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눈부신 친구 나폴리 4부작 1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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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라와 레누. 나폴리 4부작은 두 여인의 이야기다.  구두수선공, 시청 수위, 고리대금업자, 목수, 철도원, 야채장수, 제과점 등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도시 재건 사업이 시작되던 1960년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작가는 여자들이 글을 배워 직접 쓰기 전에는 인식조차 되지 못했던 여자들의 우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정이라는 이름 아래 누군가 부르짖던 거창한 '의리'는 등장하지 않는다.  부모와 형제들의 감시 속, 극도로 제한된 활동 반경에서 평범한 일상의 재건을 꿈꾸던 사람들처럼 스스로의 인생을 만들어 가기를 원하고 서로의 거울이 되어 주었던 두 여자.  교육, 환경, 시간의 제약은 그들을 시시 때때로 친구이자 엄마, 선생님의 대리자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며, 조용하지만 천천히 세상을 향한 잰걸음을 준비하도록 했다.


 

어른들은 어제, 그제, 길어봤자 한 주 전의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를 살아가며 내일을 기다린다. 그들은 그 이상의 것에는 관심이 없다. 아이들은 어제의 의미, 엊그제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내일의 의미도 알지 못한다. 아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현재이고 지금이다. p.29

그들의 이야기는 돈 아킬레 지하실 속으로 사라져 버린 레누의 인형처럼, 깊숙이 어딘가 묻혀버린 나의 유년시절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지만 다른 아이의 친절한 눈빛과 몸짓에도 경계심을 불태웠던 나의 단짝 친구의 모습이 어른거리기도 했고, 사내의 눈빛과 손길의 짜릿함이 아닌, 누군가의 모습을 이유도 모른 체 기다리고 갈망하던 시절의 아름다움에 나도 모르게 가슴 언저리가 찌릿한 기분이 들었다.  
라파엘라 체룰로, 리나, 또는 릴라라고 불리던 소녀.  그녀는 레누의 무의식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직관과도 같은 존재였다.  레누가 생각하지 않고 어떤 일을 결정할 때 그녀는 늘 릴라와 같은 행동을 했다.  지노의 호기심에 스스럼없이 옷을 들어 올려 가슴을 보여준다거나,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마을에서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대로 바다로 향하게 하는 힘.  직관의 힘은 순수하고, 강렬하고, 매혹적이며, 아름답다.  레누에게 릴라는 쫓아가야만 하는 이상향의 모습이자 평범한 일상을 한 단계 뛰어넘어 다른 세계로 향하는 꿈을 갖게 해주는 강렬한 태양과 같은 존재였다.  나의 릴라.  돈 아킬레 지하실에 묻혀 잊힌 나의 릴라가 책을 읽는 동안 번갯불이 번쩍이듯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번개가 치고 난 후에는 어김없이 큰 폭풍우가 들이닥친다.  소설의 도입부에 사라진 릴라처럼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나의 릴라를 이 책이 끝나게 되면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 찾을 수 있을까.  

내면의 릴라 찾기와 더불어 이 책의 또 다른 재미는 주변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가족들의 일상을 통해 1960년대 이탈리아의 사회와 경제 변화의 모습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었던 점이다.  또한 1945년에 여성의 투표권이 생긴 이탈리아에서 그녀들의 유년기의 모습과는 다르게 전개될 여자들의 모습을 기대하고 희망하게 해주었다는 점도 같은 여자인 내게 의미 있게 다가왔다.
2차 세계대전 후 이탈리아는 당시 유럽의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민주당, 사회당, 공산당이 공존하는 다당 체제의 혼란의 시기였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전쟁 전보다 산업 생산량이 2배 이상 증가했던 경제 부흥기였다.  대부업을 하는 돈 아킬레에 대한 과장된 얘기나, 주점 겸 제과점을 운영하며 좋은 차를 가지고 여자들을 희롱하는 솔라라 집안의 마르첼로와 미켈레는 신흥 부자들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그러나 로마 건국의 기초를 다진 영웅 아이네아스의 일대기를 다룬 <아이네이스>에 대한 릴라의 생각과 그 주제를 통해 글을 써 극찬을 받았던 레누의 작문 사건은 눈부신 경제 성장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어둡고 침침한 도시의 미래가 어떤 것인지 넌지시 암시하고 있었다.  이것은 앞으로 그들 앞에 벌어질 사건의 중심에 '부'가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들이 빈곤으로부터, 종속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필요한 열쇠는 '부'에 대한 끊임없는 열망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의 전후, 사랑의 전후, 삶의 전후.  릴라가 가장 궁금해하던 '예전'의 기준이 되는 최초의 순간은 과연 존재할까?  그리고 그들의 시작과 끝의 경계는 어디였을까.  릴라와 레누.  그들의 내적 성장과 외적 성장의 거대한 톱니바퀴는 그들도 모르는 사이 서로 맞물려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두 개의 거대한 톱니바퀴는 '세계'라는 커다란 시계가 되어 그들을 전혀 낯선 시대로 이끌고 있었지만 정작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릴라의  꿈이었던 신발 만들기와 레누의 꿈이었던 책 쓰는 일은 어떻게 될까?  릴라는 결혼과 함께 자신만의 신발을 만들 수 있을까?  레누는 니노와 운명적인 사랑을 이룰 수 있을까?  나는 이 책을 읽지 말았어야 했다.  릴라의 결혼식에 등장한 마르첼로의 발에 신겨진 릴라의 구두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던 1권이 끝나자마자 2권을 사야 했다.  두꺼워서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안나 카레니나 1권을 읽었던 때처럼.  16세기 프랑스 작가 몽테뉴는 “보통 여자들이 지닌 능력은 영적 교감을 나누기에 부적합하며, 여자들의 영혼은 그렇게 견고하고 질긴 관계의 압박을 견딜 만큼 튼튼하지 않은 것 같다"라고 썼다.  작가 몽테뉴가 살아있다면 그에게 보여주고 싶다.  엘레나 페란테의 <나의 눈부신 친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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