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일상 감시 구역
김동식 외 지음 / 책담 / 2019년 12월
평점 :
SF소설을 읽기 시작한 지 정말 얼마 안 되었다. 아직은 읽었다고 하기도 민망한 수준이라서, 아주 크고 깊은 통 안에 들어 있는 잼이나 술 같은 걸 손가락으로 찍어서 맛만 본 느낌이다. 그래도 SF라는 장르의 맛을 아주 살짝이나마 보고 나니 새로운 책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번에 읽은 <일상 감시 구역>이라는 앤솔로지 역시 SF에 대해 아예 관심을 갖지 않았더라면 읽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된다. 다행히 운이 좋아 재미있게 잘 읽을 수 있었다. <일상 감시 구역>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일상에 SF를 접목한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일상에 SF적 요소가 가미된 소설들의 장점은, 기본적인 배경은 평범한 경우가 많아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단편 <살인 게임>은 섬뜩하지만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사람들의 뇌 데이터를 게임에 사용한다는 설정인데, 그 게임이 평범한 게임이 아니라 제목처럼 살인 게임이다. 나의 뇌 데이터를 사용한 게임 속 캐릭터가 특정한 상황에서 살인을 저질렀다면, 현실의 나 역시 같은 상황에서 살인을 저지르게 될까? 그 캐릭터는 내가 아니지만 나의 뇌 데이터를 사용했기 때문에 완전히 나와 별개의 존재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사실에 대해 고민하는 인물의 감정 표현과, 끝내 그 인물이 내린 결론이 아주 인상적이고 좋았다. 자세한 내용은 소설을 직접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단편 <목격자>는 클론 아이(아이라고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편의상 아이라고 한다)들 사이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다. 클론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해도 사람과 동등한 존재로 간주해야 하지 않을까? 이 고민은 꽤 전통적인 고민이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 속의 클론들은 정말 사람과 똑같이 사고하고 행동한다고 느꼈다. 물론 그들이 클론이기 때문에, 그리고 특수한 환경에 처해 있기 때문에 갖게 되는 성격적 특성들도 있다. 하지만 세심한 감정 묘사는 물론이고 클론들이 갈등을 빚고 해결하는 과정 역시 인간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클론 아이들은 언제든 친구를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 살면서도 친구를 잃었을 때는 평범한 인간처럼 슬퍼했다. 그 장면이 가장 마음 아팠다.
단편 <친구와 싸우지 맙시다> 역시 특이한 설정으로 마음을 잡아끌었다. 주인공인 리나는 '싸우지 않는 도시'에 사는데, 그 도시에서는 아무도 싸우지 않는다. 정확히는 싸우지 않아야 한다.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 지금으로부터 600년 뒤이기 때문에 <어벤져스>를 극장에서 보고 싶어하는 리나는 굉장한 별종인 셈이다. 독특한 영화 취향과 뚜렷한 주관 때문에 '싸우지 않는 도시'에서 친구와 싸우게 생긴 리나는 우여곡절 끝에 '친구의 도시'에 가게 된다. 친구의 도시에서는 역시 모든 이들이 리나와 친구가 되려 하고, 리나는 그 사실이 부담스러워 도망칠 궁리를 한다. 인상적인 점은 모든 이들이 친구가 되려 하는 친구의 도시에서도 잘 맞는 친구와 그렇지 않은 친구, 가장 친한 친구와 덜 친한 친구로 친구들을 구분한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게 딱 맞아 떨어지는 완벽한 친구는 친구의 도시에서도 찾기 쉽지 않다나. 하여튼, 리나가 친구의 도시에서 어떻게 되는지는 여기에 쓰지 않는다.
단편 <코드제로 알파>는 스토리의 어느 부분까지를 여기에 써도 될지 잘 모르겠는 작품이다. 몸이 불편해서 밖에 나가지 못하는 소년이, 자신과 친구가 되어 줄 만한 가정용 로봇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라고 하면 될까? 나는 책을 읽고 후기를 쓸 때 줄거리를 전부 쓰거나, 지나치게 많은 문장을 발췌하거나, 아주 핵심적인 내용이나 반전을 함부로 쓰지 않도록 노력하는 편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 대해서는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좋을지 애매하다고 느꼈다. 확실한 건 내가 이 소설에서 친근하면서도 불편한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불편한 느낌이란, 불쾌하고 싫은 느낌이라기보다는 익숙하지 않은 감정을 접했을 때 받는 느낌을 말한다.
나처럼 SF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들과 대화해 보면 SF라는 장르 자체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SF라는 장르가 무조건 전문적이고 어려울 것이라는 선입견을 버리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독자 개인이 일정량의 작품들을 읽어 나가면서 SF 독자로서의 저변을 확대해 나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럴 때 이 책과 같은 일상 SF소설을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장르적 재미는 재미대로 잡을 수 있으면서도 SF 입문자들이 부담을 덜 가질 수 있으니까. 노파심에 말하자면, 나는 본격적이고 어려운 설정이 있는 SF소설과 가볍고 일상적인 분위기의 SF소설 간에 우열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각자의 장단이 있고 독자의 취향에 따라 더 좋은 쪽이 있거나 할 뿐이다. 일상SF소설이 본격적이고 더 어려운 SF소설을 읽기 위한 가교에 그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단지 SF라는 장르의 맛을 보고 싶을 때 <일상 감시 구역>과 같은 작품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