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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들의 죄 ㅣ 밀리언셀러 클럽 127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8월
평점 :

로렌스 블록의 매튜 스커더 시리즈 1편이다.
국내 출간작인 <800만 가지 죽는 방법>,<무덤으로 향하다>, 또 절판되어 구하기 까다로운 <백정들의 미사>에 이은 국내에 소개되는 4번째 장편이기도 하다. 그동안 명성에 혹해 읽을까 말까 수많은 고민을 했던 로렌스 블록의 책들이지만 밀리언 셀러 클럽으로 <아버지들의 죄>가 계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꾹꾹 참았던 책이다.
230여 페이지의 책이 반가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범죄소설, 추리소설, 스릴러라면 사오백 쪽은 기본에 육백 칠백 페이지까지 이르는 대작들이 많기 때문에 최근 나온 영미권 스릴러 중에 이 책은 단연 눈에 띈다. 홀쭉하게 말라보이기까지 하다. 근육질의 형님들 사이에서 조금 빈약해 보이는 체구의 사내를 발견한 기분.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는 그 빈약했던 체구의 사내가 군살 하나 없는, 운동으로 단련된 근육으로 채워진 다부진 몸매의 남자란 걸 알게 된다. 무릇 세상의 어떤 것들은 겉모습으로 판단해서는 안되는 법이다. 책장을 몇 장 넘기다 보면 배가 근질근질해지고 책을 쥔 손에 어느새 힘이 들어가는 걸 발견하게 된다. 오래된 작품임에도 고리타분하다는 느낌보다는 정말 근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책의 주인공 덕분이다.
매튜 스커더. 알콜 중독의 전직 경찰. 스스로의 마음에 커다란 구멍을 내고 거기로 드나드는 칼날 같은 바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남자. 자신을 탐정 같은 것이 아니라고 소개하지만 타인의 인생을 지나치지 못하는 남자. 사회의 빛과 그림자를 오가면서도 그 어느 쪽에서도 살 수 없는 사람......
어찌보면 이야기의 진상은 대충 얼개를 짜 맞추는 것이 어렵지 않은 책이고, 배배 꼬이지 않은 일방통행의 책이다. 하지만 매튜 스커더라는 인물 자체에 철저히 포커스를 맞춘 전개는 탐정 소설의 진수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독자들은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긴장하고 분노를 공감하고 그의 무덤덤함과 따뜻함이 공존하는 장면에서 코 끝이 찡해진다. 그리고 그만의 가치관이 뚜렷한 결말부에서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영미권 추리소설들이 두꺼워 부담이 되는 요즘이다. 사실 어떤 책들은 읽다보면 시간 떼우기로도 곤란한 시간 낭비라고까지 여겨질 정도의 수준이다. 그런 책을 한 권이라도 읽어 본 독자라면 <아버지들의 죄>가 더욱 강렬하고 짜릿하게 다가올 것 같다. 그리고 이젠 가격과 두께보다도 그 안에 담긴 재미를 찾아 보겠다고 덤벼들겠지. 재미를 추구한다는 독자로서의 기본자세를 다시 회복한 기분이다.
물렁살의 덩치 큰 졸개보단 브루스 리가 쎈 건 뭐 당연하지만 말이다.
이젠 나도 알았다. 매튜 스커더 시리즈가 어떤 매콤한 맛을 갖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