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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기억 속으로 ㅣ 매드 픽션 클럽
엘리자베스 헤인스 지음, 김지원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피해자...그녀에게 목소리를 입히다
미국, 영국, 유럽과 일본 등등 국가를 가리지 않고 미스테리/스릴러 장르의 소설들을 읽다 보면 의도하지 않아도 유사점들이 보인다. 이들 작품이 가진 유사점 중에서도 오늘 말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는 범인과 그 범인을 추적하는 형사나 탐정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범죄에 대한 묘사나 범인 찾기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이들이 미스테리 장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잔혹한 연쇄살인마가 작품 속에서 죽이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이 때로는 공평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아마존 영국사이트에서 2011년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고 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의 이 작품 「어두운 기억 속으로」는 그동안 이 장르에서 자주 다루지 않았던 피해자의 입장에서 범죄를 서술하고 있는 보기 드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런던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캐서린 베일리는 출근하기 전과 퇴근하기 전에 집안 창문과 아파트 공용 현관문이 잘 닫혀져 있는 지를 매일 같이 확인하는 여성이다. 소설 첫 부분부터 마치 노이로제에 걸린 환자처럼 열려 있는 아파트 문을 보고 불안해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우리들은 그녀가 분명 무슨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캐서린이 런던으로 이사오기 전에 살았던 랭커스터에서의 행적과 현재의 그녀의 삶이 교차적으로 전개되면서 우리는 비로소 그녀가 끔찍한 데이트 폭력 사건의 희쟁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작품으로 미스테리 스릴러 문단에 데뷔한 영국 출신의 여류 작가 엘리자베스 헤인스는 범인이나 형사를 작품의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대신에 범죄의 피해자인 캐서린이라는 가녀린 여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로 그녀의 끔찍했던 과거가 점차 드러나면서 우리는 작가의 선택이 최선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범죄
이 소설이 스릴러 장르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작품 속에서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범죄 피해 사망자의 숫자는 불과 1명에 그친다. 수 명 혹은 수 십명에 달하는 범죄 피해자들이 등장하는 여타 다른 작품들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어떻게 이런 설정으로 이 소설이 뉴블러드 대거상이나 피플스 도서상 후보에 오른 것인지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데이트 폭력 사건의 희생자인 캐서린이 당한 충격의 강도는 그 어떤 살인 범죄의 그것과 비교해서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읽으면서 느꼈다. 그 어떤 살인이나 강도, 납치 사건의 공포와 충격에 뒤지지 않는 이유는 바로 데이트 폭력이 가진 특성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트를 하는 남녀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폭력 사건은 그 애매한 기준 때문에 경찰이나 법이 개입하게 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남녀 간의 사소한 다툼이 원인이라서 금방 해결될 것이라는 어리석인 믿음 때문에 경찰은 물론이고 피해자인 여성들까지 범죄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점을 가해자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반복적으로 폭력을 가하는 등 악용을 할 수 있다. 특히나 서구사회보다 보수적인 분위기가 강한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데이트 폭력이 사회 이슈로 등장한 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최근 3년간 우리나라 데이트 폭력 사건의 현황을 살펴 보면 매년 7500명이 되는 데이트 폭력 사범이 발생한다고 한다. 신고된 사건의 숫자만 따진 것이니 사랑해서 그런 것이라는 가해자의 달콤한 말에 신고를 포기한 경우까지 따져보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사건들이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데이트 폭력이 그 어떤 범죄보다 질이 낮은 이유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피해자들인 여성들은 이 작품 속의 주인공 캐서린처럼 정신적·육체적 상처를 입게 된다.
커다란 남자, 단호한 걸음걸이, 밝은 금발, 널찍한 어깨를 볼 때마다 나는 항상 그 사람을 리로 느꼈다. 나는 숨을 멈추고 남자를 보려고 노력했지만 그가 길 끝에서 모퉁이를 돌아 하이 가로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확실하게 확인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 사람일 리 없어. 나는 나 자신에게 말했다. 그냥 내 뇌가 또 장난을 친 거야. 그 사람이 아니야, 그 사람일 수가 없다고 그냥 내가 상상한거야.
- p.291
작가의 경험이 바탕이 된 논픽션 같은 픽션
유명한 대표작 한 권 없이 데뷔작으로 아마존 사이트에서 15만 부 넘는 판매고를 올린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신인답지 않은 작품의 디테일함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트 폭력 사건의 피해자인 캐서린이 사건 후 보여주는 전형적인 PTSD 증상과 강박 증상은 결코 상상만으로는 쓸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경찰 정보 분석가로 일하고 있는 저자의 경력이 이 소설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이유이다. 언제나 범죄의 곁에 있었던 그녀는 범죄 피해자들의 증상과 그들의 회복 과정을 상상이 아닌 조사를 통해 매우 구체적으로 작품 안에서 재현했다. 열심히 일하다가 금요일 밤이 되면 친구들과 가끔 클럽으로 가 기분전환을 하는 캐서린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여성이다. 하지만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그런 범죄의 피해자로 바뀐 순간, 그녀의 삶은 송두리채 바뀌게 된다. 매일 정해진 스케쥴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마음 속 어딘가가 불안하고 직장에서 제한된 인간관계 이외에는 가벼운 데이트는 꿈도 꾸기 힘들어지게 된 것이다. 새로 이사 온 이웃의 반가운 인사조차 혹시 모를 무서운 의도를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쓸데없는 상상을 하게 만드는 그녀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 범죄의 심각성을 알게 된다. 범죄 피해자로서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엘리자베스 헤인스는 캐서린이 어떻게 그 상처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는지도 자세히 보여준다. 캐서린은 자신에게 다가온 따뜻한 이웃 남자 스튜어트의 도움으로 심리 상담과 치료를 받게 된다. 제대로 된 치료와 상담을 받으면서 그녀의 강박 증세는 어느 정도 완화되고 마침내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가 어두운 기억과 당당하게 마주하게 만든다. 이런 치유의 과정을 통해서 그녀는 단순히 범죄 소설의 흔한 피해자로 남겨져 있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을 가해한 남자와 대적할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얻게 된다. 캐서린이 자신의 집에 무단침입한 전 남자친구인 리에게서 더이상의 공포감을 느끼지 못하는 소설 속 마지막 장면이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주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데뷔작으로 전 세계 스릴러 장르의 팬들과 비평가들을 동시에 사로잡은 이 소설은 그동안 범인의 관점이나 형사의 입장에서 범죄를 목격한 우리들이 그동안 피해자라는 존재를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매우 깊이 있는 작품이었다.
내 말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도 그의 목소리에서 어딘가 불안정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는 예전처럼 덩치가 크지 않았다. 아니면 내가 그저 내 머릿속에서 커다란 괴물을 만들어냈던 걸까? 어느 쪽이든 그 역시 나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그가 남겨놓고 간 그 캐서린과는 완전한 다른 여자였다.
- p.4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