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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평점 :
#내 아버지
내 아버지는 패잔병 같은 남자였다. 그것도 전쟁을 제대로 겪지 못한 채 패잔병이 된 사람.
어린 아들인 나는 아버지의 화려한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작 초라한 얼굴과 마주해야 했고, 질척한 과거에서 살아남은 어른인 그의 말을 공손한 얼굴로 경청해야만 했다. 집에서 그는 간편한 차림에도 어딘가 칼이나 총을 숨겨둔 것 같은 자신감이 있었고, 실제로 그러진 않았지만 큰 주먹과 힘센 팔뚝은, 내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믿음직한 버팀목이 아니라.
패잔병의 아들로 살아간다는 것은, 아버지를 지나쳐 가 다신 오지 않을 기회에 대한 울분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새 시대에 새롭게 사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나는 그의 적들이 그를 물 먹인 방법들을 배우라고 강요받았다. 하지만 그것 역시 시대에 지는 방법 중 하나였다. 아버지는 대부분의 경우 거의 이길 뻔한 사람이라서 아쉬움이 더 컸나 보다. 하필 승리라는 녀석이 아버지가 손만 뻗으면 닿을 만한 곳까지 왔다가 약 올리듯 떠나버린 탓에, 그는 이 세상 누구보다 승리도 패배도 잘 아는 사람이 되었다. 나보다 나은 점은 그거였다. 나보다 적어도 하나를 더 아는 어른이라는 점.
나는 아버지가 비겁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이기고 싶었지만 올바르게 이길 마음은 없었던 사람. 이기는 편에 들어가고 싶었을 뿐 자신이 속한 편을 이기게 하려는 노력은 없었던 사람. 항상 죽을 곳과 죽어도 목숨이 아깝지 않을 주군의 존재를 갈구했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목숨이 아까웠던 사람.
세월이 지나 떠날 수 있을 때, 나는 그를 떠났다.
#하루키와 아버지
<고양이를 버리다>는 썩 글 자체로 책 자체로 내 마음을 움직이거나 하는 책은 아니었는데, 책을 읽고 나니 내가 아버지에 대해 평소에 가졌던 생각 외에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만들어주었다. 아버지를 이해해보려고도, 무시해보려고도 했던 아들로써 가족의 과거에 대해 조사하려는(혹은 넘겨짚는) 노력이 이해가 갔다. 하루키가 아버지에 대해 이런 저런 기록을 뒤지는 모습이 나에게는 모래산에 꽂힌 깃발을 쓰러트리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것 같아 거슬리기는 했으나... 어쩌겠는가? 아들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은 세상이 있는 법이다.
하루키는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이용해 장사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에게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다는 한심한 면을 인정할 수 없어 지어내는 중인가? 혹시나 이것은 전쟁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일본인 특유의 교묘한 술수인가? '거기에도 사람이 있었네' 같은 류의 비겁한 변명을 이제 와서?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아버지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를 자제하면서, 자신의 존재 자체가 계승해야 하는 책무가 있다고 말하는 작가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나에게도 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이 있다. 자전거를 선물로 받던 날, 운동장에서 축구를 했던 어느 날이 떠오르고, 비가 오는 날이면 함께 누워 빗소리를 조용히 함께 듣던 많은 날이 있다. 그런 기억들은 먼 곳에 버리고 돌아와도 다시 집에 와 있는 고양이처럼 나를 보면 '야옹'한다. 나는 거기에 대해서는 나름 답을 내려놓았다. 나에게도 그리운 것은 아버지가 아닌, 그런 고양이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