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드 44 뫼비우스 서재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생각해 보면, 만화책만 읽던 내가 어릴적 읽던 추리소설과 SF에 다시 관심을 갖고 '스릴러'라는 장르의 재미에 빠지게 된 것은 바로 이 책, '차일드44' 덕분이었던 것 같다. 흥미진진한 전개와 사건의 충격성이 정말 엄청난 가독성으로 날 사로잡았고, 또 익숙한 영미권이 무대가 아니라 구소련을 무대로 한 연쇄살인사건이란 점에서 특히나 유니크한 작품으로 기억이 남는다. 

 

 하지만 어느샌가 절판이 되었고, 그 후 여러 좋은 작품들을 읽으면서 그 당시 내가 느꼈던 책의 재미에 대한 감동은 희석되어 있었나보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은 작품의 대략적인 얼개와 '히가시노 게이고와 스티븐 킹의 팬이 격찬한 소설'( 이것도 기억이 가물하지만)이라는 조금 우스꽝스럽고 오글거리는 홍보문구였던 걸 보면 말이다. 스릴러 팬들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입문서가 될 수 있고 독특한 분위기로 기존의 팬들에게 활력을 줄 수 있는 작품이 절판이라니, 정말 아쉬운 일이었다.

 

 

 

 새로운 차일드 44는 달라진 외관과 더 오글거리는 홍보문구로 사실 내게 냉소를 불러 일으켰다. '순백색의 눈에 흩뿌려진 붉은 피' 라는 이미지가 지배하는 작품답지 않게 까만색의 표지를 선택한 점도 맘에 들지 않았고, "너무 힘들게 구했다. 제발 다시 출간해 달라."라는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을 뿐더러 한층 오바스러움이 더해진 카피를 띠지도 아닌 책 전면에 떡하니 박아넣은 출판사에겐 분노조차 일었었다. 막말로, 힘들게라도 책을 구한 사람이 왜 다시 책을 내달라고 구걸(?)하겠는가. 독자들이 살려낸 스릴러의 걸작! 이란 멘트 앞에는 '출판사가 죽이고' 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었어야 한다. 출판사가 죽이고 독자가 살려낸 스릴러의 걸작. 이 말에는 전적으로 찬성하는 바이다.

 

 같은 '스미스'라는 이름을 가진 작가 중 '마틴 크루즈 스미스'의 대표작인 '고리키 파크' 또한 우연하게도 구소련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다. 두 작품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두 작품의 주인공 모두 부인과의 사랑없는 결혼생활에 뒤통수를 맞는다는 점, 악의적인 살인을 인정하지 않는 체제가 갖는 맹점을 비웃는다는 점이다. 차일드44를 읽은지 오래되고, 얼마전 읽었던 '고리키 파크'에 큰 감명을 받았던 탓인지 차일드44를 그 작품에 대한 아류작 정도로 치부할 뻔 했다. 하지만 차일드44의 개정판을 다시 읽고 난 후에는 그런 생각을 깔끔하게 접을 수 있었다. 차일드 44를 다시 읽을 수 없었다면 평생 이 책을 폄하하면서 지내야 했을 것이다. 우연히 또는 어쩔 수 없이 생겨난 공통점으로 기억한다는 것은 명백한 실수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고리키 파크'가 골든대거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대거 오브 대거즈의 유력한 후보였을만큼 굉장한 작품이라서다.)

 

 

 

 구소련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에서 그 디테일을 내가 논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 쪽 문화권에 살았던 사람이 아니고서는 차일드44나 고리키 파크가 그렸던 구소련의 사회에 대해서 정확히 집어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예전 '평양에서 온 이방인' 이란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서구의 사람들에게는 먹혔을지도 모를 북한에 대한 묘사가 허접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다. 아무리 분단된지 오래된 북한이지만 유사한 문화권의 나라이기에 이런저런 묘사들이 꽤 어색했던 탓이다.

 

 차일드 44의 구소련은 시기적으로 더 고리키 파크보다 이전인 시대를 그리고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좀더 억눌려 있는 사회로 그려진다. 스탈린의 공포가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지상낙원'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드는 통치 수단이며, 그 안에서 모든 사람들은 서로를 경계하고 배신하며 스스로의 안위를 유지해 나가는 것에만 신경을 써야만 살수 있다. 어쨌든 한국의 독자로서는 그런 무대 설정이 어색함보다는 참신하게 여겨진다고 말할 수 있다. 구소련같은 공산주의 사회- 행동에 대한 제약과 말한마디로 나락에 떨어질 수 있는 사회에서 쫒지 말아야 할 사건을 추적해 나간다는 건 굉장한 스릴을 안겨준다. 예전에 읽었을 때도 마찬가지지만 새삼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이 책의 레오는 가장 많은 제약과 스트레스를 받는 스릴러의 주인공이라는 것이었다. 주변에 대한 신뢰를 모두 잃고, 신분이 갖는 이점이나 지원을 포기한 상태에서 '바실리' 라는 끈질긴 악역의 괴롭힘까지 더해졌으니 레오로서는 막막할 따름이다.

 

 고리키파크에서는 서방과 소련을 오가면서 사건을 쫒는 '아카디 렌코'가 굉장히 쓸쓸한 인생을 살기 때문에 독자에게 먹먹함을 안겨준다. 그 탓인지 작품이 무겁고 쓸쓸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차일드 44의 레오 같은 경우는 고생을 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 고생하는 모습이 독자에게 짜릿함을 주는 것 같다. 더 오락적인 요소들이 강해서 사건의 잔인함과는 별개로 깔끔하다는 느낌도 받는다. 고리키 파크가 서방의 문화와 소련의 문화가 충돌하는 장면을 넣음으로서 서방작가로서의 시선을 섞는다면, 차일드44의 경우는 영미권 작가 특유의 속도감과 사건전개능력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어필한다.

 

 톰 롭 스미스가 29살에 쓴 이 작품은 데뷔작답지 않게 노련하고 영리한 작품이다. 주인공 레오가 연쇄살인사건을 조사하게 되기까지의 이야기 전개부터 초반부와 결말부를 관통하는 레오의 과거 이야기를 설계하는 모습은 어떠한 서툰 점도 찾기 힘들다. 1980년대의 연쇄살인마를 1950년대로 옮기면서 당시의 시대상황과 믹스해버린 재주부터 꼭 구소련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기괴한 사건을 무대설정을 바꿈으로서 더 극대화 시킨 발상의 담대함이 놀라울 따름이다.

 톰 롭 스미스는 차일드 44 이후에 <더 시크릿 스피치><에이전트 6> 라는 레오 데미도프의 활약을 다룬 후속편을 출시했다. 더 시크릿 스피치는 재미가 조금 떨어진다는 평가지만, 에이전트6에서는 다시 명예회복을 한다는 평을 들어본 것 같다. 다시 재간된만큼 국내 독자들에게 레오3부작 모두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별 다섯에 별 넷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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