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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드업 걸
파올로 바치갈루피 지음, 이원경 옮김 / 다른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2010년 휴고상, 2009년 네뷸러상 양대 SF상을 석권하고 그 외에도 권위있는 상들을 먹어치운 파올로 바치갈루피의 <와인드업 걸>.
사실, 이 책을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의외로 당황스러웠다고나 할까. 보통 한국에서 SF란 뉴스에서 수상소식을 접한 기억이 지워진 후에야 뒤늦게 색이 바랜 과거의 명성을 두르고 나타나니까 말이다.
이 신선하고 팔딱팔딱 뛰는 SF를 만나게 된 행운을 찬양하며 감상을 써볼까 한다.
1. 책 이야기

섣부른 추측이지만, '다른'이라는 출판사에서 <와인드업 걸>을 발간해 낸 것은 책 기획자의 약간의 '사기'가 들어간 게 아닌가 싶다. 그 동안 나왔던 책들과는 다른 장르인 SF지만 또 한편으로는 '생태.환경,평화,인권,나눔에 대해 청소년과 함께 고민한다.' 는 출판사의 모토와 기가 막히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혹시 아는가 '대표님 휴고상 네뷸러상 다 싹쓸이한 책이 있는데 말이죠.이러이러한 책이 있는데 환경, 인권 이런 주제야. 딱이지 않음? 대박남. ㅋㅋㅋ' 했을지도.
생태, 환경, 평화, 인권, 나눔에 대해 고민할 책은 맞다. 하지만 책의 성적수위가 꽤 높아서... 청소년과 함께 고민하긴 좀 그렇다는 게 내 생각이다. 더불어... 24,000원이라는 SF특유의 배짱튕기기 가격 또한 청소년 주머니털기를 넘어서 찢어놓는다는 심보.
( 갑자기 딴 곳으로 새는 것 같아 참 눈치보이는데, 왜 SF는 스릴러나 미스터리보다 책값이 비쌀까?
해외판권이 비싸서 그런 것은 아닐 것 같은데 말이다.
스릴러 팬들은 비싸면 안산다. SF팬들은 비싸도 산다. 뭐 이런 마인드일까...어쨌든 책의 질이 특별히 좋은 것도 아니고 좀 언짢은 부분이다.)
2. 왜 태국인가?
와인드업 걸에 대한 혹평을 살펴보면, 이 책의 작가인 서양인의 시선에 동양인에 대한 편견이 담겨있다. 태국이란 나라의 불안정함을 미래로까지 고스란히 가져다가 이미지를 망가뜨리는 저질렀다는 투의 의견들이 있다. 사실 나로서는 태국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사람 이름이 외기 힘들다 정도의 느낌만 받았을 뿐, 딱히 다른 불만은 없었다.
적어도 필립 K 딕의 <높은 성의 사나이>나 작가도 기억안나는 <평양의 이방인> 같은 병신같은 맛뵈기 문화체험 같은 느낌은 못받았다는 소리다. 책 읽은 내공이 높지 않아 반론이나 반박같은 것을 내가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생소한 무대에서 자기 입맛에 맞게 뒤튼 이야기로 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구글링을 통해 알아본 태국은 1. 농업대국 2. 입헌군주제하의 내각책임제 3.쿠데타 등의 정치적 불안정 4.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식민통치를 받지 않으면서도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한 나라다.
현재 정치의 불안정을 고스란히 미래로 가져다 놓은 것이 어째서 잘못된 것일까. 우리나라만 해도 몇백년전 조선의 썩어빠진 정치인들이 하는 짓거리에 식민지시대의 친일파들이 하던 짓을 반복하고 있는데말이다. 서양인의 시선으로 태국의 정치상황을 섣불리 판단했다는 것에 대한 비난? 괜히 기분나쁜 나머지 꼬투리를 잡는 것은 아닐까? 사실 기분이 나쁘려면 왜 다른 동남아는 망해 돌아가는데 X도 없는 태국이 아시아의 마지막 보루가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GMO 기업으로 인해 무너져버린 세계의 식량시장, 유전자 조작으로 인해 발생한 신종 전염병에 대해 버틸 수 있는 나라.
불안정한 정치상황 속에서 외세와의 교류가 활발한 나라라는 설정으로 태국만한 곳이 있었을까? SF 답게 아예 세계를 한번 리셋해서 새로운 나라를 하나 뚝딱 만들었어야 하는 걸까? 미래에도 태국은 그럴것이다. 라는 게 이 책의 핵심은 아닐 것이다.
이 책은 작가가 그려낸 미래의 태국을 이미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나는 그 배경을 만들어 내는 것에 사용된 계산식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3. 디스토피아 속에서의 필사적인 인물들
이 책은 챕터마다 바뀌는 시선으로 서로 다른 현실을 공유한다. 거대 GMO기업의 끄나풀인 앤더슨, 그 아래에서 재기를 꿈꾸는 몰락한 중국인 탄혹생, 성적노리개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버려진 와인드업 걸 에미코, 태국을 양분하는 거대세력 화이트셔츠의 수장 짜이디와 그의 부관 깐야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을 움직이는 것은 다름아닌 욕망이며, 그 욕망을 걸고 넘어지는 것은 바로 타인의 욕망이다. 서로의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해질수록 서로 다른 삶을 살던 자들의 인생이 가까워지고, 충돌을 피할 수 없어질 때 이야기는 폭발한다.
모두의 욕망이 충족될수는 없을 것이다. 돈도 행복도 삶도 언제나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허물어져 가는 이야기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삶을 거머쥐기 위해 행동하고 그것이 묘한 스릴을 낳는다.
4. 2012 우리가 사는 세상
와인드업 걸 에미코는 세상을 올바른 눈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하루하루 삶을 걱정하는 것도 버겁기 때문이다.
앤더슨은 세상을 오직 회사의 이윤추구 대상으로 바라볼 뿐 어떠한 애정도 없다.
오직 자신의 재기에만 힘쓰는 탄혹생은 자신의 선한 본성을 거세하려 애쓰며 이를 악물고 살아간다.
서민을 착취하는 자들의 수장인 짜이디와 깐야는 권력을 지닌 듯 하지만 그보다 위에 있는 자들의 정치놀음에 휘둘릴 뿐이다.
복잡하고 긴박하게 돌아가는 세상. 그 이면에 이미 망가질대로 망가져버린 세계가 있다.
남은 화석연료를 손에 넣기 위해 전쟁이 끊이질 않는 세상.
이미 예전의 종들이 역병과 기생충들에 의해 멸종되어 버린 세상.
그 와중에도 자신들의 종자를 억지로 팔아먹으려는 거대 기업들의 침략.
세계는 이미 엉망인데 그들은 더이상 세상을 크게 볼 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태국의 한 도시. 거기에서 벌어지는 답답하고 끔찍한 삶 속에서 그냥 죽기 전까지 살 뿐이다.
이 책이 두려운 이유는 그다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이며, 점점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지기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들을 머리에서 내몰아야 하는 현실을 새삼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듯한 스펙타클함과 묘하게 몰입되는 인물들, 짜임새있는 스토리에 감탄했다.
다소 당황스러운... 에미코에 대한 성적 폭력 묘사부분만 뺀다면 정말 멋진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