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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에 대해 말하자면 - 김현진 연작소설
김현진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6월
평점 :
이건 내 이야기다. 아니, 우리의 이야기다. 책을 읽으며 그 생각을 했다. 내 이야기거나, 내 친구의 이야기거나, 건너 들은 어떤 여성의 이야기거나, 뉴스에 나온 다른 여성의 이야기라고. 내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임에도 감당하기는 힘든 일들이 있다. 사실이라고 믿고 싶지 않은, 차마 듣지 못하겠는,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싶은 일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들을 외면하지 못한다. 그런 일을 겪는 여성들은 곧 나 자신과 같기 때문이다. 소설가 박서련은 이 책의 추천사에서 이런 말을 한다. "이 이야기들이 남의 일이었으면 좋겠다. 작가와도 독자와도 상관없는 세계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들을 그린 것이라면 좋겠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들이 우리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을 외면할 수 없을뿐더러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정아와 지현, 정정은 씨, 영진, 윤정화, 지윤, 화정, 수연, 그리고 숙이. 이들은 어딘가에서 정말 살아 숨쉬고 있을 것만 같다.
나는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이 문제작이라는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문학은 현실을 비춰 보인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동창에게 다단계 사기를 당하고 갈 곳을 잃어버리거나, 오랜 시간 뒷바라지를 해 온 애인에게 버림받거나, 믿고 사랑했던 애인이 알고 보니 유부남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거나, 공중화장실에서 낯선 남자를 마주친다. 위에서 질리도록 말했지만 이런 일들은 정말 일어난다. 현실에서 충분히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쓴 소설이 어째서 문제작인가. 하지만 사람들이 이 소설을 문제작이라고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알 것 같다. 아직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작가를,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작가는 여기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삶을 '밋밋할 정도로 평범하다'라고 말했다. 소위 말하는 '불행 포르노'로 소비될 만한 여성들의 삶에 대해서는 쓰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지극히 밋밋할 정도로 평범한 여성들의 삶에 대해서도 듣고 싶지 않아한다. 그런 사람들이 많은 세계에서 이 소설은 당연하게도 문제작이 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나서 너무 과장한 게 아니냐고 할 게 뻔하다. 이런 여자가 어디 있냐고, 이런 남자가 어디 있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이전에 여성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 많은 책들 역시 그런 평가를 받아 왔다. 물론 그런 말을 할 만한 사람들은 애초에 이 책을 읽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모든 단편이 인상적이었다. <정정은 씨의 경우>의 주인공 정정은 씨는 어떤 일을 겪고 나서 성격이 뒤틀려 버린다. 정정은 씨는 자신이 야비한, 마음이 썩어 버린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렇게 독백한다.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음흉한 사람이 되었을까. 타인의 불행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되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정정은 씨는 누군가에게 잘못을 했고 상처를 줬다. 정정은 씨를 그런 사람으로 만든 이들은 정정은 씨에 대해서 생각하기나 할까. 자신이 마음과 시간, 돈을 쏟아부은 대상에게 배신당하는 여성들을 누가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여성들이 자신보다 힘 없고 약한 다른 여성들을 가해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에는 다양한 여성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는 그다지 훌륭하거나 멋지지 않은 여성들도 많다. 어떤 여성들은 어딘가 좀 이상해 보이기까지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상한 여성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매우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 재미있게 읽었다. 세상에는 멋지고 훌륭한, 남에게 본보기가 될 만한 여성들뿐 아니라 뭔가를 성취하지 못하거나 어딘가 이상하거나 비열한 여성들도 많이 살아가니까. 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여성들의 이야기도 해 줬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한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집을 읽어 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