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름에 꼭 한가지씩 하는 것 중 하나. 다름 아닌 재미있는 단편집을 골라 읽는 것이다. 유명하다고 소문난 책들보다는 우연히 만나게 되는 재미있는 단편집들이 더 큰 만족감을 주었던 것 같다. 몇 년전 천일야화를 듣는 왕의 심정으로 하루에 한편씩 읽어나갔던 아가사 크리스티 여사의 '수수께끼의 할리퀸'처럼. 이번에 내가 며칠 동안 잡았던 책은 퍼시벌 와일드의 '탐정 피트 모란'이다. 사실 장르문학의 대격전지가 되고 있는 여름책시장에서 해문의 책은 임팩트가 약해보이고 표지도 평범 이하로 보인다. 이 책에 대한 사전지식도 없이 고른 이유는 바로 이 책의 번역자이신 고 정태원 선생의 마지막 작업물을 간직하고자 하는 데에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비채에서 '홈즈의 라이벌'이라는 제목으로 책 한 권을 더 준비중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좋은 책들을 소개시켜 주셨고 몇몇 흥미로운 책들은 작업마저 끝마쳐 놓았지만 시운이 맞지 않아 앞으로도 보기 어려울 것 같아서, '의리상' 한 권 구입했다고나 할까. ( 정태원님의 기획작들은 다른 출판사의 라인업과는 성격이 상당히 달랐기 때문에 앞으로 볼 수 없을 확률이 꽤 높다고 본다.) 아 그런데. 이 책 정말로 다짜고짜 웃기기 시작하는데 책 읽기 전 다짐한 두가지를 여지없이 깨버렸다. 1. 하루에 한개씩만 2. 사람 많은 곳에서 소리내어 웃지 않기 이 책의 주인공 피트 모란은 탐정이란 표현이 무색한 맞춤법조차 제대로 모르는 남자다. 본래의 직업은 어느 부잣집 운전수이건만 '애크미 인터네셔널 탐정통신교육학교'라는 정체불명의 교육기관에 교재값을 지불해 가며 탐정에 대해 배워나간다. 사건이 벌어지면 "'지문' 챕터에 대해 배우고 싶습니다.""방화 초 중급은 건너뛰고 상급부터 배우고 싶습니다." 이런 식의 전보를 보내 허둥지둥 사건에 뛰어든다. 탐정 피트의 조력자 역할을 하는 탐정통신교육학교의 '주임경감'이라는 작자는 그야말로 속물로서, 돈이 되는 사건이 생기면 탐정을 파견해 주겠다고 꼬드기고, 위험한 일이 생기면 자신들과 무관한 사이라는 것을 새삼 강조하기 일쑤다. 교육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고 탐정 일을 주변에 인정받지 못하지만 전혀 자신이 똑똑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피트 모란. 우연인지 실력인지 운인지 판단하기 애매하게 사건은 또 희한하게 해결되어 명성이 쌓여간다. 이 책의 초반부는 피트 모란의 엉뚱함과 귀여움이 살짝 시시해 보이는 시골 마을의 사건들을 재치있게 커버해 주며, 더욱 노골적으로 서로를 향해 티격태격하는 피트 모란과 '주임경감'의 신경전이 하나의 만담을 보는 것처럼 즐겁다. 하지만 이 책이 그렇게 소소한 이야기와 피트 모란의 순진함을 흐뭇하게 바라보게만 두진 않는다. 마지막 두개의 단편을 지하철에서 읽던 중 나도 모르게 낄낄대면서 웃음을 터뜨려 버릴 정도로, 몸이 들썩거릴 정도로 제대로 웃겨주는데... 민망해서 혼날 지경이었다. 과장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내 개그혈을 정확히 찌르는 그런 이야기였다. 이 책은 훌륭한 '츄리' 소설은 아닐 것이다. 피트 모란이라는 탐정 지망생의 좌충우돌 사건 해결기라고 보는 것이 무방할 것이다. 이 책이 정태원 선생님의 마지막 번역작이라서 별 다섯을 줬을까? 아니,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은 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유쾌하고 밝고 건강한 웃음을 주는 책이었기에 별 다섯을 주는 것이다. 책을 쓰는 작가와 번역하는 번역자와 책을 읽는 독자는 독자가 책을 읽는 순간 책으로 말하고 책으로 서로를 어루만진다. 시대와 공간과 삶을 뛰어 넘은 소통이 책에는 있는 것 같다. 이 책을 읽은 유쾌함을 적어도 여름마다 기억할 수 있게 되어 행복하다. 사후세계에 대한 확신이 없어 정태원 선생님의 행복을 빌 순 없지만, 살아있는 내가 행복함을 꼭 누군가 그에게 전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트릭이 공개되어도 여전히 신비로움을 간직하는 마술. 사랑의 비밀은 간직하기 보단 공유하는 게 더 아름다운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사랑에 대한 자기계발서 같은 분위기에 조금 반발심을 갖다가도, 동화적인 내용에 손발이 오글거린다는 듯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도 어느새 매마른 마음에 떨어진 촉촉한 비가 틈새를 찾아 조금씩 흘러들어 오는 것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지나간 사랑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해 보기도 하고, 언젠가 읽었던 헤르만 헤세의 단편 <아우구스투스>나 생택쥐페리의 <어린 왕자>같은 걸 떠올려 보던 중에 실제로 책 속에 헤르만 헤세가 까메오(?)로 등장했을 땐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습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법에 대한 책들보다는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 더 나아가 사랑을 나누는 방법을 알아가는 게 훨씬 아름다운 길이겠죠. 모두에게 사랑받았지만 결국 불행하다고 느꼈던 <아우구스투스>처럼 말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 미셸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아직 늦지 않았음을 일깨워 줍니다. 아직 소중한 사람들이 곁에 남아 있는 우리에게 사랑이 절실하고 절박하게 다가오기 전에 . 우리가 사랑을 찾아 다가가는 게 현명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