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낌없이 뺏는 사랑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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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 마땅한 사람들>의 작가 피터 스완슨의 처녀작 <시계 심장을 가진 소녀>가 <아낌없이 뺏는 사랑/푸른숲>으로 출판되었다.  이미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한 <죽어 마땅한 사람들>처럼 반어법을 사용한 제목은 아낌없이 '주는'사랑이 아닌 '뺏는' 사랑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을 유발하며 흥미를 돋운다.  하지만 <시계 심장을 가진 소녀>라는 원제를 보고 나니 책 속에 담긴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간 느낌이다.  

               

대학 입학 첫날 처음 만났던 조지와 리아나.  <아낌없이 뺏는 사랑>은 20년 뒤 두 사람의 우연한 재회로 벌어지는 사건과 20년 전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의 사건들이 각각 다른 시간대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함께 근무했던 신입 편집자 아이린이 다른 회사에서 승승장구하는 동안 회사의 발전을 기대하는 신입사원의 열정 어린 패기도 절정에 다다르는 섹스에 대한 탐닉도 사라져버린 조지의 일상은 권태로움 자체였다.  20년 전 첫사랑 리아나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20년 전 조지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리아나는 오드리 백이라는 여학생을 사칭해 대학교를 다니고 그 여학생과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유력한 용의자로 지명 수배된 그의 첫사랑이다.  믿고 싶지 않은 그녀의 실상 앞에 언젠가 자신 앞에 나와 핑계든 거짓말이든 해명할 리아나의 모습을 기대하며 대학생 조지는 '기다림'을 선택했다.  그러나 일말의 희망으로 남겨두었던 사건의 전모를 모두 밝혀 줄 그녀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갈등한다.  자신의 가슴에 봉인해버린 추억 상자를 다시 열어 볼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끝은 좀 이상했지만 그래도 아름다웠다고 생각한 자신의 추억이 어쩌면 산산이 부서질지도 모르는 것이다.  사춘기의 열병처럼 젊음과 함께 시간 속에 침잠해 있던 미궁의 사건들은 그와 관련된 모든 현실세계가 권태로울 즈음 서서히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며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로 자신도 모르게 얽혀들어가게 된다.

20년 전 조지가 그녀의 실체의 끝에 다가가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에 찾아가 매 순간 새롭게 알게 되는 사실 앞에서도 무모할 정도로 꿋꿋했던 그의 행적을 되돌이켜 생각해보면 그에게 용기가 부족해서 그만두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리아나와 함께 행복했던 시절, 그녀가 그에게 선물해 주었던 <레베카>의 한 구절처럼 진실의 끝에 언젠가 대면해야 할 그녀의 실체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닌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하지만 이번 생에서 멜로드라마는 충분히 겪었다. 그러니 현재의 평화와 안도감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기꺼이 오감을 버릴 것이다. 행복은 소중히 여겨야 할 소유물이 아니라 생각의 질이자 마음의 상태이다.
<레베카 중에서>



선택할 수 없었던 상황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물들은 때때로 끔찍하다.  조지에게 오드리 백으로 존재했을 때 리아나는 마약에 중독된 아빠, 끔찍하게 가난한 집안의 리아나가 아닌 평범한 집안의 오드리 백으로 영원히 살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의 모습이 진짜 자기 모습이라고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연장선 상에 있는 동일 인물이라는 조지의 말은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의 일생에 새로운 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그래서 리아나는 처음 섹스를 하는 오드리 백의 모습을 더 이상 연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약에 중독된 아빠의 빚을 갚기 위해 성 상납을 하던 시절의 리아나로 돌아가 그를 만족시켜 준다.  그날의 섹스는 조지에게 무아지경의 황홀했던 추억이 아니었다.  서늘하고, 아프고, 어딘가 아련한.  그래서 자꾸 되뇌게 되는.  버니의 마취 총에 맞아 정신을 잃었을 때 그날의 기억이 꿈처럼 나타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그날 그녀의 손목과 발목을 그녀가 선택하지 않았던 운명 속에 결박해버렸고, 그의 눈앞에 그렇게 결박당한 그녀가 같은 처지가 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 인정해. 알았으니까 진정하라고. 네 말에 극구 반대하는 건 아냐. 다만...... 어른이 됐을 때가 어릴 때보다 더 진정한 나에 가깝다는 말에는 완전히 동의할 수 없어. 잠깐만, 끝까지 들어봐. 난 두 모습 다 진정한 나라고 생각해. 사람의 태생은 무시할 순 없어. 아무리 그러고 싶다 해도 불가능해. 그건 늘 존재하고, 우리의 실체이기도 해. p. 288 

조지는 리아나의 부탁을 들어주는 일로 여러 사건에 휘말리게 되지만 매번 그녀 때문에 위험에 빠지게 되는 순간에도 그녀를 이해하고 싶어 했다.  조지가 아직 리아나를 오드리 백으로 알고 있었던 때, 멈춰버린 시계 심장을 가진 그녀를 찾아가지 않았다면 그녀의 일생이 지금보다 더 나아졌을까.  그렇지만 그로 인해 밝혀진 여러 상황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그녀의 행동에 면죄부를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멈춰버린 시계를 되살리고 싶을 만큼.  그녀의 존재를 원하고 실제로 가까이 다가선 사람은 그녀의 일생에 그가 유일했다.  

리아나로 인해 일어나는 끊임없는 사건들은 조지를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만들고 결국 그녀에 대한 그의 생각마저 '똥멍청이'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치부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는 기다림을 선택하고 추억으로 봉인했던 예전과는 달리 그녀의 실체를 찾기로 결심한다.  인생은 내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 않지만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라는 확신과 <레베카> 6페이지, 마야의 유적지 사진이 담긴 빛바랜 엽서 한 장이 그녀를 찾을 유일한 단서다.  그녀의 새로운 삶을 위해 그녀의 죽음을 증명할 마지막 증인으로 선택된 조지.  다시 한번 시계 심장을 깨우러 가는 조지의 여정에 더 이상 빼앗길 사랑이 남아있을는지.  시계 심장을 가진 소녀 리아나는 그의 바람처럼 과연 진짜 살아 있을까.  '찾아야 할 물건이 뭔지는 모르지만 보면 알 거야.'  작가는 책의 시작과 끝을 미묘한 글귀로 아우르며 독자의 시간을 아낌없이 빼앗아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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