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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생리학 ㅣ 인간 생리학
앙리 모니에 지음, 김지현 옮김 / 페이퍼로드 / 2021년 6월
평점 :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비슷한 시기에 읽게 되었다. 이 작품들을 통해서 19세기 프랑스, 영국, 러시아 상류 사회를 엿보면서 전통적인 가문으로 굳건하던 귀족의 위치를 넘보던 부르주아 계급을 인식하게 되었다. 작품마다 부르주아는 때론 귀족의 신분을 질투하는 열등감에 휩싸인 인물로, 때론 새로운 가치와 인식으로 진보한 인간상을, 때론 돈만 많은 허풍쟁이로 다양하게 묘사된다.
'부르주아 생리학'의 저자, 앙리 모니에 Henry Monnier는 부르주아의 다양한 생활상을 파헤친다. 그 자신이 부르주아이기도 한 앙리 모니에는 날카로운 지성과 거침없는 동력으로 유산 계급의 속물근성을 풍자한다. 19세기 파리의 부르주아가 부르주아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다.
부르주아란 군병에게는 군복을 입지 않은 자들, 촌사람에게는 예복, 중산모자, 넥타이, 장갑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도시에 사는 자들, 마부에게는 자신의 마차에 올라타는 모든 사람들이다. 보다 고유한 의미에서 정의를 내리자면 3000 내지 4000리브르 가량의 연금이나 정기 수입이 있고, 먹고사는데 넉넉하고 원만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남자를 의미한다. 부를 축적한 유산계급인 부르주아를 현대적 관점에서 해석하면 중산층 정도 되지 않을까?
앙리 모니에의 '부르주아 생리학'에서 보이는 부르주아는 갖은 모순된 행태를 보여주는 짓궂은 풍속화 인물들 같다. 남아도는 시간을 소비하기 위해 예술과 예술가를 즐겨 찼던 그들의 갑질은 고상한 예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어 초상화를 그려 대던 부르주아들이 화가에게 요구하는 내용이 SNS에 올리기 위해 사진을 보정하는 현대인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또한 화려한 도시 생활에 지쳐 귀촌 한 부르주아들이 시골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줏대 없고 경솔하기 그지없다. 석연치 않은 자격을 얻은 배심 부르주아 또한 온화함과 잔혹함의 모순을 보여준다. 소소한 도둑질에 내린 엄벌과 잔혹한 범죄에는 보인 관용적 태도는 박애 사상과 정의를 구현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본인의 안위를 위한 판단인 것이다. 순수한 이기주의 산물에 불과하다. 극장에서 모습은 공짜 공연을 보기 위해서 배우와 인맥을 쌓고 싶어 하는 얄팍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근엄한 척, 고상한 척, 위엄 있는 척하지만 어쩐지 하찮고 얄팍한 그 속내를 숨기지 못하는 가짜 양반 같다.
본래 부르주아란 도시를 가리키는 '부르 bourg'에서 파생된 '성 안 사람'을 의미하며, 이 말에는 특권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처음에는 '성 안 사람'이란 성의 공식적 소유자와 대비되어 성안의 삶을 돌아가게 하는 실질적 활동의 주체였던 존재였다. 이들은 온갖 노동과 생산 활동에 참여하여 상업과 산업, 문화적, 지적 진보의 주체가 되어갔다. 마침내 대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 흐름을 이끄는 진보적 주체가 되었다. 하지만 혁명정부가 몰락한 후 총재정부, 집정정부 시기를 거쳐 나폴레옹의 출현과 몰락으로 성립된 제1제정, 왕정복고, 7월 혁명을 통한 시민왕의 탄생을 겪은 후 1840년대 프랑스 부르주아는 가장 유력한 사회적 계급으로 그 지위를 확고히 다진다. 일련의 과정을 겪은 후, 그들에게 남은 것은 기회주의적 태도와 자본주의와 기술산업을 지배하게 될 사회 기득권적 태도였다. 구체제의 귀족의 모습으로 역행하는 어리석은 모습이 바로 이 책에서 풍자한 19세기 파리 부르주아의 모습이다.
신세대가 구세대가 되고, 진보 세력이 기득권 세력이 되어버리는 순환은 진보적 부르주아가 기득권층이 되어버리는 과거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비록 앙리 모니에의 재치 있는 글 솜씨로 웃으면서 읽었지만, 웃음 속에 씁쓸함은 지울 수 없다. 200년 전 부르주아의 실체가 오늘날 우리에게 스스로를 되돌아보라고 따끔하게 말하고 있다.
V 리딩 투데이 지원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