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스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지음, 최필원 옮김 / 그책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 이 서평은 예전 밀알사 버전 '도끼'를 읽고 쓴 서평입니다. 등장인물의 이름이나 몇몇 번역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겠죠?  

 

The winner takes it all.

 

 불현듯,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도끼>를 읽으면서 떠올랐던 건 먼저 88만원 세대와 레디메이드 인생 같은 책이었고, 승자독식이란 단어였고, ABBA의 노래였습니다. 가사만 제 편의에 맞게 가져다 써보면,

 

 ' 이긴자가 모든 걸 갖습니다. 패자는 왜소하게 서 있을 뿐.~ 하지만 난 바보였죠. 규칙대로 했으니.'

 

 뭐 이런 구절들.
(물론 사랑노래입니다 ^^;)

 승자가 모든 걸 갖는다는 당연한 말.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세상은 그렇게 부르짖었으니 어찌보면 이보다 정정당당한 말은 없는 것 같습니다.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또는 빼앗긴 것이 부조리하다고, 뭔가 잘못 되었다고 말하기에는 나말고도 힘든 사람은 너무나 많고 스스로 이기적이란 생각에 고통을 안으로 삼키고 패배를 받아들입니다. 게임에서 진 사람은 그리고 왜소하게 서 있을 뿐. 입니다.

 

 하지만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힘든 현실. 세상이란 거대한 유기체에서 나 하나의 아픔이란 보잘 것 없겠지만 타인의 시선에서 볼 때나 그런 잘난채 섞인 말을 할 수 있을 뿐. 인생의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자기 자신과 가정이 무너지는 광경을 보는 사람에겐 그야말로 지독한 폭언일테죠.

 

 이 책의 주인공 '버크 드보레' 는 대학에 다니는 두 자녀를 둔 가장입니다. 그는 오랫동안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됩니다. 시대의 흐름상, 회사의 정책상. 어쩔 수 없는 실직이고 실업난 때문에 취직이 되질 않습니다. 모두가 힘든 시기... 하지만 버크는 멍하게 서있기 보다는 스스로의 룰을 새로이 정하고 게임을 시작합니다.

 

 자리는 하나. 살아남는 사람이 그 자릴 얻는다. 너희는 죽고 나는 살아남는다.

 

 아주 단순한 룰이죠.

 

 

 

  ' 하지만 나는 자살하고 싶지 않다.  여기서 멈추기는 싫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더라도 계속 갈 때까지 가보고 싶다. 그게 내 심정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인상깊었던 이유는 실직에 절망하는 쪽이 아닌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쪽을 택했던 것입니다. 2년 동안의 실직 보험도 만기가 되어가는 시점에서 어떻게 해도 취업이 되지 않자 그가 선택한 방법은 경쟁자들을 모두 제거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 말도 안되고 무모한 계획에서 소설의 주인공이 퓨즈가 나간 정신이상자였다면 이 책이 주는 가슴 저릿함은 아마도 없었겠죠.

 

 주인공 버크는 어쩔 수 없이 죽어야하는 자신의 경쟁자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들의 질퍽질퍽한 살인게임의 원인이지만 아무렇지 않게 잘 살아가는 기업가와 임원들에 분노합니다. 죽이려던 타겟이 다른 곳에 취직해 죽일 필요가 없어지자 다행이라고 기뻐하고 피해자들과 나눈 대화에 동질감을 느끼고 고민합니다.

 

 장르소설이나 영화를 보다보면 정반대의 범인과 형사마저도 서로에 대한 연민을 느끼고 마음 아파하는데, 비슷한 시기에 직장을 잃은 사람들에게 느끼는 감정이야 오죽하겠습니까. 하지만 버크는 독한 마음으로 그들을 하나씩 처리해 나갑니다.

 

 

 " 아시아 어딘가에 원시 종족은 새로 태어난 아기들을 산에 버린데요. 그러면 자연적으로 커 갈거라 믿는 거죠. 또 초기의 에스키모 사회는 노인들을 빙산에 태워 떠돌다가 죽게 내버려 두었답니다. 더이상 보살필 필요가 없다는 얘기겠지요. 하지만 지금의 우리 사회는 가장 생산적인 사람들을, 그들이 일해야 하는 절정기에 내팽개치는 최초의 사회란 말이죠. 그러니까 끝장일 수 밖에요."

 

 웨스트레이크 선생님. 뭐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끝장나는 게 조금 길어지는 것 같습니다만... 지금도 마찬가지라구요.

 

 내 꿈은 호밀밭에서 어린아이들이 놀다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파수꾼이라고 부르짖었던 소년도, 달보단 6펜스가 좋아서 멀리 떠날 수 없었던 아저씨 아줌마들도. 결국은 행복도 아닌 것을 붙잡아야 살 수 있는 세상인 채로 지금까지 왔습니다. 결국엔 토익이니 자격증이니 따서 초라한 톱니바퀴가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세상입니다. 계속 돌아가지 않고 서 있다면 더 초라한 패자라 불릴테니까요.

 

 끄집어 낼 필요가 없던 야성을 꺼내고 쓸 일이 없을 것 같던 이빨과 발톱을 드러낸 채 무모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살인을 저지르는 주인공에게 묘한 감정 이입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냄새를 맡고 알짱거리는 형사들과 멈출 수 없는 주인공이 만들어내는 묘한 긴장감에서 제가 버크를 응원한들 그게 잘못이겠습니까?

 

 도널드 웨스트레이크가 거대한 포크레인으로 가라앉은 제 마음을 크게 한 번 퍼내어 올립니다. 포크레인 삽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진흙은  검고 기분 나쁘고 냄새가 지독하고... 도저히 제 것이라 인정하기 힘듭니다.

 

 문득, 진흙 틈에서 뭔가 차갑고 반짝이는 걸 발견한 것 같습니다.

 오 맙소사. 버크가 사용하던 총. 루거가 아닙니까?

 

 별 다섯에 별 다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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