 문학을 통한 구원이라는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선 상당히 중요한 점인 것 같아요. 신을 믿건, 그렇지 않건 상관없이 제 주인공들은 인간의 비참이라는 문제 앞에 홀로 대면하거든요.
김정란 『시간의 지배자』를 번역하기 전에, 일간지에 난 기사들을 대충 훑어보았습니다. 인터뷰에서 밝히신 바에 따르면, 베트남 여행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라구요. 왜 하필 베트남인가요?
바타이유 유럽을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 거예요. 대학에서 경영자 수련과정으로 외국 트레이닝 코스가 있었거든요. 처음엔 스위스엘 갈까, 아니면 영국엘 갈까 하고 망설였죠. 그러다가 베트남을 택하게 되었는데, 스무 살짜리 젊은이들이 잘 그러듯이 어떤 도전의식 때문이었을 겁니다. 내가 잘 모르는 이국적인 나라를 택하자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오 개월 과정으로 베트남으로 떠났는데, 그곳에서 겪었던 고독이 내 정신에 깊이 각인되어버렸어요.
지독한 더위였어요. 그리고 말도 못하게 끈적거리구요. 식물들은 무시무시하게 울창하고요. 많이 힘들었죠. 왜냐하면 집에서 떠날 때만 해도 전화를 하거나 팩스를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돈이 별로 없었거든요. 그런데 전화 비용은 엄청나게 비싸구요. 그 누구하고도 이야길 나눌 수 없었던 거죠. 프랑스에 돌아온 뒤에, 그 고독의 경험을 글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20세기 말에 혼자가 된다, 자, 그럼 3세기 전 어느 날인가 자신의 삶을 구원하기 위해서 베트남으로 떠났던 그 선교사들은 어떤 걸 느꼈을까. 난 그렇게 해서 태어난 내 첫번째 소설 『다다를 수 없는 나라』가 일종의 기도였다고 생각해요. 100페이지 정도 되는 짧은 책인데, 포교를 포기하고 수도사들에게 금지되어 있는 사랑을 하고 죽어가는 수녀와 수사의 이야기죠. 스무 살짜리가 그런 이야기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엉뚱한 생각이었죠. 그렇지만, 중요한 건 내가 버림받음과 침묵에 대해 쓰고 싶어했다는 사실이었다고 생각해요.
김정란 그러나 역사가 있잖아요? 대문자로 씌어지는 역사일지는 몰라도. 한 명의 아시아 여자로 난 이 선택에 관심이 많거든요. 작가는 왜 하필 식민주의에 의해 고통당한 나라를 선택했을까? 그 고독은 바타이유 씨에겐 개인적인 고독이지만, 제겐 베트남의 고독으로 느껴져요. 특히 고통스러워하는 나라의 고독으로요.
바타이유 제가 1992년에 이 나라에 가겠다고 결정한 건 어쩌면 역사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요. 천 년간 중국인의 지배하에 있었고, 백오십 년간 프랑스인에게 식민통치를 받았고, 삼십 년간 공산주의 지배를 받은 나라였으니까요. 겉으로 보기에 사이공 같은 도시는 멀쩡해 보이죠. 아시아의 파리라고 불리기도 하잖아요? 하지만 그건 겉모습일 뿐이죠. 겉모습 아래엔 학살과 전쟁의 피가 가득 차 있어요. 그러니까 프랑스인에게 베트남을 향해 다가간다는 건 회한을 향해 다가간다는 의미예요. 베트남은 프랑스에겐 커다란 실수니까요. 난 소설 속에서 그 실수를 향해 두세 명의 수도사들을 데리고 다가갔던 거죠. 굉장한 야심이었어요. 그런데 그들은 베트남 안에서 점점 더 조국과 종교로부터 버림받게 돼요. 그리고 점점 더 자유로워지죠. 점점 더 헐벗고요.
김정란 주인공들이 현대적 삶으로부터 떠날수록 베트남의 오지로 들어가고, 오지로 들어갈수록 높은 곳으로 올라가도록 설정하셨더군요.
바타이유 그건 해방과 상승을 말하는 장치입니다. 세속의 삶으로부터 떠나서 그들은 자신의 따스하고 가벼운 육체를 발견해요. 자신들을 육체적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죽습니다. 죽을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겉으로 보면 이들이 불행해 보일 수도 있어요. 모든 접촉을 잃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았으니까요. 그렇지만 마지막 장면에 그들은 미소를 짓고 있죠. 그리고 그들의 모습에는 어딘가 신성한 데가 있어요. 이 책의 결말은 주인공들로서도 전혀 예상치 않은 것이었을걸요.
김정란 한국에선 선교사의 이미지가 좀 그래요.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어떤 역사적 상처로부터 자유롭질 못한데, 선교사들이 많은 경우 식민정책의 첨병 노릇을 하니까…….
바타이유 제 선택은 어렵지 않았어요. 병사들은 베트남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죠. 반면에 수도사들은 경직되어 있는 선교사들, 즉 식민주의자들이 아니었어요. 그들은 부드럽고 단순한 사람들이었죠. 그들과 베트남 사람들은 서로 가까워지죠. 베트남 사람들은 개종하지 않았어요. 개종한 건 오히려 수도사들이죠. 그들은 그들의 단순한 교리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포기해버려요. 그들은 자기들이 환경 때문에 신앙을 잃게 되리라곤 생각지 않았겠죠.
김정란 하지만 그들과 원주민들은 새로운 신앙 안에서 만난 것 아닌가요? 도그마가 아닌 신앙 말예요. 아니, 오히려 새로운 조건이라고 말해야 할까?
바타이유 그래요. 새로운 조건이죠. 인간성에 대한 확신이라는 조건. 처음에 그들은 별로 인간적이질 않았죠. 왕의 명을 받아서, 십자가를 들고, 제복을 입고 도착했으니까. 그들이 새로 발견한 신앙은 일종의 혼합 종교죠. 가톨릭적 바탕에 더하기 지혜, 젊음, 우주 안에서의 현존.
김정란 바타이유 씨 첫번째 소설을 읽고, 아주 소박하지만 동시에 오만한 작품이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생의 문제, 아니면 패러독스를 해결하고 싶어한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상업성은 없겠지만, 그건 굉장한 형이상학적 야심이죠.
바타이유 사실 오만한 책이긴 하죠. 제 말은 해피엔딩으로 끝났더라면 그럴 뻔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책은 비극으로 끝나죠.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은 겁니다.
김정란 장래가 보장된 직업을 버리고 작가가 된 것도 일종의 오만 아닌가요? 글 써서 먹고살기 힘들잖아요? 그 선택 자체가 물질주의에 대한 저항, 또는 도전 아녜요? 내가 과장하는 건가요? 바타이유 씨 책이 많이 팔릴 것 같지는 않은데…… 프랑스라고 해도 말이죠. 어쨌든 『람세스』처럼 팔리진 않을 거잖아요. (웃음)
바타이유 불행히도 아니죠. (웃음) 하지만 주제에 비하면 꽤 많이 팔렸어요. 제 책이 무척 어둡잖아요. 아까 오만과 도전이라는 말을 하셨는데, 그래요, 사실 그렇죠. 하지만 전 작은 사물들을 통해서 생의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해요. 『시간의 지배자』는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해서 모든 것을 유지시켜보려고 하는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예요. 무질서는 죽음이니까요. 그러니까 그건 죽음을 해결하려는 시도죠. 그런 의미에서 오만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하지만 작은 기계장치, 여기서는 시계를 통해서 추구가 이루어져요. 『시간의 지배자』는 시간에 대한 형이상학적 소설이 아닙니다. 시간에 대해서 뭘 말할 수 있겠어요? 시계를 선택한 건, 그건 그냥 말하는 방식일 뿐이죠. 시간을 맞추는 주인공은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어요. 어떤 의미에서 그는 범죄자예요. 죽음, 그의 시계에 너무나 신경을 쓴 나머지, 그는 오히려 카오스가 시테 안에 자리잡게 만들어요. 카오스는 시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강간당한 그의 딸을 통해 시테 안에 들어오죠. 왜냐하면, 강간이란 찢어진 살을 의미하는 것이고, 카오스는 살 안에 깃들여 있는 것이니까요. 헬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사랑에 대한 감각을 가진 여자, 부드럽고, 섬세한 헬렌은 책의 끝부분에서 다시 아기를 가지게 돼요. 아르투로가 떠난 지 한참 뒤인 이 년 후에 가진 아기이니까, 아르투로는 아버지일 수가 없죠. 아버지는 결국 공자그겠죠. 그렇게 부드럽고 아름다운 여자에게 공자그라는 시체를 연인으로 가지게 한다는 건, 그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에요.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고 도망쳐버린 아르투로는 그런 의미에서 범죄자입니다.
김정란 해결하지 않은 게 아니고,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셨던 것 아닌가요?
바타이유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오만하지만 동시에 겸손한 소설입니다.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이에요. 나레이터 역시 죽을 사람이죠. 죽을 사람이 한 소녀의 죽음에 대해 말하는 형식을 택한 겁니다. 장소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는 베르사이유에서 말하지만, 불 꺼진 베르사이유, 끝나버린 베르사이유, 가을의 베르사이유예요.
김정란 바타이유 씨의 소설 세 권이 모두 바로크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거든요. 그 시대에 특별히 매혹되어 있는 건가요?
바타이유 편의상 그 시대를 선택한 것이기도 해요. 『다다를 수 없는 나라』를 예로 든다면, 만일 오늘날을 배경으로 베트남에 대해서 썼다면 우스꽝스러웠을 거예요. 제가 택하는 시대는 역사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역사 밖에 있지요. 과거 시대를 택하면, 덤으로 생겨나는 효과가 있어요. 깊고 비극적인 울림이 생겨나거든요. 『시간의 지배자』도 마찬가지예요. 난 이 소설이 당대적이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게 똑같아요. 권력과의 관계, 남자들의 행태, 여자를 취급하는 방식. 난 이 책이 과거의 텍스트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비극적 차원은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어요. 신하들과 공자그의 관계는 기업에서 사장과 근로자들이 맺는 관계와 똑같아요. 인간 조건의 차원은 전혀 바뀌지 않았어요.
그러나 내가 이 시대(1700~1715년경)를 택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이 시기는 루이 14세 시대 말기입니다. 루이 14세의 시대는 멋진 시대였지만, 절망스러운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왕은 지치고, 왕궁을 유지하기도 힘들고, 몰래 후궁들을 계속 맞아들이고…… 그러니까 그 시대는, 제 소설에 나오는 메타포를 인용한다면, “바위에 깃들여 있는 죽음”이에요.
김정란 전 이 시대의 선택을 그렇게 해석했어요. 이 작가는 20세기의 인류가 기대고 있었던 패러다임이 부서져버린 것을 예감하고, 20세기 패러다임의 근원지로 돌아가본 거라구요. 즉 근대성 패러다임, 국가 정체성을 발생시킨 근원지지요. 근원지로 돌아가 옛날 패러다임이 발생시킨 타자들을 뒤져내는 거라고요. 그래서 궁전의 하인들을 주인공으로 택한 것 아닌가요?
바타이유 탁월한 해석이군요. 하지만 난 그렇게 깊이까지 생각했던 건 아닙니다. 내가 궁정 하인들에게 관심을 가진 건 사실이에요. 그래서 밤에 촛불을 들고 시계를 맞추러 복도를 돌아다니는 사나이의 이미지가 얻어졌죠. 난 무엇보다도 왕국의 어떤 비전을, 천국의 이면을 살펴보고 싶었어요. 밤에 일하는 사람들이 발견했을 비전, 어떤 형태, 어슬렁거리는 그림자. 낮의 사람들인 권력자들은 그걸 보지 못하죠. 그에겐 모든 것이 가려져 있어요. 낮의 베르사이유는 우월한 버전이죠. 그러나 다른 버전도 있어요. 그건 베르사이유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분지, 호수, 늪지대예요. 그건 결국 디오니소스적 통행로, 켈트적 요소들이죠. 다른 쪽에는 태양왕 루이 14세와 함께 프랑스적 질서가 자리잡고 있고요. 사물들을 질서 속에 유지시키려고 애쓰지만, 한순간 디오니소스가, 옛날의 바탕이 돌아옵니다. 그건 폭력성, 잔인함이죠. 바위 속에 숨겨진 저주처럼 말예요.
김정란 시테의 어두운 분위기가 그걸 말해주는 장치겠군요. 주인공 이름 아르투로가 재미있어요. 전형적인 유럽 이름이면서도 혼성 문화적이거든요. 귀족적인 이름인데, 어쩐지 좀 동양적으로, 타르타르적으로 느껴져요. 어떻게 정해진 거죠?
바타이유 좀 우스꽝스럽게 보이라고 그렇게 정했어요. 프랑스어로 O로 끝나는 이름은 어쩐지 좀 웃기게 들리거든요.
김정란 아더와는 연관이 없나요? 킹 아더? 그도 역시 세계의 구원자가 아닌가요?
바타이유 약간은요. 카멜롯의 아더 말예요. 그러나 프랑스에서 아르투로는 촌스런 이름이에요. 아르투로는 키가 크고, 패션감각도 없고, 말도 할 줄 몰라요. 한마디로 농부 같은 사람이죠. 아르투로는 침묵입니다. 반면에 헬렌은 말을 잘하죠.
김정란 그건 이를테면, 문학의 자질 아닌가요?
바타이유 아르투로헬렌 부부를 통해서 내가 보이려고 했던 것은, 오히려 어떤 구어 전통 같은 것이었어요, 헬렌은 목소리이고, 아르투로는 육체지요.
김정란 아, 그래요! 몸이 알고 있는 언어, 남자들에게서 사장되어버린, 남자들이 어둠 속에 파묻어버린, 그러나 여자의 음성을 통해서 햇빛 속으로 불려나오는 말이란 말이군요. 이를테면 어떤 ‘잠재적 문학’ 같은 개념이겠군요!
바타이유 틀림없습니다. 정확하게 보고 계시군요.
김정란 내게는 로도이프스카가 그 언어의 상징일 거라고 생각되었어요. 그러나 바타이유 씨는 작품 말미에서 그녀를 죽여버렸죠. 그녀는 삶 안에서 생존 형식을 얻지 못해요. 난 그녀가 아직 오지 않은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바타이유 바로 그렇습니다. 그녀의 얘기는 좀 복잡합니다. 처음엔 로도이프스카를 중심으로 얘기를 해나갈 생각이었거든요. 그런데 쓰다보니까 조금 달라졌어요. 그녀에 대해선 아직 무언가 잘 쓰지 못하겠더라구요.
김정란 로도이프스카는 사랑할 줄 모르는 남자에 의해 강간당하죠. 공자그는 여자의 살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니까. 공자그는 나에겐 물질주의, 또는 권력의 상징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타이유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는 소유에 대한 광기이죠. 그와 로도이프스카의 관계는 미묘해요. 공자그가 로도이프스카를 소유하려 했는지, 아니면 아르투로의 딸을 소유하려 했는지 분명하지 않거든요. 공자그는 로도이프스카를 소유함으로써 아르투로를 지배하려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로도이프스카는 일종의 전달 장치인 셈이죠. 로도이프스카를 소유한다는 건 공자그에게는 아르투로에게 누가 아르투로의 주인인가를 보여주는 방법도 되는 거죠. 아르투로는 복수하지 않고 도망가요. 떠나버리죠.
김정란 아무 데로나 가버리죠. 아니면 아무 곳도 아닌 곳으로 갔든가.
바타이유 사라진 거예요. 공자그의 태도를 ‘권력’말고, ‘권태’로 설명할 수도 있어요. 그는 여자, 문학, 도서관, 그런 식으로 계속 오락을 찾아다니죠. 결국 마지막엔 로도이프스카를 강간하죠. 그의 마지막 오락은 잔인함이죠. 그것이 강간의 동기예요. 한순간, 그는 한 여자의 육체에 물리적인 힘을 행사함으로써 진짜 힘을 소유했다고 느끼는 거죠. 중요한 건, 그녀가 자기가 파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거예요. 그것이 강간의 도착적 쾌락이죠. 그건 더 나쁜 일이에요.
김정란 『시간의 지배자』에선 시계가 중심 상징으로 나오죠. 218개의 시계가 나오는데, 그 숫자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나요?
바타이유 아뇨. 난 숫자를 믿지 않아요. 무엇인가 의미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정말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난 그것이 엄청난 숫자라고 생각해요. 엄청날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근거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베르사이유에는 약 6백 개 정도의 벽시계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2백 개 정도는 가능한 숫자죠.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샤를르 캥(샤를르 5세)이 스페인의 성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을 때 일인데요. 어느 날인가 꿈속에서 40개의 벽시계가 한꺼번에 울리는 꿈을 꾸고 그것을 실현해보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물리학자들이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는 거예요. 40개의 벽시계는 수학적으로 무한에 가깝다는 거지요.
김정란 아르투로의 태도 중에서 특히 나에게 흥미로웠던 것은, 그가 한 시간 늦게 가는 고장난 시계를 다 분해하고 난 뒤에, 고장난 것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런 거예요”라고 말하는 장면이었어요. 모순을 견디는 태도지요. 말하자면, 어떤 동양적 견딤, 똘레랑스를 알고 있는 거죠.
바타이유 그리고 동시에, 그가 나약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 나약함 때문에 그는 로도이프스카를 공자그의 품에 내던지죠. 물론, 그 때문에 그가 공자그처럼 편집광적 인간이 되지 않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는 결국 운명이 굴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사람이에요.
김정란 그건 결국 『시간의 지배자』 전체를 덮고 있는 쇠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헝겊’과 ‘속옷’의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지 않나요? 몸에 아주 가까운, 꼭 조이는 코사쥬, 투명한 헝겊. 아르투로가 오간디 보자기 위에 시계 부품을 늘어놓는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바타이유 그 장면에서 드러나는 건 특히 살과 시간과의 싸움이죠. 아르투로는 그래서 매일 밤 시계 부품들을 재조립하는 거지요. 하지만, 공자그는 그걸 잘 견디질 못해요. 그는 분명히 살을 택했으니까요.
김정란 아르투로는 밤의 존재지요. 그렇지만 헬렌과의 결혼에 의해서 그는 낮의 자질을 흡수하게 되잖아요? 여자의 존재에 의해서 디오니소스적인 살이 아폴로적인 살로 바뀌잖아요. 결혼 전에 문을 꽁꽁 닫고 커튼을 치고 살던 그가 결혼 후에 비로소 빛을 만나는 걸로 묘사하셨던데…….
바타이유 정확히 말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냥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서른다섯 살이나 마흔 살 먹은 독신남성이 사는 방식 말예요. 엉망으로 살죠. 여자를 얻으면 사는 게 좀 나아지니까. (웃음)
김정란 에이, 그것만은 아닌 것 같던데요. 아르투로의 아파트는 작품 안에서 중요한 상징적 역할을 하고 있던데요.
바타이유 그래요. 솔직하게 말하면 그래요. 아르투로의 아파트는 왕궁 안에서 무질서가 허용되는 유일한 공간이에요. 그 무질서를 누리기 위해서 ‘다른곳’으로 갈 필요가 없다는 거죠. 왕궁은 일종의 공식적인 장소예요. 모든 것이 조직화되어 있죠. 궁정사람들은 온갖 잡동사니들이 널려 있는 그곳에서 스스로에게 약간의 가벼움을 용인합니다. 아르투로의 아파트는 약간의 카오스예요.
김정란 포스트모던한 태도죠. 카오스를 로고스로 통제하지 않고 견디는 거죠. 그런데, 아르투로는 시계를 꼬박꼬박 맞추거든요. 그건 분명히 모던한 태도구요. 그건 바타이유 씨 작품 전반에서 읽히는 완벽한 통제력과 맞물려 있어요. 그런 특성을 어떤 평론가들은 ‘고전주의적’이라고 보고 있는 것 같구요. 그런데, 이게 아주 흥미로운 부분인데요, 바타이유 씨 작품은 그렇게 통제되어 있고,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는데도 어딘가 부서져 있어요. 어떤 신비한 비논리, 또는 비규정성이 안개처럼 작품을 감싸고 있거든요. 그게 뭘까? 그래서 난 이 작가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서 어떤 오솔길을 찾아내었다”라고 썼어요.
바타이유 아주 흥미로운 해석이군요. 하지만, 그건 제가 일부러 시도한 건 아녜요. 어쨌든, 아르투로에게 포스트모던한 데가 있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가 기계만을 만지는 건 아니거든요. 그는 지성의 인간이 아니라 직관의 인간이죠. 그는 생각하지 않고 느껴요. 특히 밤의 소리, 무한의 소리를 듣죠.
김정란 그 직관적 비논리가 폭발하는 장면이 강간의 장면 아닌가요? 아까도 말했지만, 난 그 장면이 너무나 좋았어요. 어떤 아름다운 잔인함. 아주 잘 형식화된 잔인함이라고 할까? 난 로도이프스카가 지르는 세 번의 비명 소리가 그녀의 아버지의 세 번의 야간 순찰과 겹쳐진다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네번째의 비명은 헬렌이 가지고 있는 그 아기 아닌가요? 어때요? 그 네번째 비명은 세계와 화해할 수 있을까요? 저는 노래가 될 수 있느냐고 묻고 있는 거죠.
바타이유 아기가 나오려면 일 년은 기다려야 하니까, 일 년 뒤에나 보아야 할 것 같은데…… (웃음) 어쨌든 그 아기는 희망의 기호입니다. 모두들 다 죽은 다음에도 한줄기 빛이 남아 있을 거라는 믿음이죠. 어쩌면 로도이프스카가 너무나 비현실적인 인간으로 느껴져서 그 아기의 아버지를 공자그로 설정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강간의 장면만 해도 그래요. 전혀 현실적이지 않거든요. 그건 강간이 아녜요. 피도 살도 없어요. 내가 써놓고도 비현실적 순간처럼 느껴져요.
김정란 전 로도이프스카를 작은 프란체스코라고 불렀어요. 그녀가 짐승의 말에 가까운 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녀의 비명은 일종의 말하기 방식 아닌가요? 응결된 말. 아니면, 말에 대한 거부로서의 말하기.
바타이유 이 비명에는 다른 뜻도 있습니다. 이건 로도이프스카가 시테에 말하는 방식이에요. 그 비명 때문에 시테 전체가 사건을 알게 되었거든요. 그리고 그 다음날 바닷가에서 아이의 시체를 발견하죠. 그런데 이상한 건,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러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죠. 헬렌도, 아르투로도, 그 누구도. 밤에 일하니까 분명히 깨어 있었을 아르투로도 꼼짝하지 않았어요. 이 비명은 반향이 없는 비명입니다. 무거운 납으로 짓눌려 있어요.
김정란 원초적 살인사건 같은 거죠.
바타이유 결과가 없는 행동.
김정란 이미 저질러졌고, 그리고 그것에 대항해서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건.
바타이유 아, 정확해요. 그 때문에 내가 책 앞머리에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인용한 거죠. 시테는 침묵했지만, 분명히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었어요. 그게 바로 강간―부서진 살에 대한 비전, 그리고 그것이 어떤 위치를 가질 수 있느냐 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죠. 그런데 위치가 없는 거죠. 그건 그냥 벌어진 일일 뿐이에요. 이미지죠.
김정란 모든 게 나아질 거예요. 제로부터 다시 출발하면 되죠, 뭐.
바타이유 제로보다 못한 데에서 출발해야 할지도 모르죠. (웃음)
김정란 이 정교한 글쓰기가 어떻게 가능한가요? 어떻게 작업하세요?
바타이유 처음엔 몇 개의 이미지가 있어요. 베르사이유의 오두막에서 밤에 일하는 하인이 생각났다든가 하는 식으로 어떤 합리적 요소들이 있어요. 그런데, 나머진 어떻게 씌어지는지 잘 모르겠어요.
김정란 아마 천재성이 받아쓰기를 시키나보죠?
바타이유후, 설마…….
김정란 바타이유 씨의 작품은 삶에 대해 깊이 절망한 사람이 쓴 책처럼 보여요. 어떤 이유라도 있나요? 어떤 인터뷰에선가 “난 현대가 추악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걸 보았는데…….
바타이유 그건 제 확신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때, 난 의식하고 있습니다. 부자이고, 힘세고, 과거가 찬란했던 나라 사람으로서 쉽게 하는 말일 수도 있다는 걸 말입니다. 내가 “세계는 추악한 곳이다”라고 말할 때, 그건 부자나라 국민의 예술적 시각을 말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제 느낌은 분명해요. 난 세계가 추악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진정한 유일한 이유예요.
김정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걸 문학의 이유로 생각하신다는 거죠?
바타이유 싸움입니다. 제 감각으론 언제나 싸움입니다.
김정란 역시 파스칼리엥다운 용어로군요. 벌써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던 싸움 아닌가요? 그렇게 젊은 나이에…….
바타이유 흥미로운 건, 세계가 추악한 곳이라면, 문학 역시 추악한 것을 사용한다는 얘기거든요. 예를 들어서 포크너는 강간에 대해서 무려 3백 페이지 가량을 쓰고 있어요. 그런데, 아름다움에 의해서, 그 추악함이 윤리적인 것으로 바뀌어버려요. 도스토예프스키도 그 비슷한 말을 했어요. 그의 말은 일종의 종교적인 언급이지만, 신의 현존 안에서든, 밖에서든, 전 아름다운 것을 찾아요.
김정란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니라면, 당신 책에는 어떤 종교성에 대한 믿음이 있어요. 신도 등장하지 않고, 신의 이름도 말해지지 않지만, 분명히 어떤 존재를 찾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요.
바타이유 그렇습니다. 신은 없지만, 신이라는 목표가 없는 건 아녜요. 하지만 성공하고 있지 못한 목표죠. 언젠가 난 신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죠. 내 등장인물들 중에서 그럴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은 헬렌뿐이에요. 사실, 신을 만날 수 있는 자질은 사랑으로부터 오는 것이거든요. 그녀만이 제대로 사랑할 줄 알죠. 사람들이 공자그에게서 용서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즉, 신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에요. 신에 대한 감각은 사랑을 통해 드러나거든요. 사랑에는, 그것이 아무리 괴상하고 폭력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어떤 기독교적 의미가 있어요. 자기자신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악마적인 것이죠.
김정란 이제 작품 밖으로 조금 나가볼까요? 약관 22세에 쓴 『다다를 수 없는 나라』부터 평단의 대대적인 조명을 받으셨는데, 그런 뜨거운 반응을 기대하셨나요?
바타이유 아뇨, 전혀. 하지만 칭찬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어요. 잘 썼다고 칭찬해준다고 들뜰 이유 없어요. 결국 저 자신에게 달린 문제죠.
김정란 요샌 예술적 재능을 가진 젊은이들이 몽땅 영화판으로 몰리는 추세잖아요? 프랑스만 해도 30세 미만의 재능 있는 시네아스트들이 진을 치고 있고…….
바타이유 그래요. 괜찮은 친구들이 많죠. 하지만, 영화는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거든요. 그 점도 중요한 요소죠.
김정란 문학은 지원 안 해줘요?
바타이유 문학은 없어요.
김정란 어떤 작가들을 좋아하세요?
바타이유 아직 잘 모르겠어요. 계속 발견해가고 있는 중이니까. 도스토예프스키, 포크너, 클로델, 보들레르, 랭보, 라 로슈푸코, 복음서 저자들, 생종 페르스 등등.
김정란 프랑스 문단은 어때요? 간단하게 묘사해줄 수 있어요?
바타이유 베르사이유죠. 좀더 요란하거나 덜 요란한 코스츔을 입은 15명 정도의 권력자들이 중앙에 포진하고 있고, 그들을 3천 명 정도의 궁인들이 둘러싸고 있죠. 어디나 다 똑같지 않은가요?
김정란 궁녀들은 없어요? (웃음)
바타이유 물론, 다행히도, 있죠. (웃음) 재능 있는 작가들이 많아요. 뚜렷하게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없지만, 기다려볼 만하다고 생각해요, 지금 프랑스 문단은 1895년 상황과 비슷하거든요. 말라르메와 랭보가 사라졌지만, 벌써 지드, 클로델, 발레리, 생종 페르스 등이 대기하고 있었거든요. 사르트르, 아롱, 들뢰즈, 푸코, 사로트 등의 대가들이 지난 삼십 년 동안 모두 세상을 떠났어요. 지금 나타나지 않았다 뿐이지 어딘가 숨어 있는 작가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영화는 정말 굉장히 힘차고 아름다운 걸 만들어내고 있거든요. 타르코프스키나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들은 정말 기차요. 같은 영화는 너무나 힘차고 아름답거든요.
김정란 아주 야만적이면서도 도시적이죠. 아름다운 잔인성. 그러면서도 생에 대한 아주 구체적인 감각이 있어요.
바타이유 카프카가 그랬어요. “책이란 무엇인가? 그건 균열이다.” 읽고 나서 무언가 깨어지는 느낌을 받아야 하는데, 요즈음 책들에선 그게 안 느껴져요.
김정란 영상 문화 앞에서 문학이 너무 주눅들어 있는 건가요?
바타이유 아뇨, 꼭 그렇다고 생각 안 해요. 물량적으로 하도 밀고 들어와서 그렇지, 많은 영화들은 쓰레기들이죠. 문학은 약한 입장이긴 하지만 폭발의 핵이 될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서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철』은 발표 당시엔 15페이지 정도의 팜플렛 같은 책이었거든요. 그 당시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김정란 그땐 영화가 없었잖아요. (웃음)
바타이유 글쎄, 그런가요? 어쨌든, 기다릴 줄도 알아야죠. 그래서 편집자의 입장에서도 전 대가들보다는 젊고 이름 없는 친구들을 돌보는 쪽이죠. 그들 중에 미래의 랭보가 있을지 어떻게 알겠어요?
김정란 당신 자신은 아닌가요? 이런 게 그야말로 독아첨인가? 문학뿐 아니라, 인문학 전체가 상업주의 앞에서 맥을 못 추는 것이 세계적 추세인 것 같아요. 프랑스는 어떤가요?
바타이유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 자체의 위기라기보다는 출판 유통의 위기죠. 책들을 도통 안 사거든요. 그나마 인문학 책을 사는 사람들마저도 영성이나 종교에 대한 책들만 사요. 파라셀즈, 프리메이슨단, 연금술 등등. 인문학이 힘을 잃고 있는 반면에 신에 대한 추구는 강력하게 나타나고 있는 거죠.
김정란 그건 인문학이 대중의 요구에 대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요?
바타이유 그런 측면도 있겠죠. 어쨌든 이런 반응이 어떤 특별한 콘텍스트를 구성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아요. 하나의 콘텍스트가 끝났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일련의 현상들이 있어요. 사회학, 생태학 책들은 이미 충분히 소비되었거든요. 지금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는 시기인 것 같아요.
김정란 기다리면서, 당신의 문학이 훗날 폭발의 핵이 되길 바랍니다. 어쨌든, 지구의 어디에선가 진지한 태도로 글을 쓴 사람이 있다는 걸 안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운 일입니다. 오랜 시간 애쓰셨습니다.
바타이유 한국의 독자들을 만나게 되어 많이 기쁩니다. 앞으로도 다시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