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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의 뱀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나는 그것이 아이의 순수함만을 나타낸다고 생각했었는데, <구체의 뱀>을 읽고나자 조금은 다르게 생각되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는 보아뱀뿐만 아니라 바오밥나무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서 어쩌면 삼킬 수 없는, 혹은 감당할 수 없는 삶이란 것이 사람을 쥐어짜고 파괴해 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지는 않은가.하고 말이다. 일단 한 번 미치오 슈스케의 목소리로 그런 소리를 들은 것 같은 후에는 더이상 다른 해석으로 '어린 왕자'를 볼 수가 없게 된 것 같다.
미치오 슈스케. 그 진절머리날 정도로 집요하게 뇌내부에 달라붙어 속삭이는 작가의 책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독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슬픔인지 괴로움인지 알 수 없는 찐득찐득한 감정을 몸 속 깊은 곳 어딘가에 심어놓고 나간다. 12지 시리즈의 하나로 '뱀'을 소재로 한 <구체의 뱀>은 뭔가에 홀린 듯 마루 밑을 기어 젊은 여인과 늙은이의 정사를 엿듣는 주인공에서 뱀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앞서 언급한 어린왕자의 보아뱀에 대해 이야기 하기도 한다. 그리고 각자 감당할 수 없는 것을 하나씩 삼킨채 소화시키지 못하고 괴롭게 살아가는 등장인물들과 유리로 된 벽 속 눈사람의 세계를 연결하고 있다.

미치오 슈스케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뭘까. 생각하다 보면 답답하고 기분나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은 그 아름답기까지한 표현들과 기발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소재의 연결들이 가리키는 곳에 여지없이 불편한 진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괴로움을 감수하면서 몸 속 깊은 곳에 품고 견디는 죄책감들이 어느 순간 타인의 몸에 이빨을 박아 넣고 흘려넣는 독이 되어 버리는 것.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면서 나약함=선함을 연기하다가도 독을 흘려넣는 순간의 뱀의 머리속에는 복수심이 가득하고 스스로의 모습에 취하고자 하는 쾌락에 대한 갈구만이 있을 뿐이다.
구체의 뱀이란 결국 스스로 몸안의 유리구를 소화시키지도 토해내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 덧없는 기다림은 한없는 슬픔을 자아내고.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 을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불쾌했다기보다는 좀 놀랐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기시 유스케가 '세상에 없을 법한 것들이 출몰하는 깊고 어두운 숲 속'이라면 미치오 슈스케는 '온갖 것들이 가라 앉아 있는 끈적하고 기분나쁜 늪' 같은 작가다. 불쾌한 감정과 찝찝함 때문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갖다가도 어느 순간 그 이야기들이 한없이 섹시하게 느껴질 때가 찾아온다.

<달과 게><구체의 뱀>을 통해서 이제 확실하게 '미치오 슈스케'에 대한 호의를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간혹 어떤 부분에서는 '나오키상'을 노린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뭔가 익숙한 전개 (미스터리 소설에서는 낯선) 부분들이 있는 것도 같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부분을 많이 만들어내는 멋진 작가임에 틀림없다.
아 그나저나... 미치오 슈스케가 묻으면 뭘로 지워야되나......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괘씸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