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 시절 소설Q
금희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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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족 여성 소설가의 책을 읽어 본 것은 처음이었다. 여기에서 <천진 시절>의 작가 금희가 조선족 여성 소설가라는 사실을 굳이 언급하는 건 <천진 시절>이 조선족 여성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조선족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1998년의 중국 천진에서 살아가는 조선족 여성만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어울린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야기는 소설의 주인공인 '상아'가 옛 친구였던 '정숙'의 연락을 받고, 그들이 함께였던 '천진 시절'에 대해 회상하며 전개된다. 고향을 떠나고 싶었던 상아는 애인도 아니었던 '무군'과 얼떨결에 약혼한 뒤 무작정 함께 상경하여 천진으로 향한다. 새로운 지역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상아의 세계는 점점 넓어지게 된다. 물론 상아의 세계가 넓어진다는 것이 항상 긍정적인 변화만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천진에서 지내는 동안 상아는 자신의 약혼자인 무군, 다른 조선족 노동자였던 정숙, 그의 애인인 희철과 즐겁게 어울려 지낸다. 상아가 나중에 천진에서의 매일매일을 지루하고 발전 가능성 없는 나날로 여기게 된다 한들, 분명 천진에서도 행복했던 한때가 존재했다. 하지만 상아의 세계가 넓어지면서, 상아는 성실하고 선하지만 답답하게 느껴지는 무군과의 미래를 점점 그리기 어려워한다. 무군과 함께한다는 것은 언제까지나 한 칸짜리 방에 살면서 한 달에 월급을 천 원도 못 받는 노동자로 산다는 것을 의미했다. 무군은 가구가 없으면 목재를 주워다 가구를 만들고, 방이 좁아도 사랑하는 상아를 끌어안고 살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고 여길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책을 읽으면서 상아가 악하다거나 속물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 상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고향을 떠나고 싶었던 상아에게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심지어 약혼자인 무군조차도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해서 선택한 남자가 아니었다. 무군과 함께 천진으로 떠날 때에 와서조차 상아는 자신이 무군을 사랑한다고 확신하지 못한다. 무군이 상아를 사랑해서 자신과 함께 천진으로 떠날 상대로 '선택'한 것과는 달리. 

 "이런 것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에덴에 남겨진 단 한명의 남자와 단 한명의 여자 같은 경우. 다른 선택이란 있을 수 없고 절대적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유일하게 실재를 확인할 수 있는 낯익은 상대와 함께함으로 그에게서 느끼는 안정감과 친밀감, 의지하고 싶은 감정……이런 것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상아의 세계가 넓어지면서 두 사람의 관계에 균열이 생기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상아는 '부정한 여자'인 것으로 의심되는 '미스 신'이 입고 다니는 고급 옷, 수많은 사업체를 운영하고 자가용으로 상아를 데려다 주는 남자, 화려한 백화점과 같은 것들이 존재하는 세계를 천진에서 본다. 그러나 지금의 자신은 그런 세계에 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무군과 약혼하여 천진으로 오는 순간부터 인생의 방향이 정해져 버렸다는 생각에 우울해하기도 한다.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상아가 무군을 떠나며 끝을 맺는다. 상아와 무군이 곧잘 어울렸던 정숙과 희철 역시 비슷한 문제로 결국 파국을 맞는다. 수십 년이 지나 상해에서 우연히 재회하게 된 정숙과 상아는 아마 시간을 돌리더라도 그들이 똑같은 선택, 즉 희철과 무군을 떠났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역시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소설의 결말부에서 상아나 정숙이 많이 불행해지거나 파멸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거대한 시대에 휩쓸리며 살아온 개인들이 쓰라리지만 그립기도 한 과거를 추억할 수조차 없는 상황에 처한다는 것은 안타까우니까. 무군의 삶에 대한 언급이 상아와의 이별 이후로 끊겨 버렸다는 사실이 아쉽다는 반응도 많은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천진 시절'은 상아의 이야기니까. 소설 속에서 한국어도 중국어도 제대로 못 하는 어딘가 모자란 사람 취급을 받고, '믿을 것이 못 된다'며 욕설을 들어도 싼 것이 조선족 여성들이었고 그 중 하나가 상아였다. 그런 상아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서 좋았고, 상아가 불행하지 않아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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