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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
마일리스 드 케랑갈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6월
평점 :
차가운 바다. 세 명의 남자. 크리스토프 알바, 조앙 로셰, 시몽 랭브르. 그들 중 한 남자 시몽 랭브르의 삶은 그날 새벽 서핑 이후로 달라진다. 자연과 하나가 되는 멋진 순간을 만끽한 후 뜻하지 않은 사고. 비가역적 코마 상태. 가족들은 힘들게 장기 이식 결정을 내린다. 누군가의 삶의 끝맺음이 누군가의 삶을 연장하게 되는, 삶과 죽음이 뒤범벅된 24시간의 모습이 작가만의 독특한 문체로 눈앞에 펼쳐진다.
책 표지의 강렬한 첫인상은 지금도 생생하다. 주인공 이름이나 책 제목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내게 파도와 뇌파의 그래프 곡선을 보고 떠오르는 단어는 '수선(水線)'이었다. 물론 책 제목이 내포하는 단어의 뜻과는 다르다. 그렇지만 '수선(修繕)'이라는 단어는 'The Heart'라는 원제보다 자연스럽게 죽음에 따른 장기 이식 문제에 초점을 맞추게 한다.
이 책의 문체는 책 표지만큼 특별하다. 현재라는 캔버스 위에 과거의 단편적인 기억과 회상이 콜라주 기법처럼 장식되어 있다. 책 읽기를 혼돈의 도가니에 빠뜨렸던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의식의 흐름 기법을 연상시킨다. 의식의 흐름 기법은 매 순간 경험에 집중하기 위해 사건과 성격 분석 등을 최소화하고, 인물의 내면세계를 겉으로 드러나게 하는 방법이다. 저자는 괄호를 이용하여 현재와 과거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괄호의 처음과 끝을 잘 기억해야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고 사건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다. 독자는 인물들의 의식을 따라가며 자연스럽게 그들의 내면에 휘몰아치는 심리 변화를 낱낱이 경험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단편적인 사건일 뿐이지만 내면의 복잡함을 여과 없이 보여주어 독자의 상상력과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한 시간 뒤. 죽음이 모습을 드러낸다. 죽음이 자신의 도착을 알려 온다. 엑스레이가 보다 환하고 보다 넓은 형체로 투과되는 것을 막는 불규칙한 윤곽의 움직이는 얼룩. 바로 저거다. 저게 죽음이다. p.40
내게는 너무 먼 일처럼 느껴지는 죽음과, 죽음이 선언되는 순간이 언제일까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여전히 심장이 뛰는 시몽은 죽은 것인가, 살아 있는 것인가. 심정지뿐만 아니라 두뇌 기능의 정지가 진정한 죽음의 징표라고 선언한 때 태어난 소생 의학과 의사 피에르 레볼의 등장은 시몽의 의식의 소멸이 곧 죽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등장한 인물이다. 온전한 신체를 갖고 숨을 쉬는 인간의 죽음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부모의 입장이라면 상상하기조차 싫을 것이다. 시몽의 부모인 숀과 마리안의 장기 기부에 대한 주저함과 방향 없는 분노는 그래서 더욱더 절절하게 다가왔다. 사람들이 의식에서 말로 점차 현재형에서 과거형으로 변화되는 시몽의 죽음. 결국 그들은 고통스럽게 진실앞에 마주서고 죽음을 받아들인다.
소생 의학과 고압 산소 치료 센터 의사 피에르 레볼, 장기 이식 코디네이터 토마 레미주, 간호사 코르델리아 오울. 이들 3인의 기사는 시몽 랭브르의 죽음을 새로운 삶으로 탈바꿈시키는 일을 천천히 그리고 신속하게 진행한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적출된 장기들은 빠르게 삶의 열차로 환승한다. 장기가 사라진 시몽은 더 이상 시몽의 모습이 아닌듯하다. 그러나 시몽은 그들 3인의 기사의 호위 속에 온전한 형태로 복원되어 인도된다. 그들은 죽음 앞에 한갓 미물들과 별반 다름없는 폐허와 같은 인간의 모습을 조심스럽게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린다. 그리고 숭고한 인간의 마지막 모습에 온전한 마침표를 찍게 도와준다.
뿔뿔이 흩어지고 나면 그녀의 아들의 단일성에서 살아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만의 특별한 기억과 이렇게 분산된 육체를 어떻게 결부시켜야 할까? 그의 존재, 이 세상에 비추어진 그의 모습, 그의 혼은 또 어떻게 되는 걸까? 이러한 질문들이 부글거리는 기포처럼 그녀 주위를 맴돈다. 그러다가 시몽의 얼굴이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다. 말끔하고 온전하다. 그것은 나뉠 수 없는 것이다. 그게 그 아이다. p.309
시몽의 심장은 시몽과 함께 했던 마지막 순간, 마리안이 들려주기를 원했던 파도 소리를 기억할까? 이 책은 결코 상상하고 싶지 않은 죽음의 과정 속으로 독자를 사정없이 내던져버린다. 살아남은 자들이 미리 연습해 보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들. 두렵지만 나눠야 하는 이야기와 받아들여야 하는 모든 순간의 기록과 추억이 짧은 시간 동안 파노라마처럼 흘러간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저자 아툴 가완디처럼 단숨에 읽지는 못했지만, 빌 게이츠처럼 올여름 필독서로 강력 추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