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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날 모든 장소
채민기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3월
평점 :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저자 채민기는 언론사 기자이다. 문화부에서 근무하던 2021년, 언론인 해외연수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한국학연구소에서 방문연구원으로 1년을 보낼 기회가 생겼다. 아내는 회사의 새로운 업무에 집중하기 위해 한국에 남고, 저자와 딸 에스더(영어 이름) 둘만 미국행 비행기에 탑승하게 된다. 당시 저자는 문화부에서 건축 분야를 취재하고 있었는데 미국에 가서 미국의 건축에 대한 책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하지만 책을 내게 된다면 육아서가 되겠거니 싶었는데, 건축도 육아도 아닌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책이 되었다.
저자는 미국의 장소 중 가장 먼저 1년간 살게 된 미국 아파트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국 아파트 단지와는 다르게 미국은 아파트 동과 외부를 나누는 울타리와 같은 구분이 따로 없으며 동이 여러 개여도 지번을 따로 쓴다. 잔디밭 딸린 이층집에 살게 되겠거니 하다가 미국에 와서도 아파트에 살게 되어 당황했지만 미국식 아파트의 이모저모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1층 로비는 안락의자와 커피 테이블이 몇 개 놓여있고 공용인 듯한 아이맥 컴퓨터와 복합기도 있다. 꼭 호텔 로비의 축소판 같다. 비즈니스 호텔을 연상시키는 복도를 따라가다보면 피트니스 센터가 나온다. 옆에는 한국인 사장님이 운영하는 식당도 있었는데, 택배를 찾으러 나오는 입주민이 가끔 있다는 게 호텔과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의 아파트하면 여러 개의 동으로 나뉜 단지를 높은 울타리를 쳐서 외부와 구분시키고, 단지 내부에 상가, 공원, 학교 등을 모두 끌어안고 주로 아파트 주민들이 이용해서 성채와도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성채'라는 단어를 듣고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생각났다. 아파트에 살지 않는 외부인은 적대시하는, 특히 놀이터를 이용하는 아이들도 외부 아이들은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미국의 아파트는 동네의 일부로 느껴져 지역 공동체에 소속된 느낌이 들게 했다.
미국에서 딸 에스더가 학교에 입학하는 과정이 험난했다. 당시 코로나가 유행인 시절인데다 첫 등교날 눈이 많이 와서 학교가 문을 닫았다. 사흘째 되어서야 제설 작업이 마무리되고 난 뒤 11시에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온라인 수업을 계속했었는데 미국은 한국과는 학교에 임하는 자세가 달랐다. 미국 학교가 꼭 아이들과 가족, 교직원으로 이뤄진 지역 공동체에 가까워 보였다. 저자는 한동안 가까운 지인과만 알고 지내다가 에스더가 학교에 입학하자 처음으로 아는 사람이 생겼다고 한다. 에스더와 친해진 친구 아빠와 연락하게 되었고, 놀이터에서 놀다가 학교에서 만난 학부모를 만나 이야기도 나누는 등 이웃이 생긴 것이다.
또, 주말이면 학교에 장이 섰다. 처음에 인터넷으로 에스더가 다니게 될 학교를 찾아봤는데 농산물 장터가 학교 위치에 표시가 되어있어 오류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아이들이 하교하고 나면 교문이 닫히기 마련인데, 미국은 그렇지 않았다. 추수감사절만 빼고 날씨와 상관없이 주말이면 장을 열었다. 게다가 끝없는 이벤트가 있었다. 부모들이 자발적으로 마련하는 자리도 있어서 학교생활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었다.
미국은 놀이터가 많다. 아파트 단지에 의무적으로 놓아야하는 놀이터가 있는 한국과는 다르게, 미국에서는 정말로 아이들이 뛰어노는 놀이터가 많다. 도서관에서조차 계단 옆에 미끄럼틀을 만들고 지형지물을 활용하게 간단하지만 아이들이 즐겁게 놀 수 있는 공간이 다양하다. 미국에는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려면 마음껏 놀아야 한다는 믿음이 깔려있다고 한다. 아이도 노동력이었던 시대를 지나 이민을 오는 이주민이 많아지면서 거리의 아이들에게 안전한 놀이 공간을 제공하는 일이 미국 전역의 과제가 되었다고 한다. 한 의사가 독일을 갔다가 본 모래 놀이장을 보고 미국에도 도입할 것을 제안하여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국에 돌아와 딸에게 미국과 한국의 놀이터 중 어디가 더 좋은지 물어본 적이 있는데, 딸은 미국이 더 좋았던 것 같다고 답했다. 한국의 안전한 놀이터보다 좀 더 스릴 있게 만들어진 미국의 놀이터가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저자의 일상 이야기와 버무려져 사진과 함께하는 미국의 장소 이야기가 아주 재미있었다. 집과 학교, 놀이터 뿐만 아니라 미국의 일반적인 식당과 같은 '다이너', 튼튼하게 지어진데다 연중무휴 운영되어 비나 천재지변을 피할 장소인 '도서관', 세상에 상상력이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디즈니 랜드가 있는 '놀이공원', 넓은 땅덩어리만큼 다양한 자연 등등. 그저 눈으로 보기만 하고 돌아왔을 공간들을 건축 기자 아빠의 눈으로 들여다보니 깊은 의미가 있고 색다르게 보게 되었다.
다음에 또 미국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모든 날 모든 장소>를 읽었던 기억이 나면서 예전과 다르게 장소를 바라보려고 할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